71화. 기록의 도구
보상을 걸었다지만, 고블린들은 의심이 많았다.
“개미족의 말은 믿을 수 없다! 난 산맥으로 돌아갈 거야!”
인간들에게 보낸 고블린 중 상당수가 도주했지만, 그들은 대기 중이던 궁기병에게 사냥당했다.
“궁기병은 고블린들을 북쪽으로 몰아라!”
내 명령에 따라 궁기병이 양 떼 몰이를 하듯 고블린을 북쪽으로 몰았다.
굶주린 고블린들은 저돌적이었지만, 인간들은 목책을 세워 둔 터라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계속 보내라!”
해야 할 일이 많았던 터라 흑기사와 나르본느가 있는 기지에 충분한 식량과 함께 시중을 들어줄 하녀 개미들을 보냈다.
“조금 걸린다고 전해. 혹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하면 안내하고.”
“네! 불편함 없도록 잘 챙길게요.”
“그래.”
나는 연이틀 동안 인간들에게 고블린을 보냈다.
그러자 체력을 다한 인간 진영의 깃발이 하나둘 꺾이더니 숲 밖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퇴각하는 병사는 병사가 아니다.
무기를 버린 그들은 이제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냥감에 불과했다.
거기서 낙오된 인간은 고블린의 한 끼 식사가 됐다.
“결판났군.”
기껏 모은 고블린이 절반이나 죽었지만, 그들의 번식력을 생각해 보면 금세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고블린의 죽음은 내게 아무런 손실도 아니었고, 비유하자면 쌓여 있던 재활용 쓰레기를 한 차례 정리한 것과 마찬가지.
“다크 님, 여기 인간 귀 구해 왔다!”
“그래. 약속대로 암컷 고블린과 오붓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 주지.”
고블린들은 귀만 챙기고 급하게 돌아왔기 때문에 숲에 남겨진 인간 시체는 개미족의 몫이 됐다.
나는 약속대로 공을 세운 고블린 스무 마리를 선발하여 암컷 고블린 50마리가 갇혀있는 곳에 한 마리씩 넣어 줬다.
50대 1, 일종의 하렘 상황을 맞이한 수컷 고블린은 잠시 당황했지만, 오히려 좋다며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암컷 고블린들도 학대받던 상황을 싫어한 거지, 성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음 날, 확인해 보니 살아 나온 수컷 고블린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복상사하여 암컷에게 먹혔다.
* * *
나는 전장을 수습하며 대량의 고블린 영양과 인간 영양, 그리고 죽은 동료 개미의 사체를 회수할 수 있었다.
‘최상급도 꽤 있어.’
이번 전쟁에서 하위 군체를 늘리며 군체 인구가 폭증했고, 잡아들인 고블린과 인간도 수용 한계치에 도달해 둥지 안으로 들이지 못했다.
이제 숲의 절대자들과의 불가침 조약까지 맺어 천적이 없어졌으니, 인구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었다.
‘인구 1만이 넘어가니 과부하가 오는군.’
인구가 폭증하면서 둥지 구조가 급변하기 시작했고, 일리아나조차 둥지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
더는 주먹구구식의 관리가 힘들어지며 행정 체계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해졌다.
‘미리 준비했어야 했어.’
나는 조련 개미로 전직한 하녀 개미들에게 수용 중인 수컷 고블린들을 맡겼다.
3천에 달하는 수컷 고블린은 조련이 끝나는 대로 지하 공사와 대장간에 투입될 예정이었고, 암컷 고블린은 가죽 공방과 음식물 쓰레기장에 투입했다.
수컷 고블린 노예는 관리만 되면 가성비가 좋은 편인데, 문제는 인간들이었다.
유리에게 받은 노예와 성채에서 구해온 인간을 합하면…….
남자 100명, 여자는 650명이나 된다.
둥지에 있는 여자들도 50명이 넘었으니.
‘800명이라.’
남자들은 대체로 농사, 목공, 석공 등의 기술을 가졌지만, 개미족보다 수준이 떨어졌다.
여자들은 농사, 채집, 무두질, 실잣기, 천 짜기 등을 할 줄 아는데, 농사와 채집은 만능 일꾼인 미니 워커에게 밀렸고, 실잣기와 천 짜기는 스마트 워커가 더 잘했다.
개미족 인구가 급증하며 일시적으로 활용 가능한 땅덩어리가 부족해진 상황이라 전문성이 부족한 인간에게 나눠 줄 일감이 없었다.
그렇게 밀려난 인간 노동력은 광부로 써먹어야 하는데, 건장하지도 않아 고블린보다 가성비가 떨어지니…….
마치 기계 문명에 일자리를 빼앗긴 인류처럼, 지금의 개미족 둥지에선 인간의 가치가 땅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노동 가치는 떨어져도 영양적 가치가 낮지 않아 치프 앤트 쿠쿠가 눈독 들이곤 했다.
“다크 님, 인간들 좀 정리할까요?”
“아니, 더 키워서 먹을 거니까. 그대로 둬.”
둥지가 빠르게 확장되고 있어 일감 부족 현상은 오래가진 않을 테고, 내 계획에 인간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인간의 생물 특성을 생각하면, 개미족에겐 없어선 안 될 존재들이야.’
지금처럼 지하에 숨어서 살아간다면 쓸모없을지 모르지만, 개미족이 대륙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선 상업과 종교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개미족에겐 소비력이 없어. 일하느라 바빠서 신앙생활도 못 해.’
전생에 읽었던 사피엔스란 책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상상한 걸 믿었고, 신과 돈의 가치를 믿음으로써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해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게 해 준 생물적 특성을 이용해야 해.’
개미족만으론 상업과 종교를 발전시킬 수 없으니, 인간을 이용해 개미족을 위한 상업 체계와 종교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지금 이상의 행정력이 필요한데, 기록이 오가지 않는 대면 보고만으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문자가 필요해.’
800명의 인간 중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을 물색해 봤지만, 읽을 줄 아는 사람이 50명 정도였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흠…….’
이곳 문맹률이 심각하단 걸 깨달은 나는 소리 문자인 한글을 개량하여 이곳 대륙 언어에 적합한 문자를 만들기로 했다.
‘더는 못 기다리겠다. 일단 만들어 쓰자.’
문자를 만들어 가르치려면 종이, 잉크, 연필 등이 필요했는데, 이미 재료는 모두 갖춰져 있었다.
종이는 지하 5층 뽕나무 껍질을 사용하면 되는데, 고급 종이가 필요 없다면 즙을 짜낸 사탕수수 찌꺼기로도 충분했다.
‘섬유질이면 돼.’
나는 사탕수수 찌꺼기로 종이를 만들어 봤다.
착즙이 완료된 사탕수수 찌꺼기를 찌고, 잿물에 넣어 한 번 더 쪘다.
잿물로 찌는 건 표백 효과를 얻고, 덤으로 강도, 내구성, 보존성 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불을 때야 해서 놀고 있는 인간들을 투입했다.
섬유가 풀려 흐물흐물해지면 거름망이 깔린 제지용 틀에 넣어 잘 흔들어 줬다.
틀 안의 섬유가 고르게 분포되자, 식물을 엮어 만든 망사채로 가볍게 눌러 물을 뺐다.
“잘 나왔네.”
종이 모양으로 만들어진 젖은 섬유를 준비해 둔 나무 판에 붙였고, 여기에 풀 따위를 발라 잘 말려 주면 종이가 완성된다.
풀은 밀가루와 찹쌀처럼 점성 있는 식물을 끓이면 얻을 수 있지만, 시간을 아끼고 싶었던 나는 개미족의 접착액을 희석해 사용했다.
‘성공이야.’
개미족의 접착액의 효과인지 생각 이상으로 양질의 종이가 만들어졌다.
남은 건 공정을 나누고, 효율적인 동선 배치와 필요한 설비를 갖추는 것.
즉, 공장화다.
지하 5층에 엔지와 디그파를 투입해 종이 공장을 만들었다.
그동안 다양한 시설을 만들고 물건을 개발할 때 생긴 노하우가 총동원되었다.
먼저, 종이 제작 공정에서 페달식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과정을 선별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 식물을 빻는 기계식 절구였다.
다음으로 대형 솥과 거치대를 만들고, 도르래를 사용해 물을 쉽게 뺄 수 있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흐물흐물해진 섬유가 잘 흐를 수 있도록 원형의 물길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종이가 잘 마를 수 있게 건조실을 만들어 선풍기를 배치했다.
선풍기는 페달 동력으로 만들어서 매우 비효율적이었으나, 개미족에게는 끊임없는 일 제공이나 마찬가지라 인기가 좋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종이의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춘 나는 연필 공장도 만들었다.
흑연은 둥지에서 버려지는 광물들 중 하나였고, 그 양도 충분했다.
흑연을 연필심으로 만들기 위해 정제하는 과정 역시 기계식 절구가 사용되었다.
잘 만들어진 흑연 반죽은 착즙기를 개량한 기계를 사용해 국수처럼 뽑아냈다.
그러고 나서 원통형 철을 이어 붙인 컨베이어를 만들어 운반했고, 작두를 사용해 일정한 크기로 잘라냈다.
마지막으로 오븐에 넣어 잘 구우면 연필심이 완성됐다.
흑연과 점토의 최적 비율을 찾는 건 노가다가 필요했지만, 엔지 밑으로 많은 부하가 생겨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생산된 연필심을 목공소에서 다듬은 나무에 끼워 접착액으로 붙이면 초등학교 때 흔히 쓰던 나무 연필이 됐다.
‘지우개를 달고 싶군.’
고무나무를 남쪽 숲에서 보긴 했지만, 아직 천연고무를 공업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황을 구하지 못해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흑연은 글씨가 번져서, 기록용으론 적합하지 못해.’
글을 배울 때 연필을 쓰면 필요한 근육을 키우기 좋다.
그러니 볼펜은 되도록 늦게 잡으라는 건데, 워커맨들은 지도를 정교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니 글씨 연습은 필요 없을 듯했다.
기록용으로 쓸 잉크는 아카시아 나무 수액인 아라비아 검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아라비아 검을 물에 섞어 마시면 칼슘도 풍부하고, 대장 활동에 도움이 돼서 건강식품으로 괜찮지.’
전생에 아라비아 검을 수입하여 식품으로 판매해 보려 했지만, 쟁쟁한 경쟁사들의 방해로 대량의 재고를 떠안게 된 적이 있었다.
안 팔리는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창고 관리 비용으로 인해 지속적인 피해가 발생한다.
그러니 하루빨리 물건을 떠넘길 대상을 찾아야 했는데, 나보다 먼저 물량을 풀어버린 놈들이 있어 식품으로 취급하는 곳에 넘기긴 어려워졌다.
다행히도 아라비아 검은 식품 외에도 용도가 많았다.
적황색 고체인 아라비아 검은 물에 잘 녹으며 점성이 있었고, 기름과 물이 섞이도록 하는 유화제로도 쓰였기에 공업용으로 곧잘 쓰였다.
‘염색, 잉크, 종이, 페인트 공장을 돌며 팔아 치웠지.’
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잉크 제작에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 봤다.
‘아라비아 검을 물과 섞어 걸쭉하게 만든 후, 검정 색소인 그을음을 섞는 거야.’
그을음이야 숯을 만들다 보면 나오는 거고, 아라비아 검은 지하 6층 꿀벌족의 거주지에서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꿀벌족의 서식지에 방문하니, 꿀벌족 대표인 허니 퀸 아르모네가 나를 반겨 줬다.
“다크 님, 어서 오세요.”
아르모네가 다가와 더듬이를 내밀었고, 더듬이 인사와 함께 영양 교환을 청했다.
“로열젤리예요.”
개미족과 꿀벌족은 사교위에 저장해 둔 영양을 나눠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인간화가 돼서도 그런 습성은 여전하여 가끔 깊은 스킨십이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갓 진화했을 때는 인간형 개미들과의 직접적인 영양 교환을 꺼렸지만, 적응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로열젤리를 한껏 받아먹은 후, 사교위에 듬뿍 저장한 나는 지하 6층 풍경을 훑어봤다.
‘천적이 없으니 꿀벌족도 늘어나는 속도가 빨라.’
그들이 번성할수록 지하 6층은 더욱 화려해지고 울창해졌다.
아카시아 나무들도 충분히 자란듯하여 아르모네에게 수액을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수액이요?”
보통 몬스터들은 자신이 자원으로 취급하지 않는 건 잘 몰랐다.
“저기 적황색 보석 같은 거 말이야.”
“네!”
그제야 알겠다고 말한 아르모네가 허니 퀸들을 모았다.
“다크 님이 이게 필요하다셔.”
“알겠어! 얘들아! 모두 이걸 모아 오렴~”
자이언트 허니비들이 오가며 아라비아 검을 모았고, 나는 세크리에게 이곳에 잉크 공장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네! 엔지와 디그파를 불러올게요!”
아라비아 검, 물, 그을음만 섞어도 잉크는 만들어졌지만, 방부제를 첨가하지 않으면 금방 썩는다.
방부제로는 주로 향유를 몇 방울 첨가하는데…….
나는 개미족에게 골칫거리나 다름없는 암염을 정제하여 넣기로 했다.
‘소금으로도 방부 효과는 충분할 거고… 꿀도 조금 넣어 주면 잉크의 보습성이 좋아질 거야.’
재료는 정했다지만, 최적의 비율을 찾기 위해선 다양한 배율로 섞어서 시험해야 한다.
이러한 노가다 공정은 엔지의 부하들이 전문가였다.
엔지와 부하들이 최적의 비율을 찾아 잉크 공장을 만드는 동안, 나는 고블린 대장간에서 만년필을 만들었다.
주조로 형을 만들고 다듬어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만년필.
볼펜처럼 둥그런 구슬이 펜 끝에서 굴러다니는 게 아니라, 그저 5대 5로 쪼개진 공기구멍 하나만 뚫려 있는 형태여서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5대 5로 정확히 쪼개져 있지 않으면 잉크가 예쁘게 나오지 않아 불량품으로 처분해야 했다.
종이, 잉크, 만년필 등을 확보한 나는 대륙어에 맞게 한글을 개량했다.
‘이 정도려나.’
인간은 기록을 통해 위대해졌지만, 나만이 알아보는 기록에 의미는 없다.
진정으로 위대해지려면 내가 만든 문자가 문자로서 기능해야 하니…….
‘한글 교과서를 만들자, 기왕 만드는 거 수학책도 만들어야겠어.’
교과서와 함께 교육기관을 만들 생각이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