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교역을 위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그동안 나는 많은 걸 배웠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맞서는 방법, 개미족의 특성을 강화하는 방법, 개미족의 기문 호흡을 통해 회복 속도를 높이고, 기척을 지우는 방법, 그 외에도 전투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들…….
나르본느는 내가 준왕급에 근접했다고 말하며 수련을 마쳤다.
“진화의 조건은 모두 갖췄어, 그러니 느긋이 기다리면 돼.”
흑기사는 신마력에 대한 이해를 더욱 높여 보라고 했다.
“슬슬 봄이니, 돌아가야겠어.”
나르본느는 일이 있다며 거미족 영역인 버드나무 호수로 돌아갔고, 나는 흑기사와 세크리를 데리고 둥지로 돌아갔다.
흑기사에겐 반년 동안 우호 페로몬을 발라 뒀기에 개미족의 동료나 마찬가지로 인식됐다.
반년 만에 돌아온 둥지는 많은 게 변해 있어 흑기사와 세크리를 데리고 둥지를 둘러봤다.
제일 큰 변화는 지하 2층이었는데.
개미교 신전을 중심으로 인간들의 마을이 생겼고, 길을 따라 이동하니 농가들이 보였다.
마을에선 수녀로 보이는 여성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거나 필요한 도움을 줬고, 워커맨이 점주로 관리하는 잡화점에선 마석을 통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개미족이 인간들 틈을 자연스럽게 오갔고, 인간들은 갓길로 다니며 개미족에게 예를 표했다.
인간끼리는 그냥 말로 인사했지만, 개미족에겐 양 손바닥을 보이며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게 ‘전 당신을 경계하지 않아요’라고 표현한 인사법인 것 같았다.
신전에 찾아가 보니 날 알아본 수사와 수녀들이 급히 엎드렸다.
“개미 신을 받드는 미천한 종이 아홉 번째 기둥이신 다크 님을 뵙습니다.”
긴장한 듯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공포에 질린 느낌은 아니었다.
몇몇은 조심스럽게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사제님들이 오고 있사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처음 들어보는 극존칭들이 너무 많아 알아듣기가 힘들었고, 어떻게든 날 찬양하려는 이들의 모습을 보니 살짝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나와는 달리 세크리는 매우 만족한 모습이었고, 흑기사는 흥미로워했다.
“개미 신이라… 악신 키틀레야를 믿는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그런 신이 있었다니…….
교전에 키틀레야를 한껏 미화하여 추가하면 좋을 듯했다.
“죄송해요. 오신 줄도 모르고.”
사제의 맴버들이 날 신전 중심부로 안내했고, 상석을 내준 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게는 조금 어색한 자리였지만, 세크리는 매우 만족했는데.
“다크 님, 인간들의 자세를 보니 배울 점이 많네요. 혹시 괜찮다면 그들에게 상을 내려도 될까요?”
웬일로 상을 내린다 해서 고개를 끄덕여 줬다.
“페어리 워커들의 지원을 절반으로 줄여 주겠다!”
그동안 너희들 일감 뺏어서 미안, 앞으로는 조금만 뺏을게… 라는 의미의 말이었지만, 수사와 수녀들의 혈색이 핼쑥해졌다.
데이지가 손을 번쩍 들어 급발진하려던 수사와 수녀들을 막은 후, 세크리에게 말했다.
“세크리 님, 마음은 감사해요. 하지만 지금의 저희에겐 개미 님들의 도움 없이 농지를 운영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지원을 조금 더 해 주신다면 좀 더 농지를 넓힐 수 있을 듯한데… 여유가 있다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데이지의 말에 감동한 세크리는 벌을 줄 수 없다며 다방면의 지원을 끊으려 했고, 사제들은 어떻게든 지원을 받아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부족함을 어필했다.
그러자 세크리는 더욱 기뻐하며 인간들을 압박하니…….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사제들이 쩔쩔맸다.
사제들과 세크리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흑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으로 일을 주려 하다니, 다른 개미들도 세크리 같은가?”
“뭐… 저를 제외한 워커들은 대체로 저래요.”
사도인 흑기사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됐고, 땅을 모두 활용하려면 어느 정도 지원이 필요한지 정리해서 알려 줘.”
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고, 루리아에게 이곳 현황을 물어봤다.
“이곳의 관리는 저희 여섯 사제가 맡고 있어요.”
아직 서면 보고 체계가 잡히지 않아 사제들을 각자 맡은 일에 대해 구두로 보고했다.
지하 2층은 사제를 중심으로 운영됐는데, 직책을 받은 이들이 난방과 온천을 관리하며 이곳 사람들에게 일을 배정해 줬다.
인간들은 주로 밀 농사와 채소밭에 투입됐고, 마구간, 목공소, 가죽 공방, 대장간 등의 시설도 운영했지만, 기술과 자재가 부족하여 개미족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내가 책정한 기준대로 개미족은 각종 자재와 물품을 팔았고, 농사를 지원할 때도 적절한 대가를 받았다.
화폐인 마석은 생산품이나 가공품을 잡화점에 팔아서 얻거나, 개미족에게 역할을 부여받으면 그에 따른 임금으로 받았다.
개개인이 벌어들일 수 있는 마석이 적다 보니 인간들의 마석은 사제들이 관리했고, 이걸로 생산 활동에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거나 소금과 같은 필수품을 구매하여 분배했다.
그러한 체계 때문인지 신전에서 일하는 이들은 깨끗한 옷을 입어 깔끔한 반면, 거리의 사람들은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마석 유통량이 너무 적으니 충분한 물자가 인간들에게 오지 않아.’
지금의 인간들은 소금 한 줌을 분배받기 위해 개미교에 헌신해야 했으니.
이곳에서는 개미교가 법이 됐고, 사제에게 찍히면 그대로 나락 행이다.
뭐, 그런 사제도 개미족에게 찍히면 페르의 식탁에 올려지겠지만…….
나는 인간들에게 공급되는 생필품의 가격을 살짝 낮췄고, 사제들과 함께 좀 더 둘러보던 중 가죽 갑옷과 세검으로 무장한 인간들을 보게 됐다.
‘무력 조직이네.’
내가 관심을 보이자 당황한 사제들이 내 눈치를 보며 치안 조직이라 설명해줬다.
치안 조직의 필요성은 알겠는데, 빈약한 무장과 체격으로 보아 도저히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 몸으론 빅 워커도 잡기 힘들겠어.’
문제가 터지면 제일 먼저 무너질 조직으로 보였기에, 나는 치안 조직의 수장을 사냥에 능숙한 워커맨으로 교체했다.
‘이러면 좀 낫겠지.’
원칙상 워커맨을 지원했으니 마석을 뜯어가야 했고, 개미교의 재정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추후 워커맨을 시작으로 기본 무기술을 보급할 생각이었던 나는 흑기사에게 물어봤다.
“대검을 쓰시니, 검술은 잘 하시죠?”
“상급 검술까지 배웠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흑기사에게 검술 교관을 부탁하기로 한 나는 다른 층도 방문하여 상황을 살폈다.
지하 3층은 드넓은 사탕수수밭과 지렁이 양식장이 있다.
지하 4층은 방어시설과 더불어 훈련장, 그리고 학교가 있었다.
지하 5층 뽕나무 숲.
지하 6층 아카시아 숲.
지하 7층 대나무 숲.
지하 8층 오크나무 숲.
지하 9층 공터.
지하 10층 산란실과 유충방, 상위종의 휴식처.
지하 11층은 초대형 호수.
지하 12층은 저수지가 있었다.
아래는 지하수에 막혀 더는 확장이 불가했고, 횡으로는 하위 군체들과 연결된 상태였다.
내가 없는 동안 각층은 세 배가량 넓어졌고, 생산량 또한 폭증한 상황이며 확장 공사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게 급성장하니 전 부서가 인력난을 호소하며 삐걱거렸다.
고블린들의 거주지는 지하 8층인 오크나무 숲으로 옮겨졌고, 그곳에도 신전이 크게 지어졌다.
신전의 절반은 개미들의 석상으로 채워졌고, 나머지 절반은 고블린 신인 고카구카의 석상이 배치됐다.
과거 고블린 제사장이던 키카는 홉 고블린 제사장으로 진화했다.
신장은 1.5m정도로 나보다 살짝 작았고, 예전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고블린을 보호해 주시고, 신전을 세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비로우신 다크 님의 은혜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갚겠습니다.”
“엇… 그래.”
항복한 고블린들을 잡아들여 노예로 부렸지만, 그들은 지금 둥지에서 제2의 번성기를 맞이했다.
고블린의 성비는 20 : 1
암컷이 매우 적다 보니 함께 두면 수컷들에게 치여 금세 죽는다.
그래서 암수를 분리해 관리해야 했고, 암컷만 잘 관리하면 수컷의 통제도 어렵지 않았다.
노예로 부려지고 있는 고블린들에겐 임금으로 마석이 제공됐다.
마석으로 식량을 바꿔 먹을 수 있다지만, 그러기엔 마석이 너무 적게 제공되며 식량의 가치도 높게 측정해 둬서 잘 쓰이진 않았다.
애초에 이들은 주변에 널린 이끼만으로 생존할 수 있는 대단한 종족.
만약 마석이 식량 교환권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 가치가 폭락했겠지만, 수컷이 암컷 마을에 들어오려면 일일 숙박권을 구매해야 하는 규칙이 생기며 마석의 가치는 그들의 성욕만큼이나 치솟았다.
당연히 숙박권을 가져온다고 잠자리 기회를 얻는 건 아니었다.
워커맨들이 돌아다니며 암컷 고블린을 지킴으로 원치 않는 잠자리를 막았고, 수컷들은 암컷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뽐내야 했다.
숙박권을 소진한 고블린은 수컷들의 세계로 돌아가고, 다시금 마석을 모으기 위해 노예 생활을 자처했다.
암컷 고블린이 임신하면 따로 격리하여 안정을 취하게 했고, 산후조리 서비스를 제공했다.
태어난 새끼들은 개미족에게 길러져 훌륭한 노예가 된다.
데카이저의 존재로 고블린의 번식력과 성장 속도가 강화된 데다가 개미족의 철저한 관리가 뒤따르자 고블린이 폭증했고, 그에 비례하여 홉 고블린도 늘기 시작했다.
지휘 특화종인 홉 고블린은 지능도 인간 수준이었고, 성실한 편이기도 해서 관리하기가 좋았다.
문제라면 고블린이 불어나는 속도가 내 계산을 월등히 뛰어 넘은 상황이라 걱정됐다.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노예를 부리다 멸망한 국가나 성은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수히 많았다.
넘치는 고블린을 어디다 쓸지 잠시 고민한 나는 예전 유리의 부탁이 떠올랐다.
‘어디 보자.’
유리가 준 지도를 확인해 보니, 비에타 세력은 모두 북쪽에 있어 고블린을 데려다 두기엔 무리가 있었다.
‘숲을 우회해서 가야 하는데 거리가 상당히 멀어. 알아서 가라고 해 볼까?’
지도를 만들어 홉 고블린들에게 숙지시킨 후 500마리의 고블린을 인솔해 가 보라고 했다.
물자도 충분히 쥐어 주고 무장도 갖추게 했으니, 운이 좋다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부대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2,000마리 정도 내보내니 빡빡하던 지하 8층에 여유가 생겼다.
각층에 치료실이 있지만, 메디가 있는 본부는 지하 10층에 있었다.
메디에게서 마력수에 관한 걸 듣게 된 나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마나 포션도 만들고, 체력 포션도 만들었단 말이지?”
“네, 말하자면 그렇죠. 그리고 성장 촉진제도 만들었어요.”
공허의 심상으로 놀람을 가라앉힌 나는 마력수를 확인해 봤다.
‘확실히 특급 마석 수준의 마력이야.’
몇 방울 흡수하려면 수일은 걸릴 테지만, 특급 정도면 신체 능력을 높일 수 있으니…….
일단 여왕들에게 내가 복귀했음을 알렸고, 일리아나를 통해 둥지 상황을 확인했다.
“사냥감이 없어.”
사냥 개미들은 사냥감을 찾지 못해 하나둘 둥지로 돌아와 공사에 투입됐다고 한다.
그래도 문제없는 게 마력 샘의 발견으로 둥지 생산량이 폭증했고, 촉진제가 보급되며 생산량이 또 한 번 늘어나 식량이 썩어나고 있는 상황.
“그 정도예요?”
“그렇다니까…….”
인간들은 굶고 있는데, 개미족의 식량 창고가 넘치고 있다니.
어느 정도로 넘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가 봤다.
‘많네.’
일 년은 거뜬히 먹을 수 있는 양이 쌓여 있었다.
문제는 지금도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는 것이고, 미처 영양이 되지 못한 식량은 썩고 있었다.
‘영양화 속도를 좀 더 높여야겠어.’
스몰 워커와 빅 워커를 대거 투입하여 팩토리 워커를 육성하는 한편, 썩은 식량은 고블린을 투입해 처리했다.
영양을 인간들에게도 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마석 가치가 폭락할 수 있어, 적당히 세일해서 팔았다.
남아도는 영양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 흑기사에게 물어봤다.
“개미족의 영양액을 인간들에게 팔 수 있을까요?”
꿀만큼 달지는 않아도 꿀 느낌도 나니 수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개미족의 영양액은 귀족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식자재다.”
“그렇군요.”
영양도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되니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교역은 좀 더 힘을 쌓은 후에 하려 했는데.’
개미족의 생산력이 급증하고 있는 이상, 교역을 미룰 순 없었다.
‘슬슬 인간들의 물가부터 알아봐야겠어.’
인간 세상에 나가 보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정보 수집을 위해 가는 거라 소수 정예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흑기사는 따라갈 거고… 누굴 더 데려가면 좋을까?’
이곳 인간 문명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몹시 기대됐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