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제르바 상단의 몰락 (1)
글 선생으로 찾아온 건 1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개미 저택의 안주인 다크 님을 뵙습니다. 전 메르디아 폰 엔마라고 합니다. 글 선생을 구한다고 벨레삭 백작령에서 왔어요.”
“그렇긴 한데…….”
나이가 어린 감이 있지만, 글자만 배울 수 있으면 되니 상관없었다.
“글자는 어떻게 배운 거야?”
“어릴 때 집에 책이 있었어요. 지금은 전부 팔아서 없지만…….”
이곳에서 책은 흔치 않다.
부유층들도 집에 장식으로 몇 권 가지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어떻게 글을 가르치는 지 궁금했던 나는 이것저것 메르디아에게 물어봤다.
“교재는 없어?”
“일단 교재는 없고… 양피지를 구해 주신다면 제가 기억하고 있는 책을 필사해 드릴 수 있어요. 단지, 필사라는 게 매우 힘든 일이라…….”
“필사비는 따로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양피지 대신 종이를 주니, 꽤나 놀란 눈치.
“이게 개미 상단에서 판다는 종이군요. 질이 좋네요.”
“그렇지.”
“그럼 제가 가르쳐야 할 사람은…….”
“여기 저택에 있는 사람 모두와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 전부야.”
살짝 놀란 눈치의 메르디아였지만, 계산기를 두드려 보더니 횡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나부터 가르쳐 줘.”
“지금요?”
자세히 보니 메르디아의 몸에서 냄새도 나고, 한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았다.
“음, 먼 길 오느라 지친 것 같은데,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알려 줘.”
다음날, 저택에서 깨끗이 씻고 배불리 먹은 메르디아를 불렀다.
그녀는 저택에 쓰인 마법들을 궁금해 했지만, 애초에 마법이 아니라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없었다.
표정이 다채로운 메르디아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수업을 시작했다.
‘어려워.’
이곳의 문자는 표음 문자와 표의 문자를 섞어 쓰는 형태였고, 그조차 아귀가 맞지 않은 느낌이었다.
다시 말해 엄청 복잡하고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이걸 어떻게 읽으라는 거야?’
표의 문자의 발음은 한 가지가 아니었고, 표음 문자를 썼을 때 대칭 되는 의미도 다양해서 한자보다 훨씬 어려운 감이 있었다.
‘이건 분명 일부러 암호처럼 만든 게 분명해.’
문장마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무슨 의미일지 주석이 필요한 문자라니.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읽을 수 있게 됐다.
“어떻게 속으로 읽을 수 있는 거죠?”
“그냥.”
“해석되나요?”
“왜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야…….”
웃기게도 이곳 사람들은 책을 소리 내서 읽으며 해석한다고 했고, 속으로 읽는 건 해석 능력이 뛰어난 천재들의 영역으로 여겼다.
‘하긴, 읽어 보고 맞는 발음을 찾는 식인가? 정말 웃긴 글자네.’
며칠 사이에 이곳 문자를 마스터하긴 했지만,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메르디아가 필사해 준 신화는 너무 구닥다리라 재미가 없어.’
그녀에게 좀 더 재밌는 책을 필사해 달라고 하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제가 기억하는 거라곤 ‘마법의 기원’정도인데 괜찮을까요?”
“마법? 너 혹시 마법사야?”
메르디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마력 적성이 없어서 마법사가 되지 못했어요.”
“마법의 기원은 어떤 책인데?”
“그냥, 마법이 어떻게 생겨났는지가 쓰인 책이에요.”
“재밌겠네. 가격은 괜찮게 쳐줄 테니 그거 좀 필사해 줘.”
“네, 필사해 드릴게요.”
최근 나의 소비 활동으로 인해 이곳의 식품, 술, 노예 값이 폭등했고, 교역 상인, 노예 상인, 암흑가의 비어베어도 급성장을 이루었다.
그 반대급부로 아이들을 이용한 노동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아 생산업 전반이 흔들렸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상업은 치열한 전쟁이야. 변화에 따라오지 못하면 죽는 거라고.’
개미 상단의 존재가 각지에 알려지며 수많은 교역 상인이 몰려와 영양액, 꿀, 비단, 종이, 잉크, 만년필, 가죽 등을 사 가니, 아무리 돈지랄을 해도 금화가 줄기는커녕 늘기만 했다.
제르바 상단에서 수차례 찾아와 내게 경고하며 나의 속을 긁었지만, 공허의 마력과 개미족의 이성은 나의 인내심을 극상으로 끌어올려 줬다.
‘조금만 참자.’
메틴, 베르딘, 세바스, 월리엄, 존.
다섯에게 각각 50명의 건장한 노예를 맡겼고, 노예를 무장시켜 사병으로 육성했다.
문트리아가 기초 과정을 수료했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그녀를 지상에 불렀다.
“다리는 어때?”
“멀쩡해요.”
“그럼 준비됐어?”
“무슨 준비 말씀이신지…….”
“복수 말이야.”
“네?”
문트리아는 뒤끝이 없는 편.
그녀는 자신이 버려진 것이 제르바의 변덕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전략적 선택의 실패로 인한 결말이라 여겼다.
‘착해 빠졌어.’
문트리아를 생각해서 놈의 괄시를 참아가며 선전포고를 미루었던 것인데.
정작 당사자가 의욕이 없으니 나의 어깨가 처졌다.
‘안 되겠다. 장수가 아직 준비가 덜 됐어…….’
나는 제르바 상단과 제르바와 관련된 정보를 사들였고, 그 중 문트리아가 격분할 만한 내용만 추려서 공유해 줬다.
“나쁜 자식! 미친놈!”
제르바에 대한 악감정을 듬뿍 심은 나는 그녀가 착취당해 온 정황과 동료들의 배신 행위까지 알려 줌으로 제르바 상단에 대한 원한을 극대화시켰다.
며칠 후, 문트리아는 제르바 상단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졌다.
‘좋아, 이제야 준비된 것 같군.’
마지막 퍼즐을 맞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리아, 너는 사람을 뽑아 복식부기까지 가능하도록 가르쳐주고,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여성이 실버급 용병 수준의 무력을 갖추게끔 훈련시켜.”
“네, 그럴게요.”
루리아가 관리하던 개미 상단을 문트리아에게 인수인계했고, 개미 상단의 상단주가 된 문트리아는 제르바 상단과의 거래 관계를 끊었다.
영지 최고 부호에게 선전포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로 하여금 성내의 세력들이 우릴 주목하게 됐다.
“개미 상단 녀석, 간덩이가 부었군.”
“제르바 상단을 건들다니. 무모해.”
“그런데 할 만하지 않을까? 상품 자체는 왕국 수준의 품질이 아니잖아.”
양질의 물품을 들일 수 없게 된 제르바 상단은 여타 상단들과의 경쟁에서 차츰 밀리기 시작했고, 우리가 제르바 상단의 상품을 사 주지 않으니 헐값에 물건을 팔아 치워야 했다.
그러나 제르바 상단이 영지 제일이라는 평가는 도박으로 따낸 게 아니었다.
“제르바 상단은 가죽 공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공방에서 벌어들이는 돈을 생각하면 이 정도론 끄떡없죠.”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제르바는 우릴 모르고, 우린 그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 상황.
문트리아는 거금을 들여 가죽 장인들을 포섭했고, 용병 길드와 접촉했다.
용병 길드도 가죽 공방을 크게 운영하여 상당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알겠다. 우린 가죽 공방에서 손을 떼지.”
협상이 잘 되어 그들이 운영하던 가죽 공방을 통째로 인수하게 됐다.
“용병 길드가 자금난도 아닐 텐데 그걸 파네.”
“용병 길드는 정보력이 좋아요. 다크 님과 충돌하면 손해가 크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 말인즉슨, 용병 길드는 나와 제르바의 전쟁에 끼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문트리아는 고품질의 가죽 제품을 헐값에 풀며 제르바 상단을 압박했다.
‘제품을 만들어 파니 쏠쏠하긴 한데… 그럼 가죽이 남는단 말이지.’
나는 충성심 높은 장인 일부를 둥지로 빼돌렸고, 세크리에게 가죽 제품의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이쪽에서 넘쳐 나는 가죽으로 물량을 쏟아 내니, 얼마 버티지 못한 제르바가 가죽 공방을 접게 됐다.
나는 갈 곳 잃은 장인들을 싸게 부릴 수 있게 됐고, 그중 뛰어난 장인을 따로 추려 충성 서약을 받아 냈다.
“너희가 내게 충성을 바쳤으니, 난 그대들의 삶을 책임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곳 세계에선 장인들이 받는 대우는 땅을 대여한 농민보다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높은 식품값과 낮은 인건비와 관련이 있었다.
내가 그들의 가족을 데려와 나이와 상황에 맞게 필요한 지원을 쏟아붓자, 장인들은 내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
“고작 가죽 장인인 제게… 이런 과분한 대접을…….”
“제 딸을 찾아 주신 은혜 죽어서도 갚겠습니다!”
호감도 100을 찍은 장인들에겐 진실의 일부를 밝혔다.
“난 개미족의 도움을 받고 있다.”
“다크 님이 마녀라 할지라도 제 충심엔 변함이 없습니다.”
“설령 절 버리시더라도… 제 충심엔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겁니다.”
불쾌할 정도로 올곧은 믿음.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내 부하가 된 그들을 더욱 챙겼고, 그들을 둥지로 보내 기초 교육과정을 밟게 했다.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대로 제자들을 붙여 품질을 끌어올리는 한편, 엔지와 협력하여 제품의 대량 생산 공정을 개선하게끔 했다.
가죽 공방을 접게 된 제르바가 몇 차례 찾아와 나와 문트리아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갖은 모욕을 줬지만, 패배자의 말에 귀 기울일 정도로 우린 한가하지 않았다.
“다크 님, 제르바가 성내 제일 부자라고 불리는 건 영주님에게 받은 채광권을 통해 철광석과 소금을 유통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철광석 쪽은 방법이 없지만, 소금은 교역을 통해 사들일 수 있어요.”
문트리아는 교역을 통해 소금을 대량으로 사와 제르바와 피 말리는 전쟁을 치를 생각이었지만, 둥지에 철괴와 소금이 남아돌기에 굳이 타인의 손을 빌릴 것도 없었다.
“거대 공방을 만들 거니까 대장장이들을 모아.”
“네!”
소금은 물량이 부족해서 제르바를 괴롭히는 수준으로 팔았고, 대장장이를 모아 거대 공방을 만든 나는 둥지에서 생산한 강철제 무기를 풀어 무기 시장을 장악해 갔다.
주 수입원에 큰 타격을 받은 제르바였지만, 부쉬트니 자작령을 오가며 벌어들이는 돈으로 어떻게든 연명하고 있었다.
그가 취급하는 식량을 둥지에서 생산하게 만들어 싸게 풀어버렸더니 결국 제르바 상단이 주저앉았다.
궁지에 몰린 그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그건 영주의 힘을 빌려 날 제거하는 것이었다.
제르바가 영주성을 찾았다는 소식은 상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 소식을 접한 문트리아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어쩌죠? 제르바가 영주성에 갔어요!”
그동안 우리를 통해 득을 보고 있던 교역 상인들도 영주의 눈치를 보듯 우리와의 거래를 끊었다.
그들은 마치 삼일천하의 막을 보듯 개미 상단의 패망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다크 님, 영주가 병력을 끌고 올지도 몰라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 재산을 정리해서 철수해야 해요.”
이곳 세계에선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상인은 상인.
평민에게 언제든 무력을 투사할 수 있는 귀족이 나서면 무조건 엎드려야 한다.
강력한 사병이 있다고 해도 반항하면 반란이 되니 말이다.
“맞서서는 안 돼요.”
문트리아는 제르바의 입김이 닿지 않는 북쪽 영지를 추천하며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라고 했다.
“다크 님은 돈을 챙겨 지하로 빠져나가세요. 전… 상단에 남아 시간을 끌어 볼게요.”
마치 뒤는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한 문트리아.
장렬히 전사할 생각인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유리 녀석 잘 지내고 있었으려나…….’
영주가 된 유리에게 뭘 뜯어낼지 고심하며 그의 방문을 기다렸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