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86화 (85/189)

86화. 제르바 상단의 몰락 (3)

나와 시선을 주고받은 메르디크 준남작이 허둥지둥 말에서 내리더니 투구를 벗었다.

기병들이 본관을 포위했고, 병사들이 들어와 대형을 갖추는 사이 전신을 갑주로 완전 무장한 그가 내게 다가왔다.

철그렁철그렁.

나와 어느 정도 가까워진 메르디크.

저택 인원과 대치하게 된 일단의 병사.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메르디크가 무릎을 굽히며 인사해 오자,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던 자들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바이센 메르디크 준남작입니다. 남쪽에서 오신 다크 님이 맞으신가요?”

“용케 알아봤네.”

“그야… 보기 드문 보라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못 알아볼 수가 없죠.”

내가 손가락으로 그의 부하들을 가리키자, 그가 손짓으로 부관을 불렀다.

“철수하라!”

“메르디크 준남작님, 이대로 빈손으로 물러가도 괜찮을까요? 영주님께선 확실히 매듭지으라고 하셨는데…….”

부관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메르디크.

얼빠진 표정의 제르바를 보곤 부하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가서 제르바와 관련된 자들을 모두 잡아 와라! 이곳에서 죄목을 따져 처리하겠다!”

“아니, 죄목이라뇨?”

제르바가 당황해 소리치자, 메르디크가 살기를 뿌리며 외쳤다.

“네 이놈! 감히 귀족인 날 속여 선량한 상인의 재산을 강탈하려 하다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선량한 나는 망연자실한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그 웃음에는 ‘넌 이제 끝났어. 그러게 왜 나한테 개긴 거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빌어 보던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뒤바뀐 상황을 눈치챈 제르바는 내게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개미족의 판단 기준은 명확하다.

유용한가, 그리고 안전한가?

제르바는 두 가지 기준에서 모두 미달이었고, 이미 내 마음속에선 식량 창고행임을 확정 지은 상태.

제르바는 내게 아무리 빌어도 반응이 없자, 타깃을 바꿔 문트리아에게 매달렸다.

“잘못했어.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

자신의 아이들까지 들먹여 가며 문트리아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제르바.

문트리아가 흔들리는 것 같아 한마디 해 줬다.

“문트리아,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야. 그리고 후환을 남겨서도 안 돼.”

“…그렇겠죠.”

병사들은 돌아다니며 제르바의 가족, 친인척, 직원, 노예 등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개미 저택을 치러 간 병사들이 제르바 상단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란 유리가 기사 열 명과 병사 200을 이끌고 왔다.

“메르디크 준남작, 이게 무슨 짓이냐!”

유리는 메르디크에게 왜 돈줄을 끊냐며 성을 냈다.

“바르퀴르 자작님, 그것이 다크 님께서 와 계셔서…….”

“뭐? 설마 내가 아는 그 다크를 말하는 건가?”

“네.”

나를 본 유리는 매우 반가워했고, 메르디크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열을 내며 제르바 조지기에 가세했다.

가용 병력이 두 배로 늘어나니, 제르바와 관련된 인물들의 구속도 빨라졌다.

“다크여, 제르바는 나의 사람이기도 하나… 부쉬트니 자작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럼 처벌은 힘든 거야?”

“상인 하나 처벌하는 것에 신경 쓰는 귀족은 없다. 그래도 예의상 부쉬트니 자작에게 말해 두는 게 좋겠지.”

유리는 아쉬워하며 말을 이었다.

“메르디크 준남작을 붙여 줄 테니, 필요한 게 있다면 그에게 말하면 된다.”

유리는 일이 끝나는 대로 영주성을 찾아 달라며 급히 떠났다.

“알았어. 이쪽 일이 마무리되면 가 볼게.”

“그럼 기다리겠다.”

유리가 떠나자 저택 정원은 재판장으로 바뀌었다.

메르디크는 내게 환심을 사기 위해 잡혀 온 인간들을 고문하여 숨어 버린 제르바의 친인척을 찾아냈고, 제르바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직원들의 가족과 평소 인사를 주고받던 사람들까지 잡아들였다.

‘반역도 삼족까지만 멸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죽이고 싶은 거야?’

처음에는 승리했다는 도취감이 있었지만, 잡혀 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성내 경제가 걱정되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성민 열 명 중 한 명은 잡혀 오겠어…….’

많은 사람이 끌려오면서 거리가 썰렁해졌다.

메르디크는 저택 정원을 가득 채운 인원들의 죄목을 따져 판결을 내렸다.

처벌 기준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메르디크의 기분에 따라 사형에 처하거나, 혹은 신분을 강등시켜 노예로 만들었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시끄럽게 울어 대자, 그대로 목을 쳐 버리는 바람에 정원 한 켠에 핏빛 연못이 만들어졌다.

나는 메르디크에게 사형을 최소화하고 노예로 만들어 내게 인계해 달라고 했다.

“보존식… 입니까?”

“비슷해.”

“그렇군요.”

지하에 있던 개미들은 인간들의 시체를 손질하며 매우 좋아했다.

‘무슨 인간 목숨이 개미보다 가볍지?’

강등될 신분이 없는 노예 마흔 명은 주인인 제르바가 죽었으니 전부 사형될 운명이었으나, 내가 인계받아 써먹기로 했다.

“다크 님, 주인을 지키지 못한 노예에게 벌을 주지 않으면, 질서가 바로 서지 않습니다. 광장에 일주일 정도 걸어 두고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는 건 어떨까요?”

운명의 갈림길에 선 노예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고, 몇몇은 내게 가족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감히 노예 따위가 어디서 사람의 말을 하느냐!”

메르디크 녀석은 노예를 가축 이하의 존재로 보는 듯했다.

“잠깐만, 내 거니까 죽이지는 마.”

“그럼 노예들의 기강이…….”

“그 기강을 잡는 것도 나야. 뭐, 크게 상하지 않는 선에서 벌주는 건 괜찮겠지.”

노예들은 감사하다며 큰 절을 해 왔고, 메르디크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면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본다며 무거운 처벌로 위장해 주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자비라곤 전혀 없는 미친 마녀로 소문났지만, 메르디크는 자신의 일 처리에 뿌듯해했다.

‘세크리를 보는 것 같군.’

2주간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통해 200명이 처형당하고, 600명이 노예가 됐다.

나는 그중 절반을 선별해 데려가기로 했고, 나머지 절반은 메르디크가 데려가 최악의 근무 환경을 자랑하는 광산에 투입하기로 했다.

“튼튼한 놈들로 골라 가시죠.”

“아냐, 난 이거면 돼.”

나는 어리거나 심성이 괜찮아 보이는 인간으로 300명을 뽑아 둥지로 보냈고, 처형당한 200명의 시신 역시 함께 보냈다.

‘휴…….’

그때, 헤멜을 비롯한 다섯 기사가 내게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메르디크, 이 녀석들도 사형이야?”

“그게…….”

사소한 잘못만 있어도 사형부터 외치던 메르디크가 웬일인지 기사에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잃기에는 아까운 인재라…….”

말단이긴 하나 영지의 기사는 스물다섯 명이 되지 않았고, 작위 없이 영주에게 충성하는 기사는 더욱 귀하다고 하니…….

‘기사들 정도는 돼야 인간 대접을 받는군.’

제르바와 달리 자신의 분수를 파악했는지 복수심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죽음을 각오한 느낌이었다.

‘후환은 없을 것 같고… 쓸 데가 있으려나?’

내가 용서해 주니 기사들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들의 눈에 존경이 차오르며 기사다운 자세로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언제든 불러 주신다면 명예를 다해 힘을 보태겠습니다.”

여섯 기사를 용서하니 그들이 속한 혈족들도 구사일생하여 주군에게 반하지 않는 한, 언제든 날 위해 창칼을 들기로 맹세했다.

내가 용서했으나, 목숨만 건졌을 뿐.

메르디크가 그들의 가산을 몰수했고, 감봉과 함께 외지로 파견하여 몬스터 소탕을 명했다.

“명예를 다해 죄를 씻어 내고 오겠습니다!”

기사들의 처우가 결정되며 제르바 건이 일단락됐지만, 핏물로 물든 정원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동안 깊은 절규로 가득한 흑마력에 노출되며 내 마력에도 변화가 생겼다.

‘물리력이 이전보다 강해졌어.’

이대로 인간들의 틈에서 수련을 쌓는다면, 더욱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듯했다.

제르바 상단이 사라지며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고, 영지 중심에 위치한 건물과 토지의 대여료가 폭락했다.

상인들은 이때다 싶어 토지 사용권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저희도 사 둘까요?”

“아냐. 노리고 있던 땅은 이미 다 팔렸어.”

“그럼 어쩌죠?”

재주는 내가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아 간 상황.

“급할 게 있나? 우린 노예나 사들이고, 직장 잃은 인재를 쓸어 담자고.”

“그래도 괜찮을까요? 중심지의 땅을 빌리려면 지금이 기회인데…….”

“걱정하지 마.”

나는 블랙리스트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조지고 싶은 놈은 한두 명이 아니야.”

“앗…….”

나는 둥지에서 미니 워커들을 데려와 지하 농장을 만들게 했고, 기초 과정을 수료한 인간을 대거 불러들였다.

‘이곳 상인들은 주로 교역을 통해 돈을 번단 말이지.’

기록 체계가 낙후된 세계.

이곳 상인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점포를 맡겨야만 했다.

그러니 홀로 운영할 수 있는 점포 수에 제한이 걸렸고, 이는 상권 독점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복식부기가 가능한 인재를 대거 데리고 있는 나는 운영할 수 있는 점포 수에 제한이 없는 셈.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상단 조직의 체계를 다지던 중, 메르디아에게서 필사한 책을 받게 됐다.

[마법의 기원]

책의 설명에 따르면, 마법이란 마력 친화력이 높은 자들이 몬스터와 자연 현상의 마력 패턴을 모방하며 생겨났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던 마력 패턴은 극히 일부였다고 했다.

지금에 이르러선 자연계를 분석하려는 마법사가 사라졌고, 쌓아 온 패턴 데이터를 좀 더 효율적으로 개량하려는 마법사가 주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마법의 위력은 증가했으나 200년간 새로운 마법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기존의 마법이 하나둘 유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저자는 현재의 마법 체계를 비판했다.

그러고는 책의 마지막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 기원을 잃은 지금의 마법은 더는 발전할 수 없다. 발전을 원한다면 기원을 찾아가라…….

사실상 마법이란 주제의 철학책이나 마찬가지였고, 저자는 현자 호에론.

문트리아가 알려 주길 500년 전의 인물이 쓴 것이니 내용의 신빙성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재밌게 잘 읽었다.

마법에 관한 책들을 더 보고 싶었던 나는 내성을 찾았다.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에서 유리를 만났다.

“어쩌다 상인 행세를 하게 됐나? 그리고 개미족의 신체 부위는 어떻게 감춘 거지?”

“말하자면 기니까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 줘. 영지는 어때?”

“영지 말인가…….”

성채는 주변 영주들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복구했으나, 농지 쪽은 소규모로 분포된 고블린 때문에 힘들어 했다.

“용병을 끌어오기 위해 토벌 보상금을 내주고 있지만, 나가는 돈이 너무 많다. 거기다 식량 가격이 오르고 있어서 병사의 유지도 쉽지 않아.”

식량 가격은 나로 인해 오른 부분이 컸지만, 모르는 듯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자금이 부족하다는 거야?”

“고블린 산맥 원정을 통해 부족한 자금을 벌어들일 수 있긴 하다.”

“거긴 우리들의 영역이야.”

“그런가?”

실망한 그에게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 줬다.

“조만간 식품 가격이 안정될 거고, 몬스터 문제도 해결될 테니 걱정하지 마.”

“고맙군. 혹시 필요한 게 있나?”

“볼 만한 책이랑 토지 거래를 담당하는 행정관을 붙여 줘.”

“알겠다. 책은 여기서 고르면 되고, 행정관은 저택에 보내지.”

유리는 책장 1개 정도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도 이 정도 밖에 안 되다니, 다른 곳은 더 기대를 접어야 할 듯했다.

책장에는 신화, 역사, 신분, 복장, 사교, 정치, 무기, 무술, 몬스터, 마법, 신앙 등등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었다.

그중 마법과 관련된 책 일곱 권과 몬스터와 관련된 책 세 권을 빌렸다.

저택에 돌아와 책을 읽어 보며 시간을 보냈다.

마법 입문서를 보니, 마법이란 일정한 패턴으로 마력을 배열한 뒤, 자연의 마나와 공명시켜 법칙을 비트는 힘이라 나와 있었다.

흥미로운 내용도 많았지만, 내 마력의 특성상 책에서 나온 방식으론 마법을 발현할 수 없었다.

‘마력을 흡수해 버리는 특성 때문에 마나와 공명할 수가 없어.’

시간이 흘러 지하 농장이 커지면서 일꾼이 부족해졌다.

그러고 보니, 최근 아르모네가 늘어난 허니 퀸들의 처우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몇 마리 불러와야겠다.’

허니 퀸 십여 마리를 데려와 농장 일을 돕게 했다.

개미족과 꿀벌족이 힘을 합치자 굉장한 시너지가 발생하며, 인간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생산성을 보였다.

‘곡물을 지배하는 자, 세상을 지배한다고도 하지.’

지하에선 이곳에서 얻은 종자로 키운 밀, 호밀, 보리가 생산됐고, 그 외에도 다양한 작물이 재배됐다.

지금은 늘어나는 직원, 노예, 그리고 고아들에게 공급하는 정도였지만, 이대로 확장을 거듭하면 조만간 바르퀴르 성내에 무한정 공급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가 되면 식량을 미끼 삼아 인간들을 개미족의 노예로 부릴 수 있으리라.

‘고작 영지 하나 점령했다고 착각하면 안 돼.’

일개 영지 하나 정도는 개미족의 상대가 안 되나, 인류 전체와 싸우기에는 개미족의 세력은 미약하다.

그러니 좀 더 은밀하게 활동할 필요성이 있었다.

나는 개미족임을 숨기고 클라우드 왕국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이었고, 나아가 대륙의 인간들이 개미족의 지배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세뇌할 작정이었다.

이미 개미교, 직원, 고아, 노예를 통해 세뇌는 시작됐다.

지하 농장이 가동되며 문트리아와 본격적인 상권 쟁탈을 논의할 때, 누군가 저택의 문을 두드리는 걸 감지했다.

“밖에 누가 왔는데?”

“이 시간에요?”

집사가 들어와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술집 여인이 다크 님을 뵙고 싶다고 소란을 피워서… 지금 당장 쫓아내겠습니다.”

“술집?”

저택을 찾아온 건 술집에서 일하던 프릴과 릴리였다.

프릴은 의식불명인 상태였고, 릴리 또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본관으로 들이도록 해. 무슨 일로 날 찾았는지 들어 봐야겠어.”

무한자원 개미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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