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문트리아를 데려오다
“제르바 폰 바쿠바입니다. 지금은 바르퀴르 자작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부인께선 성함이…….”
“다크, 성은 없다.”
제르바는 내가 성이 없다고 하자 태도를 금세 바꿔 버렸다.
“그럼 평민이겠군.”
제르바 녀석은 이곳의 영주, 즉 유리와 관계가 깊은 상인이라 일정 부분 나와 목적이 같다고 할 수 있었는데…….
나를 마주한 그는 거만한 자세로 하녀에게 말했다.
“개미 상단의 주인을 데려와라.”
“문트리아에게 못 들은 건가? 상단주는 루리아가 맡고 있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나다.”
나의 말에 제르바가 피식 웃었다.
“아녀자와 나눌 이야기가 아니다. 남편을 불러와라.”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찻잔 손잡이가 갈라졌다.
‘유리의 똘마니 새끼가…….’
이곳 세계는 남존여비가 심하다.
여자는 집 안에서 천이나 짜고 옷이나 만들며 남편을 하늘같이 떠받들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에 찌든 사회라 제르바 같은 놈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자기 전에 날 무시한 녀석들로 살생부를 채웠고, 추후 기반이 탄탄해지면 하나씩 처리할 생각이었다.
‘유리의 수하라지만, 너도 살생부에 추가다.’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그리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남편이 여기 올 일은 없으니, 용건부터 말해 줬으면 하는군.”
남편이 없다고 하면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생기는 사회.
어쩔 수 없이 가상의 남편을 만들어 공갈을 쳤다.
“흠…….”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제르바가 말했다.
“이런 고품질의 상품을 개미 상단이 독점하고 있다는 걸 영주님께서 우려하고 계신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모르겠나? 상품의 출처를 알려 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는 거다.”
자꾸 날 바보 취급하며 속을 긁는 제르바.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장사 밑천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가?”
“아직도 이해를 못 했나 보군, 바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말해 주지.”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그는 거만한 눈빛으로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남편에게 전해라. 살고 싶으면 내 발밑으로 기어들어 오라고.”
“…….”
“차도 떨어졌으니, 이만 가보지.”
떠나는 제르바에게 물어 봤다.
“그런데 문트리아는 왜 같이 오지 않은 거지?”
“문트리아? 꽤 친했나 보군. 하긴… 분수를 모르는 게 닮았어.”
“그래서?”
제르바는 비릿하기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수도 모르고 설치기에 본래 있어야 할 장소로 보내 줬다. 필요하면 찾아다 주지.”
“아니, 필요 없어.”
“다음에 볼 때는 그 건방진 말투… 고치는 게 좋을 거야.”
“너야말로 그 건방진 자세부터 고치는 게 좋을 것 같군.”
“뭘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군…….”
“조만간 알게 될 거다.”
제르바가 떠나고 잡친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집사를 불렀다.
“자금 현황표 좀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꽤 많은 돈이 모였고, 개미 상단의 매출도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다.
‘느긋이 움직일까 했는데…….’
내가 본격적으로 상업에 뛰어들면 그 파장은 매우 크다.
‘기존 상권들이 풍비박산 나겠지.’
적이 많아질 것을 고려해 충분한 병력을 갖춘 후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제르바 놈이 내 속을 너무 긁었다.
‘메디 일감도 늘려 줘야 했으니.’
여러 가지 연구 과제를 던져 주긴 했지만, 메디는 환자를 원했고 기왕이면 수술을 핑계로 뜯어보기 좋은 중상자를 좋아했다.
그리고 최근에 불러온 교육 개미들이 지하에서 대기 중이다.
‘인재들부터 채워야겠어.’
남존여비 사상에 찌든 사회에서 나름 잘 나갔던 문트리아.
엘리트임이 틀림없는 그녀부터 포섭할 생각이었다.
‘제르바 놈은 문트리아의 제물로 남겨 줘야지.’
제르바의 비참한 말로는 문트리아에게 맡길 예정이다.
* * *
용병으로 등록한 일행과 함께 암흑가인 비어베어의 거점 중 한 곳을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평범한 식당으로 위장돼 있으나, 이곳의 주인과 직원들은 모두 비어베어의 조직원들.
이들은 맥주, 윤활제, 정보 등을 팔며 납치와 살인 같은 불법적인 의뢰도 받았다.
나는 조직원에게 돈을 주고 문트리아와 관련된 정보를 샀다.
“제르바 상단의 부점장인 문트리아 말인가요? 그녀라면 몰매를 맞고 슬럼가에 버려졌죠.”
“이유는?”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제르바의 눈 밖에 났으니…….”
실버를 좀 더 얹어 주자 제르바 상단의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고, 문트리아가 쫓겨난 내막도 알게 됐다.
제르바가 문트리아를 점장으로 승진시키려 하자, 그녀와 경쟁 관계에 있던 부점장이 제르바에게 그녀와 몸을 섞어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건의했다.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 생각한 제르바는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했으나, 예상치 못한 거절에 감정이 상했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거절?’
50대로 보이는 제르바와 아직 팔팔한 20대인 문트리아.
어느 부분에서 예상을 못한 건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그 후, 제르바의 원망을 산 문트리아는 출세를 원하는 동료와 부하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이리저리 뜯기다 재기 불능의 몸이 되어 슬럼에 버려졌다고 한다.
‘거절 좀 했다고 너무하네.’
슬럼가는 무법 지대.
일반인이 들어가면 표적이 될 게 뻔했다.
“그래도 문트리아가 평소에 베푼 게 많아 슬럼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버려진 순간 가죽만 남기고 발라졌을 겁니다.”
정리하자면 문트리아는 정치질로 상단에서 축출된 상황.
“개미 저택의 안주인이신 다크 님께서 원하신다면 저희 쪽에서 바로 잡아 오죠.”
여기선 저택이 개미 저택으로 불렸고, 내가 저택의 안주인으로 알려진 듯했다.
“아니, 내가 직접 갈 건데 안내인 좀 붙여 줘.”
“안내인은 50쿠퍼입니다.”
“비싸네.”
“다크 님이 만지는 돈에 비하면 푼돈이죠.”
“그렇긴 해.”
그렇게 안내인을 따라 슬럼가로 갔다.
‘우리끼리 왔으면 못 찾을 뻔했군.’
구석진 골목에 쓰러져 있는 문트리아를 발견했다.
다리는 퉁퉁 부어 있는 게 부러진 것 같았고, 며칠은 먹지 못했는지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있었다.
베르딘과 세바스가 그녀를 챙기려 하자, 골목에서 지저분한 꼬마 하나가 튀어나와 베르딘과 세바스를 막아섰다.
“건들지 마!”
꼬마의 외침에 반응하듯 숨어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나왔다.
그러자 베르딘이 건들거리며 꼬마들을 쫓으려 했다.
험상궂은 베르딘의 인상이라면 단번에 아이들을 쫓아낼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상황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이제 갓 10대가 됐을 법한 꼬마들이 뾰족한 걸 하나씩 들고서 독기 가득한 눈을 빛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아이들의 기세에 밀린 둘은 헛바람을 들이키곤 뒷걸음쳤다.
페스트가 내게 물었다.
“제가 처리할까요?”
페스트의 숙련된 공기 조작 능력은 매우 강력하다.
일대의 아이들을 처리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무력을 동원하는 건 에너지 낭비다.
손자병법에도 나오지 않는가?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라고…….
“얘들아, 우린 그 언니를 도우러 온 사람이야. 그러니 언니를 돕고 싶은 거라면 길을 비켜 주지 않겠니?”
이 정도 친절과 외모면 순수한 아이들에게 충분히 통할 거라 생각했는데, 슬럼가의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누나를 노예 상인에게 팔려는 거잖아! 우리가 모를 줄 알아!”
나의 측면 담장 위에 있던 꼬마가 흥분하며 내게 뭔가를 던졌다.
위협을 감지한 더듬이로 인해 신경이 가속됐고, 내게 던져진 것이 단검류로 여겨지는 날붙이임을 직감했다.
‘느려.’
우릴 여기까지 안내해 준 조직원의 표정이 굳어 갔고, 일행의 표정 변화 또한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군. 던진 아이도 놀란 걸 보니… 의도적인 건 아닌가? 그러게 투척술도 배우지 않고 아무거나 던지니 이런 불상사가 터지지.’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아 외골격 덮인 손등으로 날아온 날붙이를 쳐냈다.
여기까진 계산된 움직임으로 완벽했으나,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다.
슬럼가의 빈약한 담벼락이 내 힘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쾅!
이윽고 담벼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걸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도미노 같은 연쇄 작용으로 인해 불안정하던 슬럼가의 집들이 주저앉는 사태가 벌어졌다.
무너진 집에는 사람이 없었으나, 담벼락 위에 있던 아이들이 추락하며 비명을 질렀다.
의도치 않게 벌어진 아비규환의 상황.
구겨진 페스트의 얼굴이 활짝 펴졌고, 조직원과 일행들은 일대를 초토화한 나를 바라보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그들 앞에서 힘자랑할 일이 없었으니…….
울트라에 버금가는 나의 괴력에 놀란 아이들이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주저앉았고, 허리에 힘이 풀렸는지 제대로 일어서질 못했다.
몇몇은 소변까지 지려 지린내를 풍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들의 건강도 확인할 겸 모두 데려가기로 했다.
“메틴, 그냥 다 잡아가자.”
나와 디아는 잔해에 깔린 아이들을 구했고, 메틴을 비롯한 사내 다섯이 겁먹은 아이들을 제압했다.
그렇게 제압되거나 순순히 항복한 아이가 아홉 명.
나는 문트리아를 비롯해 다친 아이들의 상처가 악화하지 않도록 적당한 나무토막을 감아 고정해줬다.
“그러게, 왜 말도 안 듣고 말이야.”
날 괴물 보듯 하는 아이들을 챙겨 저택으로 급히 돌아갔다.
안내인과는 슬럼가에서 헤어졌다.
“디아 님, 잠시만 일행을 부탁할게요.”
내가 안내인의 뒤를 밟으려 하자, 잠시 생각하던 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아이들은 모두 메디에게 인도하지.”
“그렇게 해 줘요.”
안내인을 미행하여 도착한 곳은 동문 인근의 창고 지대였고, 그곳에 비어베어 놈들의 본거지가 있음을 직감했다.
‘실력 있는 녀석들이 몇 보이는군.’
놈들을 차근차근 요리할 생각이었던 나는 몸을 돌렸고, 돌아가는 길에 기사급이라 여겨지는 사내와 마주치게 됐다.
일반인들이 날 경계하는 이유는 신분이 높아 보였기 때문인데, 길에서 마주한 놈은 다른 이유에서 날 경계했다.
‘이상하군. 위장이 풀린 것도 아닌데, 뭘 느낀 거지?’
그가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서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 또한 그의 공격을 경계하며 차분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옆을 지나쳐 멀어지니,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게 들렸다.
“괴물 년…….”
그의 말에 살짝 뜨끔한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아본 건가? 어떻게?’
저놈이 동네방네 소문을 낼까 걱정됐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지금 벌어들이는 돈이라면 충분히 무마할 수 있다.
저택에 돌아온 나는 치료실을 방문하여 문트리아와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깨어 있는 아이들은 개미족을 보곤 공포에 질려 했으나, 허브 워커의 치료를 거쳐 영양액으로 배를 채우자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졌다.
‘개미족과 교감하려는 아이들도 보이네.’
나는 적응이 빠른 아이 몇을 통해 그들과 문트리아의 관계를 들을 수 있었다.
“언니가 가끔 우리에게 먹을 걸 가져다줬어요.”
“일자리를 소개해 주곤 했죠.”
“노예 상인들에게 잡혀가지 않게 도와줬어요.”
“우리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줬어요.”
슬럼가의 아이들에게 있어 문트리아는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나 마찬가지인 셈.
“이젠 너희들이 문트리아를 도와주렴.”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나의 말에 아이들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들 쓸 만하겠는걸…….’
지금이야 밥이나 축내는 식충이지만, 뭐든 육성하기 나름이다.
나는 교육 개미들에게 한글, 수학, 복식부기, 무기술 등을 가르치게 했고, 둥지에서 수녀들을 불러와 이들을 돌보게 했다.
며칠 후, 사경을 헤매던 문트리아가 깨어났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