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한계 파악
‘일단 복식부기의 틀을 만들자.’
이 세계에 맞게 간략한 기록 방식을 만든 나는 선생 개미들을 찾아가 복식부기에 대해 가르쳤고, 함께 교과서를 만들었다.
개혁의 씨앗은 충분히 심었다,
이제 느긋이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지금 속도로 워커맨들이 교육과정을 마친다면, 1~2년이면 서류 행정이 가능해질 거야.’
할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고 판단한 나는 산란방을 찾았다.
포스가 진화하면서 개미족의 전체적인 무력이 크게 상승하여 지금의 빅 워커는 고블린도 쉽게 잡아낼 정도가 됐다.
거기다 로열젤리를 공급받은 산맥의 여왕들이 하나둘 자이언트 팩토리로 진화하여 군체의 알, 영양, 치유액 생산량이 급증했다.
외곽의 개미들도 종종 진화했기에 군체의 업그레이드는 계속되고 있었고, 현재 월평균으로 보면 페르가 350, 케어가 60, 포스는 120개의 알을 낳고 있었다.
포스는 무투파 개미들에게 무신처럼 떠받들어졌고, 산란할 때를 제외하곤 훈련실에서 수련을 쌓았다.
포스가 진화한 것 때문인지 페르는 의기소침해 있었고, 케어는 평소대로 날 반겨 줬다.
“내년 봄까지 남쪽 기지에서 수련하려고 해요.”
“잘 갔다 와…….”
축 처진 페르에 이어 케어가 걱정하며 물었다.
“거미왕과 흑기사를 신용할 수 있겠느냐?”
“나르본느는 저와 같은 데몬 계열이라 동질감이 있어요. 흑기사도 비슷하고요.”
“떠나기 전에 포스에겐 꼭 말하고 가거라.”
케어는 거미왕과 흑기사를 경계했지만, 포스는 그렇지 않았다.
“네 수련을 봐준다니, 그건 고마운 일이군.”
“포스 님은 둘을 믿으시나 봐요?”
“걱정하지 마라. 놈들에겐 널 해할 마음이 없어.”
포스의 논리는 간단하다.
그들이 날 해하려 했다면, 난 이미 죽어 있을 테니까. 그들에겐 날 해할 마음이 없다는 것.
“마음 같아서는 내가 너의 수련을 봐주고 싶지만, 네 마력을 생각한다면, 거미왕과 흑기사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포스는 짙게 웃으며 응원했다.
“하루빨리 진화하거라. 급을 맞춰 온다면 진심으로 상대해 주겠다.”
대 고블린 로드 합공 훈련 때 나의 무력이 들통났고, 그 후 포스는 가끔 급에 대해 언급하며 날 놀렸다.
“질 게 뻔한 싸움은 피하자는 주의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기다리마.”
둥지의 일은 각 간부에게 맡겼고, 세크리는 내 전속 하녀로 데려갔다.
세크리의 빈자리는 하녀 개미인 메이든과 행정 개미인 리서치가 메워줄 거라 걱정은 없었다.
가을 중순부터 시작된 흑기사와 나르본느의 수련.
둘은 내가 일을 보는 동안 수련 일정을 짜 뒀고, 필요한 물자도 하녀 개미를 통해 준비한 상태였다.
“먼저 자신의 신마력에 대해 깨닫는 게 중요하다!”
흑기사의 이론 강의가 시작됐고, 나르본느는 지루함을 참으며 함께 들었다.
“신마력은 특수한 흑마력이며 각기 다른 권능을 품고 있다. 나의 신마력은 무적의 권능을 품고 있지.”
‘무적이라… 말장난인가?’
“나르본느는 어떤 권능이에요?”
나의 물음에 나르본느는 섬뜩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능력. 그러니 비밀이야.”
“…네.”
일단 자신의 신마력이 어떤 권능을 품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며 다양한 실험을 해 보려던 흑기사였지만,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던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제 마력은 다른 마력을 흡수합니다.”
나르본느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매우 밝게 웃었고, 흑기사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흡수, 아니면… 포식의 권능이겠군.”
둘 다 땡이었지만, 나르본느도 자신의 권능을 숨겼고 흑기사도 무적이란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럼 네 능력의 한계를 알아보는 게 먼저겠어.”
흑기사는 가죽 주머니에서 최하급, 하급, 중급 마석을 차례로 꺼내더니 내게 흡수해 보라고 했다.
“거부반응이 일어나면 중단해야 한다.”
공허의 마력을 흩뿌리면 다시 회수할 수 없으나, 마력 발현 상태에서 닿은 물체의 마력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싸우곤 했다.
이윽고 마력이 모두 빨린 마석은 빛을 잃은 단순한 돌멩이가 됐다.
“어때? 더 흡수할 수 있겠나?”
“네.”
분명 전신에 마력이 가득한 상태임에도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력의 총량이 늘었다거나 더 강해졌다는 느낌은 없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전투 시에는 다른 마력을 흡수해서 싸웠는데, 마력보다는 체력의 한계로 인해 온종일 싸우는 건 힘들었다.
풀파워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건 최대 한 시간.
전투 지속력 자체는 개미족 사이에서도 탑급이라 할 수 있으나, 공허의 마력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다른 3.5차 개미들의 마력에 비해 물리력이 형편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나는 상대가 마법사나 사제가 아닌 이상, 마력을 충분히 깎아 내야 승부를 낼 수 있다.
장기전으로만 가면 나의 승리나 다름없지만, 신체 능력만으로 나를 넘어선 자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흑기사는 마석을 계속 줬다.
그리고 나는 그 마석을 주는 족족 흡수하여 빛 잃은 돌멩이로 만들어 버렸다.
“얼마나 더 흡수할 수 있지?”
“계속 흡수할 수 있어요.”
나르본느의 눈에 이채가 스쳤고, 흑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마석의 한계점을 찾는 건 힘들겠군.”
흑기사의 말에 반박하듯 나르본느가 말했다.
“잠깐! 잠시만 기다려 봐!”
훈련장에서 급히 뛰쳐나간 나르본느.
가벼운 분위기의 그녀가 떠나자 장내는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고요하네.’
이런 분위기 싫지는 않았던 터라 편한 마음으로 기다렸고, 흑기사도 침묵에서 벗어나려 애쓰진 않았다.
“너희 종족에서 네 위치는 어떻지?”
흑기사가 침묵을 깼다.
“아홉 명의 장로 중 하나에요.”
“여왕 바로 밑인가?”
둥지의 경영 정책은 장로들의 머리에서 나왔고, 결정권도 가지고 있다 보니, 여왕들의 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여왕들과 동등한 위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군.”
흑기사는 뭔가 안심한 듯한 분위기였고, 분위기에 편승한 나는 그동안 흑기사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다.
“몬스터인 저희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하지 않나요?”
“신마력은 그런 감각을 무디게 한다. 그래서 보통은 소속 집단에서 소외되곤 하지.”
즉, 흑기사의 말에 따르면 사도들은 왕따 체질이었고, 나 같은 인싸는 없는 듯했다.
“그 주머니는 뭔가요? 마석이 꽤 나오던데.”
“공간 확장 주머니다. 마차 두 대분의 물건이 들어가지.”
저런 물건이 있으면 물류와 상업도 발전했을 텐데…….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제국에서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자리 수를 넘지 않아.”
흔한 물건은 아니었고, 일상에서도 보기 힘든 듯했다.
돌아온 나르본느가 어깨에 들쳐 멘 자루에서 마석을 쏟아냈다.
“부족하면 더 가져올 테니까 흡수해 봐.”
아무리 생각해도 마석 낭비지만, 내 마석도 아니니…….
파삭. 파삭.
그녀가 두 번 더 왕복하여 마석을 챙겨왔지만, 나의 한계를 알 순 없었다.
“이쯤이면 몸이 터져도 벌써 터졌을 텐데…….”
“이상하군. 반쪽짜리 권능으로 이게 가능한 건가?”
나르본느에게선 흥미 가득한 놀람이 느껴졌고, 흑기사에게선 우려 가득한 놀람이 느껴졌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
다음으로 이어진 실험은 상급 마석을 흡수할 수 있는가였는데.
“마력의 농도가 다르다. 짙은 농도는 독이 되곤 하지.”
“준왕급의 마석인가요?”
3차 진화종의 마석이 중급이니, 상급 마석은 준왕급 존재의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네가 말한 준왕급의 마석은 이거다.”
흑기사의 주머니에서 최상급 마석이 나왔다.
“인간들은 최상급 몬스터라 칭하지.”
내가 상급 마석과 최상급 마석을 번갈아 보며 의문을 표하자, 나르본느가 말해 줬다.
“상급 마석은 지금 네가 품고 있는 마석과 동급인 마석이야.”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개미족의 3.5차 단계처럼 3차 진화종에서 오랜 시간을 머문 개체들이 상급 마석을 품고 있고, 준왕급은 최상급 마석, 그리고 왕급은 그 윗단계의 마석이 나온다고 했다.
“아까운데… 굳이 제가 흡수해야 하나요?”
“흡수해 봐라. 네 권능의 한계를 알아야 하니.”
상급 마석의 흡수는 다른 마석에 비해 시간이 걸렸다.
‘마력 밀도가 높으니 저항이 강해.’
십여 분 정도 흘러 상급 마석을 흡수할 수 있었다.
‘마력 총량이 늘었어.’
그동안 늘지 않던 마력 총량이 증가했지만, 내 마력의 특성상 총량이 늘어도 강해졌다고 할 순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살짝 놀란 흑기사가 최상급 마석을 내밀었다.
최상급 마력은 흡수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고, 마력의 총량도 급증했다.
이제 끝인가 싶을 때, 흑기사가 주머니에서 머리통만 한 녹색 마석을 꺼냈다.
“특급 마석, 트롤 킹의 심장이다.”
장내의 마력이 거세게 요동치며 나를 압박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내가 흑기사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흡수해 봐라.”
마치 지금의 너로는 절대 흡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듯한 말투.
왠지 모를 호승심이 일어 흑마력을 피어 올렸다.
* * *
다크가 없는 둥지.
고블린 소탕을 끝낸 사냥 개미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모두 복귀하여 둥지 확장 공사에 투입됐다.
포스라는 선례로 인해 무투파 개미들은 확장 공사 와중에도 마력 수련을 병행했고, 그건 다른 3차 진화종 개미들도 마찬가지였다.
둥지는 더욱 넓고 깊어졌고, 외곽의 하위 군체와도 연결됐다.
통로를 따라 오크나무 숲에는 많은 보급기지가 생겼고, 기지를 관리할 경비, 의료, 지원 개미들이 투입됐다.
언더리페는 지하 10층 공사 도중 마력이 응축된 샘물을 발견했고, 그로 인해 둥지의 마력 농도가 높아졌다.
“마력수로군. 마셨다간 큰일 나겠어.”
개미족들은 마력 샘의 물에서 최상급 마석 이상의 기운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섭취해선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포스는 마력수를 조금씩 섭취하기 시작하더니, 시녀들이 주는 영양을 거부하게 됐다.
포스의 몸에 문제라도 생길까 싶어 의료 개미들이 수시로 그를 진찰했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한 정황을 알게 된 메디는 마력수에 흥미를 느꼈다.
“마석도 가공해서 섭취했으니, 이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메디는 마력수의 등급이 너무 높은 게 문제라고 생각하여 물, 약초, 영양 등과 섞어 등급을 낮춰 봤다.
“마력 등급을 최상급까지 낮추니, 3.5차 개미들이 섭취할 수 있게 됐어.”
실마리를 찾은 메디는 연구에 매진했고, 얼마 후 즉효성을 가진 각종 약품을 개발했다.
주로 마력과 체력을 회복하거나 강화하는 약이었는데, 효과가 기존의 마력 보충액보다 월등히 좋았고, 주재료인 마력수도 매우 소량만 필요했기에 가성비가 뛰어났다.
“요즘 마석이 부족해졌는데…….”
이러한 이유로 마력 회복약이 마력 보충액을 대체하게 됐다.
메디의 연구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렁이, 누에, 굼벵이의 성장 촉진제를 개발한건 물론이고, 개미족과 꿀벌족 유충의 성장 촉진제도 만들어냈다.
“의료 개미만으론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없어.”
메디는 엔지와 디그파의 도움을 받아 촉진제의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됐고, 그로 인해 유충과 하위종 개미의 성장이 가속됐을 뿐 아니라 양식장의 생산량도 급증했다.
“식물에게도 적용되지 않을까?”
메디가 마력수를 활용해 식물의 성장을 촉진할 비료까지 만들자, 둥지에서 식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력 샘의 발견으로 개미족이 또 한 번 도약할 때, 사제로 뽑힌 여섯 여인은 인간들에게 한글, 수학, 개미족에 대한 걸 가르쳤고, 그중 학습력이 좋은 사람들을 뽑아 수사와 수녀로 삼았다.
“개미교의 하급 관리인들이야.”
일단 직책을 받게 되면 식량이 좀 더 배급된다는 것과 개미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큰 메리트였다.
그래서 자격이 되는 인간들은 사제의 눈에 들기 위해 경쟁했고, 직책을 받은 뒤에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경쟁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