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제르바 상단의 몰락 (2)
돈도 잘 벌리고 복식부기를 숙지한 인재도 충분히 확보했으니, 점포를 하나둘 늘려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이었다.
‘상점을 늘리려면 건물 사용권을 인계받아야 해.’
이곳의 건물 거래는 행정관들이 주관하고 있어 그들이 허가해 주지 않으면 건물을 사고팔 수 없고, 점포를 늘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를 영주인 유리가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설마… 바르퀴르 자작과 싸우시려는 건… 영주가 된 지 얼마 안 됐다지만, 다크 님이 마도사라 할지라도 그는 귀족이에요.”
걱정하는 문트리아에게 나와 유리의 관계 일부를 말해 줬다.
“아는 사이라고요?”
“그래, 유리와는 조금 알고 지냈지.”
나의 말에 문트리아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지금 상황을 모두 의도하신 게…….”
의도했다기 보단 그냥 열심히 물건을 팔고, 인재를 육성하며 방해되는 놈들을 제거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르바 놈은 개미굴에 들어온 격이지.”
“그렇군요.”
즉, 살아나가긴 힘들 것이란 개미족 풍의 속담이었다.
* * *
제르바는 유리에게 접견을 청했지만, 성채까지 보유한 귀족이 일개 상인을 만나 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제르바의 이야기를 들어준 건 작위도 받지 못한 말단 기사인 바리캉 폰 헤멜.
그도 최근 부인들이 비단옷을 즐겨 입게 되면서 개미 상단에 흥미를 느꼈다.
“헤멜 경, 놈들이 허가도 없이 철제 무기를 팔고 있습니다. 이것 좀 보시죠.”
“철검이라면 나도 몇 개 선물 받은 게 있다.”
헤멜은 상품마다 박혀 있는 개미 문양을 유심히 뜯어보곤 말했다.
“이 문양은 클라우드 왕국 것은 아닌가 보군.”
제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건 클라우드의 어느 가문에서도 쓰지 않는 문양이에요.”
“그래서?”
“분명, 산맥 너머의 왕궁에서 밀수해 온 물건일 겁니다!”
“밀수품이라… 그럼 저택에 있는 놈들은 모두 밀수꾼들이란 소리군.”
제르바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영주님도 최근 노예 값이 올라 난처해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참에 범죄자들을 잡아들여 바친다면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농사와 광산에 투입할 노예가 부족하긴 했어. 듣기론 저택엔 미녀들이 많다던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아마 산맥 너머에서 온 몰락 귀족의 영애들이 아닐까 싶은데…….”
“귀족 영애였다면 성노로 바쳐도 되겠군… 그런데 뭔가 찝찝하단 말이야.”
“그게 무슨…….”
헤멜은 개미 공방에서 판매하는 철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기사인 내가 검에 대해 모를 수 없단 말이지. 그런데 이 검은 강도도 그렇고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어.”
“그럴 겁니다. 영지의 대장장이들이 합심해서 만든…….”
“그런 말이 아니야. 아무리 똑같이 만들려고 해도 인간이 만든 물건이 이렇게 비슷할 순 없어. 그런데 이 문양이 찍힌 검들은 마치 마법으로 복제라도 한 것처럼 무게 중심이 일정하다는 이야기지.”
“…….”
“과연 이게 산맥 너머의 야만국에서 만든 게 맞을까?”
제르바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게… 사막 왕국 아슬란을 통해 수입된 제국품이란 말인가요?”
헤멜이 고개를 저었다.
“아슬란에서 여기까지 물건을 가져오려면 수도를 거쳐야 해. 아무리 밀수품이라 해도 이 가격에 판매될 순 없지.”
헤멜은 찝찝하다며 개미 상단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아 했다.
제르바는 어떻게든 헤멜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머리를 팽팽 굴렸고, 헤멜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일어났다.
기사 앞에서 그러한 행동은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는 무례였으나, 헤멜은 이어진 제르바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놈들이 감춰 온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제르바의 가설은 이러했다.
다크 일행은 제국 사람이며, 모종의 이유로 제국의 눈을 피해 이곳에 왔다.
“반역자로 몰린 귀족가의 영애들일 것 같군요. 그러니 출신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겠죠.”
그들이 제국 수준의 물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건 제국의 기술자를 데려왔기 때문일 거라고…….
“호…….”
제국에서 반역자로 몰린 가문이라면 건드려도 뒤탈이 없을 것이고, 잘하면 제국의 기술자를 확보할 수도 있을 터.
“상황에 따라선 제국의 환심을 살 수도 있겠지만, 역시 기술자를 확보해 두는 게 장기적으로 좋겠지.”
제르바와 개미 상단을 어떻게 처리할지 이야기를 마친 헤멜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기사 다섯을 모았다.
그들과 무엇을 어떻게 분배할지 협약을 마친 헤멜은 개미 저택을 치기 위해 영주의 오른팔이자 경비대장을 겸하고 있는 메르디크 준남작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메르디크 준남작은 병사 200명을 빌려주며 말했다.
“아직 영지가 안정되지 않았다. 대화를 통해 기술자를 인도받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라.”
“저쪽에서 기술자를 숨기려 하면 저희 식대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뭐… 무모함에는 대가가 따라야 하니, 알아서 하도록.”
메르디크 준남작은 영내의 치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 지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헤멜은 200명의 병사로 저택의 출입구를 봉쇄한 후, 기사 다섯과 제르바를 데리고 정문을 통과했다.
마중 나온 집사장이 그들을 본관으로 안내했고, 가는 길에 상당수의 경비병을 본 기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해보자는 건가?’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싶은 그들이었지만, 메르디크 준남작이 대화부터 하라고 했으니 이를 무시할 순 없었다.
‘대화가 끝나면 전부 죽인다.’
그런 마음도 잠시, 본관에 들어서 보니 청결한 공간과 함께 어우러진 하녀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하녀들이 왜 이리 예쁜 거야?’
단지 깨끗하고 단정할 뿐인 평범한 여인들.
그러나 최소한으로 씻으며 살아가는 여인들만 봐 온 기사들의 눈에는 이조차 아름답게 느껴졌다.
“여긴 항상 이렇습니다. 저택 안주인이 결벽증이라 어디서든 물이 나오도록 마법으로 도배할 정도지요.”
제르바의 말에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을 떠오는 것 정도야 하녀에게 시키면 될 일인데 마법으로 해결하려 하다니, 멍청하군.”
“그 돈이면 좋은 전마 한 필은 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접객실에 도착한 기사들은 인간으로 위장한 개미족의 미모에 깜짝 놀랐다.
‘은발 숙녀다.’
‘푸른 머리는 내가 찜했다!’
‘보기 드문 머리카락 색을 보니 귀족 영애들이 맞겠어.’
다크의 양옆엔 디아와 문트리아가 있었고, 장내에는 루리아, 나우피어, 베르딘, 페스트 등이 포진하여 다크를 지켰다.
자리에 안내된 기사들은 미모의 페스트와 나우피어가 상당한 실력자임을 직감했다.
‘내 아래가 아니야.’
‘어떻게 저 몸으로…….’
‘이해가 안 되는군.’
두 여인을 애써 무시해 가며 다크의 맞은편에 앉게 된 기사들.
제르바는 차마 기사들과 동석할 수 없어 뒤편에 섰다.
헤멜과 기사들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다크를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기척이 없다.’
오러와 마력에 민감한 기사가 상대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건 두 가지 경우로 나뉠 수 있었다.
하나는 상대가 오러를 완벽히 갈무리할 수 있는 마스터급의 실력자인 경우인데, 갓 성인이 됐을 법한 조그만 여자가 마스터급 강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기사들은 두 번째 가능성인 마법으로 기척을 숨겼다고 생각했다.
‘저 나이에 마법사는 아닐 테고, 마법 물품인가?’
‘돈이 썩어 난다더니 실력 있는 마법사를 고용했나 보군.’
주변을 떠도는 하이 페어리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낀 그들은 이 또한 마법의 일종으로 여겼다.
“마법사를 불러 줄 수 있겠나?”
클라우드 왕국의 기사들은 마법사, 궁수, 암살자 등을 비겁한 약골로 생각했으나, 마탑 소속의 마법사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마법사의 소속을 확인하려 한 헤멜.
그러나 유리가 직접 오지 않아 실망이 컸던 다크가 삐딱선을 탔다.
“지금 영주는 뭘 하고 있지?”
다크의 하대에 문트리아와 제르바가 화들짝 놀랐고, 기사들이 잠시 당황하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넌 지금 기사인 우리와 영주님을 모독했다.”
“내가 너희 부모님 안부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영주 안부 좀 물은 게 모독이냐?”
“멍청한 년, 귀족 모독죄는 즉결 처형이다.”
그 자리에서 테이블을 발로 차 버리며 칼을 뽑아버린 기사들.
문트리아와 제르바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고, 날아온 테이블을 가볍게 받아넘긴 디아는 몇 발짝 물러서더니 팔짱을 끼고서 사태를 관망했다.
기사들은 생각했다.
상대가 판을 깔아 줬으니, 실컷 썰고 난 후에 챙길 것을 챙기자고…….
실상 이곳의 기사라는 작자들은 대체로 살인 기계로 길러져 깽판과 강탈이 특기였다.
그러나 오늘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개미 또한 포식형 곤충으로 전쟁과 약탈이 특기인 건 마찬가지였다.
* * *
유리나 그의 대리인급이 올 줄 알았는데, 제르바의 연줄이 별로였는지 딱 봐도 말단으로 보이는 허접 기사 여섯을 데려왔다.
‘아니 영주도 아니고 그동안 이런 녀석들을 믿고 까불었던 거야? 아니면 허접들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건가?’
거기다 기사들에게서 느껴지는 친숙함을 보아 정의와 공정과는 거리가 먼 놈들이 분명했다.
‘암흑가 놈들보다 더한 살인마들이네.’
기사들의 오만한 태도와 더불어 제르바는 ‘넌 이제 끝났어. 그러게 왜 나한테 개긴 거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빌어 보던가?’ 같은 표정으로 나와 문트리아를 내려다봤으니.
화날수록 차갑게 가라앉는 내 이성이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계획을 짜냈다.
“지금 영주는 뭘 하고 있지?”
영주의 안부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부모의 안부를 들먹여 그들을 자극해 보려 했는데…….
기사들이 급발진하여 부모 안부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여기 기사들은 일단 칼부터 뽑나 보군.’
과연 저들은 자신이 칼 맞을 각오는 하고 무기를 뽑은 걸까?
풍기는 마력과 달리 놈들의 칼질은 정직하기 짝이 없어 맞아 주고 싶어도 맞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허접하군.’
나는 사방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검격을 피하고 그동안 꾸준히 수련해 온 보법을 밟아 놈들의 품에 파고들었다.
‘유리의 부하들이니까 죽이면 안 되겠지.’
가볍게 손봐 줄 생각으로 개미족의 괴력을 최대한 억제하여 짧게 끊어쳤다.
퍽! 퍽!
“크악!”
“컥!”
기사들은 맷집이 상당하여 한 방에 쓰러지지 않았고, 가죽 갑옷 위에 철제 갑옷을 덧대 입었는지 손맛이 남달랐다.
‘출력을 조금 올려볼까…….’
간만에 스파링으로 몸을 달구며 기사 여섯을 골고루 다져 줬다.
원투. 원투.
힘을 뺀 공격이었음에도 기사들은 신음을 토하며 눈물을 쏟았고, 기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검을 떨어트리기도 했다.
몇몇 기사들이 잠깐의 시간을 벌어 검에 오러를 씌웠지만, 명중률이 0인 상황에서 위력을 높여 봐야 의미는 없었다.
나의 현란한 움직임에 루리아와 베르딘은 살짝 놀란 눈치였고,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보는 문트리아와 제르바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몇 분 후.
깔끔한 접객실은 기사들이 싸지른 피똥과 제르바가 지린 오물로 더러워졌다.
“네년은… 제정신이냐? 기사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건 클라우드 왕국을 향한 반역이야!”
“너도 맞아 볼래?”
“히익!”
페스트가 제르바를 가리키며 물었다.
“다크 님, 저건 제가 처리할까요?”
“아니, 그냥 보내 줘.”
문트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저렇게 내보내면 정예병이 몰려올 거예요!”
“몰려오라고 내보내는 거야.”
“최소한 기사들의 치료라도…….”
“괜찮아. 저 정도는 패서 보내야 주인도 같이 오지.”
“그래도…….”
나는 경비들을 불러 기사와 제르바를 내다 버렸다.
그러자 문트리아가 세상 잃은 표정을 중얼거렸다.
“아무리 영주님과 친분이 있다지만 이건 좀…….”
당당하게 들어간 기사 여섯이 피떡이 되어 던져지자, 저택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당황했다.
“백인장님, 이거 큰일 난 것 같은데요.”
“나도 알아… 백병전에 대비해라!”
경비들도 병사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긴장하며 대치를 이어 갔다.
포위망은 여전했으나 일부 병사들이 기사들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돌아갔고, 차 한잔 마실 틈도 없이 기병 80기가 제르바와 함께 들이닥쳤다.
문트리아가 기병을 이끄는 자를 알아봤다.
“경비대장인 메르디크 준남작이에요.”
“준남작이면 말단 귀족이네.”
“말단 귀족이라도 귀족이에요. 작위 없는 기사들과는 격이…….”
문트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본관 로비에 들어선 메르디크 준남작과 제르바.
“저놈입니다! 저놈이 헤멜 경과 기사님들을!”
제르바가 흥분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며 외치자, 메르디크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고, 나를 본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눈치챘군.’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