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종마와 화폐
‘너무 오랜만이라 어렵네.’
조카의 공부 정도는 봐준 경험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교과서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 케어, 일리아나, 트라이, 세크리, 엔지를 비롯한 워커맨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며 기본이자 핵심이 되는 이론들을 정리했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문법, 문학.
개미족에게는 문학이랄 게 없었으니, 내 나름대로 유용한 이야기를 선별했고, 일상에 접하는 사물과 생물에 관한 내용이 채워졌다.
수, 분수, 소수, 사칙연산, 제곱, 도형, 길이, 각도, 둘레, 넓이, 집합, 방정식…….
무게와 시간 같은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들은 추후 기술이 좀 더 발전한 후에 정리하기로 했다.
‘워커맨들은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나단 말이지.’
인간과 고블린에게도 한글과 수학을 가르쳐 봤다.
인간들은 답답했고, 고블린은 답이 없었다.
‘인간을 써먹으려면 상당 시간을 가르쳐야 할 것 같고… 고블린은 제사장과 진화체들에게나 가르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게 좋겠어.’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고 연구할 전문 인력을 선발했는데, 케어가 흥미를 느꼈는지 적합한 개미를 여럿 추천해 줬다.
채용된 전문 인력과 함께 기본 교과서를 완성했고, 인쇄용 잉크와 금속활자를 활용한 인쇄기 개발에 들어갔다.
기록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인쇄술의 발전은 정보 혁명을 일으켰다.
‘지식의 공유!’
이동 혁명을 촉발한 바퀴의 발명만큼이나 대단한 일이었지만, 모든 혁명의 시작은 초라한 법.
개미들의 노가다 끝에 인쇄용 잉크가 개발되며 활자본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흘러 책이 찍혀 나왔고, 교사로 채용된 워커맨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숙지시켰다.
적당한 장소에 학교를 만들고, 워커맨, 인간, 키카와 같은 진화체 고블린을 가르치게 했다.
워커맨 외의 다른 개미들도 기억력만큼은 떨어지지 않아서 문자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 했지만, 이들은 눈이 좋지 못해 학습할 수 없었다.
한글이 보급되며 정보의 공유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들이 각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했다.
‘개미교의 교전은 인간들과 함께 만들어야겠어.’
루리아를 비롯한 기존 인간 멤버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을 때, 유리가 하이 페어리를 통해 접선을 청했다.
“세크리, 궁기병 300인대 하나만 불러.”
“네!”
세크리에게 처치 곤란한 비단, 가죽, 고블린 귀 등을 챙기게 했고, 상품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종이와 만년필도 가지고 길을 나섰다.
얼마 후, 고블린 산맥에 진을 치고 있는 유리와 몰래 만났다.
“이건 선물이다.”
고블린 귀를 받아든 유리는 무릎을 꿇고서 고마움을 표했다.
“흑탑의 은혜는 잊지 않겠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물었다.
“그런 건 됐고, 다른 물건들은 어때?”
유리는 비단, 종이, 만년필 등을 보곤 놀라워했고, 구석에 찍혀 있는 개미 문양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가죽은 하품이고, 나머지는 왕국에서 구하기 힘든 상품이군. 저번에 맡긴 비단은 암상인을 통해 처리하느라 수수료가 조금 컸다.”
구석에 찍어 둔 개미 문양 때문에 값이 깎이기까지 했다는데, 유리는 비단을 판 돈으로 스무 명의 하품 노예를 사들일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가치가 비단 20필 이하라니.’
조금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물가에 대한 건 시간을 내어 조사할 생각이었던 나는 가져온 물품을 유리에게 넘긴 후 본론에 들어갔다.
“고블린 로드는 우리가 정리했다. 수급은 내줄 수 없어. 그리고 겁도 없이 숲에 들어온 인간들은 너와 관계가 없어 보여 고블린들을 이용해 쫓아냈다.”
“그쪽 상황은 들었다. 덕분에 내 입지가 좋아졌어.”
상황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유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놈들이 날 바르퀴르 자작으로 추대했어.”
뭐가 문제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자작이 되면 백작위에 욕심낼 명분이 약해진다. 거기다 인근 영주들과의 관계도 예전과 같을 순 없어.”
무너진 영지를 재건하려면 파벌 귀족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를 지지해줄 귀족이 몇 명이나 될지는 미지수라 했다.
“거절할 명분도 없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내 파벌은 반토막 난다고 봐야 해.”
그는 지금의 상황을 진퇴양난으로 받아들였지만, 내게는 다르게 생각됐다.
‘잘됐어. 유리가 바르퀴르 성을 맡으면 인간들과의 충돌도 줄어들 거야.’
그럼 동쪽 황무지를 제외한 서, 남, 북쪽의 수장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격이니.
‘한동안 개미족을 건드릴 세력이 없다!’
일대의 개미족을 통합한 지금, 내정에 시간과 인력을 투입할 수 있다면…….
‘둥지를 더욱 넓히고, 농업, 공업, 상업, 행정, 종교, 문화를 발전시키면 인간들에게 뒤지지 않는 왕국을 만들 수 있어.’
개미족의 규모가 커지면 갑각왕을 비롯한 왕급 녀석들을 포섭할 계획이었고, 사도들을 찾아내 이용할 생각도 있었다.
나는 유리의 등을 떠밀어 주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백작이 아닌 자작이 되더라도 우리와의 약속은 유효할 테니.”
“고맙군.”
이야기를 마친 유리는 영주가 되는대로 내게 연락을 주기로 했다.
“고블린 로드 건과 오늘 가져온 물품에 대가는 그날 치르겠다.”
“그러든지.”
둥지에 돌아오니 메디가 보낸 허브 워커가 날 찾았다.
“다크 님, 고블린 로드가 깨어났습니다.”
“그래?”
폭주한 마력 때문에 전신 기맥이 찢긴 그는 더 이상 강자라 불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됐다.
“왜, 왜 날 죽이지 않은 거지…….”
마력을 모두 잃어도 정점에 올라선 과거 때문인지, 일반적인 고블린과는 확실히 다른 기운이 그의 곁을 맴돌았다.
“네가 고블린 로드이기 때문이다.”
“힘을 잃은 날 따를 고블린은 없다. 그러니 로드라 할 수도 없지.”
“사자는 사자다. 힘을 잃고, 세력을 잃었다고 해서 고양이가 되는 건 아니지.”
고블린 제사장인 키카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로드의 존재는 일대의 고블린을 늘리고, 성장시키는 존재라고.
즉, 놈은 고블린의 번식력과 진화율을 상승시키는 토템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고블린의 무서운 번식력에 날개를 달아 주는 존재가 로드야.’
한때는 멸종시킬까도 생각했지만, 세력전에서 완벽히 압승한 지금은 선택할 여유가 생겼다.
‘고블린 노동력은 가성비가 좋단 말이지.’
둥지 확장 공사도 한참 진행해야 하니…….
멸종시키는 것보단 이용하는 쪽이 이롭다고 판단한 나는 고블린 농장을 계획했고, 그곳의 품질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로드는 필요한 존재였다.
‘21세기의 종마 값은 상상을 초월했지.’
종마뿐만 아니라 가축의 우량종은 철저히 관리됐고, 그들의 씨앗은 상당한 가치에 거래되는 법.
그렇게 우량화에 힘쓴 한우는 2010년에 무게 400킬로가 나가던 녀석들이 2022년에는 1톤이나 나가게 됐다.
즉, 고블린 로드의 씨앗은 뛰어난 개체를 탄생시키는 보장 수표와 같으니, 고블린 농장을 운영할 내게 있어 로드는 양질의 고블린이 주렁주렁 맺힐 고블린 나무와 같았다.
“움직일 수 있겠나?”
“힘들겠군.”
아직 회복 중이던 그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고, 메디는 반년 정도의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다.
“약초를 충분히 써도 되니, 두 달 안에 회복시킬 수 있겠어?”
“그래도… 잃어버린 힘은 회복할 수 없을 거예요.”
수술로 부러진 뼈를 맞출 순 있어도 틀어진 마력의 통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괜찮으니까 약초를 충분히 써서 움직일 수 있도록 회복시켜둬.”
“네.”
메디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나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고블린 노예들이 지하 공사에 투입되고, 개미족 인구가 급속히 불어나며 둥지의 공사 인력이 급증했다.
천적이 사라지며 무력 부대도 하나둘 해체되어 공사에 투입되자 공사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나는 공사 인력 일부를 남쪽 영역에 투입해 지하 수련장을 만들게 하여 나르본느와 흑기사를 모셨다.
“너, 개미라 그런지 되기 바쁘구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삐질 거라고 생각한 나르본느는 예상과 달리 매우 느긋했다.
“뭐, 일부터 끝내라고. 수련은 급한 게 아니니까.”
나르본느는 하녀 개미들의 시중을 맘에 들어 했으나, 인간인 흑기사는 개미들의 시중을 거부했다.
“적은 네 성장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당장 수련을 시작했으면 한다.”
흑기사는 예나 지금이나 날카로웠고, 한시라도 빨리 날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직 내겐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한 달만 기다려 주세요. 그 안에 일을 마치고 올게요.”
“한시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을 거야.”
여름 우기가 찾아올 때쯤, 둥지 2층을 충분히 확장하여 밖에 있던 인간 750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됐고, 확장 속도가 가속되며 2층 공간은 더욱 넓어질 전망이었다.
인간이 800명이나 되니 개미족만으로 관리하기 어려워졌다.
인간들의 거주지에 신전을 만들게 한 나는 루리아, 줄리아, 비앙카, 비안느, 세리카, 데이지에게 사제라는 감투를 씌워 주며 신전과 인간의 관리를 맡겼다.
“귀족도 아닌 저희가 잘할 수 있을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반은 가니까.”
개미교 자체가 개미족과의 공생을 위한 종교다 보니, 기본 교리는 매우 단순했다.
1. 개미 신을 믿을지어다.
2. 개미족에 대해 배우고 공생할지어다.
3. 맡은 소임에 충실할지어다.
4. 죄를 짓지 말지어다.
5. 개미 신께서 일과 양식을 내려 굶주림을 없앨 것이고, 부와 명예를 뿌릴 터이니 노력하여 거둘지어다.
우선 기본 교리의 틀만 세우고 디테일은 사제들이 채워 나갈 예정이었다.
둥지가 급속히 확장되며 남는 땅이 생기자, 사제들에게 교육을 받던 인간들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바로 밀 농사였다.
농사 효율은 개미족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남는 땅과 인력이니 써먹어야 했다.
“다크 님, 말이 밥을 안 먹어요.”
사육 전문 간부인 마고트가 말 사육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니, 왜 이러지?”
다양한 시도를 해 봤으나, 모두 실패하면서 말은 인간들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그들은 말을 매우 귀중히 다루었고, 말들도 개미족이 관리할 때보다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개미족이 말을 키울 수 없을 줄이야…….’
앞으로 가축 담당은 인간들이 맡아야 할 듯했다.
고블린이야 쓰레기를 먹이면 된다지만, 인간들에겐 한동안 식량과 물자를 배급할 필요가 있는데.
얼마나 배급할지 고민하던 중 창고에 쌓여 있는 최하급 마석과 하급 마석을 보게 됐다.
‘꽤 쌓였네.’
몇 년 동안 주야장천 전쟁만 했으니, 마력 보충액 생산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쌓인 마석들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인간들의 거주지와 고블린 거주지에 잡화점을 열었다.
그곳에 인간 점원과 워커맨 점원을 세트로 배치하여 생산품의 매입과 다양한 자원 및 상품을 판매하게 했다.
화폐로 쓰일 마석은 개미족이 시킨 일을 맡은 사람과 고블린에게 일당으로 지급하거나, 그들의 생산품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제공했다.
마석으로 각종 자재와 생필품을 교환할 수 있고, 치료를 비롯한 개미족의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니 인간과 고블린 사이에선 마석 화폐가 쓰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개미족들은 플레이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마석을 회수해 가는 NPC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개미족의 성향상 개별 저축은 없어.’
인류의 발전 동력은 탐욕이지만, 망치는 것도 탐욕.
개미족도 탐욕은 있으나, 그 방향성 자체가 다르니 같은 문명을 걷지는 못한다.
‘오히려 좋아.’
개미족의 노동력과 자원이 모두 내게 집중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이를 잘만 활용하면 소수의 지도층 개미가 모든 권력을 지닌 독재 국가를 만들 수 있다.
당연히 그 소수에 내가 있을 것이고, 다른 지도층의 성향을 봤을 때 나의 일인 독재가 될 가능성이 컸다.
지금의 마석 화폐로는 도저히 시장 활성이 불가능할 듯하여 추후 이곳 클라우드 대륙이 쓰는 화폐를 도입할 생각이었고, 임금과 세금도 측정할 생각인데 그러려면…….
‘복식부기가 필요하겠어.’
회사에서 다양한 일을 소화해내며 못하는 것 빼곤 다 할 줄 아는 나였지만, 나름 회계학도였기에 기록, 데이터 분석, 임금과 세무 쪽은 전문 분야라 할 수 있었다.
‘이곳 물가를 모르니, 임금은 너무 높이지 말자. 생산력을 상정해서 측정해야 해.’
복식부기의 필요성을 나열하자면 40분짜리 강의가 되겠지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돈의 흐름과 재산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된다.
즉, 복식부기가 보급되면 돈 관리가 쉬워진다는 의미였고, 이는 조직 관리가 쉬워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 상업 발전에 있어 꼭 필요한 요소라 할 수 있었다.
‘복식부기만 도입되면…….’
무력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이 오게 되고, 그건 내게 있어 최고의 전장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았다.
‘나의 지식과 경험은 개미족을 신세계의 지배자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전공 분야에 들어가며 살짝 중2병이 도질 것 같아 생각을 멈췄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