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87화 (86/189)

87화. 프릴, 릴리, 엘리샤, 데이지

영주인 유리 바르퀴르의 자금줄이라 여겨졌던 제르바 폰 바쿠바의 완전한 몰락은 상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줬다.

그들은 귀족 혈통도 아닌 평민 여자에 불과한 문트리아가 운영하는 신생 상단에 의해 무너졌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녀의 뒷배로 다크가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미친년이 돈만 많은 게 아니라 권력까지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암흑가의 비어베어는 다크의 행적과 정보를 수집하는데 열을 올렸고, 상인과 주민들은 그와 관련된 정보를 구매하여 분석했다.

다들 가진 걸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다크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 애쓸 때, 린지 폰 비고는 바쿠바 일가의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이건 기회야!’

그는 비어 버린 알짜배기 땅의 사용권을 저렴하게 사들였고, 제르바와 연관된 자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냈으며, 병사들과 모의하여 영지에 몰수됐어야 할 자산을 빼돌렸다.

거기다 경쟁자들을 제르바의 관계자로 만들어 처리하기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그는 순식간에 부유해졌고, 친인척들을 지원하여 잡화 유통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 갔다.

그렇게 비고 일가의 잡화점 연합이 만들어졌다.

단합을 이룬 잡화점들은 교역 상인들에게서 싼값에 물건을 사들였고, 시세와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판매가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잡화만 팔아선 돈이 안 돼. 좀 더 돈이 되는 사업을 해야겠어.”

린지는 고객 리스트를 만들어 부유층에게는 좀 더 좋은 물건을 싸게 납품하여 환심을 샀고, 가난한 하층민에게는 생필품을 고가에 팔아 빚을 지게 했다.

그렇게 시작된 비고 일가의 고리대금업과 인신매매업은 비어베어의 지원과 더불어 다크의 소비 패턴과 맞물려 급성장을 이루었다.

일개 잡화점 주인에서 어엿한 상인으로 거듭난 린지는 매일같이 술집을 찾아 여자를 안았고, 과거의 서러움을 풀 듯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술집의 마담들은 비어베어 조직원들에게 보호를 요청했지만, 그들은 린지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어 술집 직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던 중 사고가 터졌다.

다크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프릴이 술에 취한 린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다크가 여길 왔었다고?”

“네… 가끔 오셔요.”

“계집이 뭘 한다고 술집에 온다는 거냐! 지금 취했다고 날 무시하는 거지?”

술에 취한 린지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고, 그를 제지할 만한 이도 없었다.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

프릴은 무릎을 꿇고서 죄송하다며 빌었지만, 흥분한 린지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서 두들겨 팼다.

퍽! 퍽!

비명이 울려 퍼지자 술집의 여주인이 어떻게든 프릴을 구하기 위해 위층에 올라가려 했으나, 비어베어 놈들은 시시덕거리며 주인장을 막았다.

“그냥 놔두쇼. 손님들도 좋아하는데.”

“그렇지만… 이러면 아이들이 불안해해서 더는 장사 못 해.”

“마담, 여기서 장사하고 싶은 사람은 널렸으니까, 정 불안하면 장사 접고 떠나쇼. 우릴 거스를 생각 따윈 하지도 말고.”

마담이 무기력하게 주저앉자, 비어베어 놈들이 표정을 풀며 말했다.

“우리도 악마는 아니니까, 심하게 망가지면 새것으로 교체해 줄게.”

그 말에 마담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조직원을 노려봤고, 조직원은 마담의 어깨를 강하게 그러쥐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제대로 된 거로 교체해 줄 테니까. 됐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마담을 거칠게 밀어낸 조직원들은 자리로 돌아가 술을 퍼마시며 프릴의 비명을 안주 삼았다.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맞은 프릴은 2층 창문 밖으로 버려졌다.

동료들에 의해 방으로 옮겨진 프릴.

그녀는 의식불명인 상태였고, 회복이 어려워 보였다.

동료들은 사경을 헤매는 프릴을 보며 씁쓸해했으나, 릴리는 눈물을 닦아 내고 마담에게 부탁했다.

“마담, 약을 구해 줘! 그동안 내가 모은 돈 다 줄 테니까… 부탁해!”

마담은 그런 릴리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안아줬고, 어느 정도 진정한 그녀에게 현실을 말해 줬다.

“…프릴을 이대로 두면 얼마 살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약을 구해 줘.”

“하지만 프릴의 상태를 볼 때, 치료하기 위해서는 중급 포션이 필요해. 신전도 없는 이곳에서 중급 포션을 구하기란…….”

마담이 말끝을 흐리자, 릴리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기사들이라면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귀한 포션을 내줄 리가 없잖니?”

현실을 알려 준 마담은 영업을 위해 여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릴리를 남겨 프릴을 간호하게 했다.

방에 남아 프릴을 간호 중인 릴리.

죽어가는 동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절망한 그녀에게 얼음 미녀라 불리는 선배가 찾아왔다.

“릴리, 나도 8년 전에 친구를 잃었어.”

자신의 과거를 한참이나 이야기하던 얼음 미녀 엘리샤가 방을 떠나며 말했다.

“비어베어라면 중급 포션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순간, 릴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엘리샤가 방을 나오자, 바로 앞에 그녀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가게 매출 1위, 데이지가 화난 표정으로 대기 중이었다.

엘리샤가 말없이 그녀를 지나치려 하자, 데이지가 갑자기 뺨을 때렸다.

짝!

“엘리샤,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릴리마저 잘못되길 바라는 거야?”

엘리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데이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가게에 도움도 안 되는 멍청이가 사라지고, 좀 더 쓸만한 년이 들어오겠지. 예를 들어서 너처럼 잘 팔리는 년으로 말이야.”

프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왔다가 두 사람의 냉전에 끼게 된 동료 하나가 난감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프릴의 방에서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데이지가 프릴의 방을 급히 열었다.

텅 빈 방 안에서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고, 커튼을 연결해서 만든 밧줄이 보였다.

“릴리가 없어!”

릴리가 2층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소식은 마담에게 전해졌고, 데이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마담은 엘리샤를 따로 불러 벌을 줬다.

다음날 오후.

만신창이가 된 릴리가 영업 전의 술집 문을 두드렸다.

“마담…….”

릴리는 환히 웃으며 소중히 품고 있던 유리병을 내밀었고, 그걸 받아든 마담은 그녀의 상태를 보곤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릴리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쓰러졌고, 마담은 그녀가 가져온 포션을 프릴에게 먹였다.

하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날 저녁, 마담과 종업원들은 비어베어 조직원들의 대화를 듣고 릴리가 가져온 포션이 포장만 그럴듯한 가짜라는 걸 알게 됐다.

“릴리가 몸까지 버려 가며 구해온 포션이 가짜라니…….”

“…릴리에게 비밀로 하는 게 좋겠죠?”

프릴의 방에서 대화 중이던 데이지, 엘리샤, 마담.

“그냥 내가 팔아 치웠다고 하렴.”

“그럼 마담이…….”

“됐어. 원망의 대상이라도 없으면 릴리가 무너질 거야.”

마담은 어떤 원망을 받더라도 릴리에게 비밀로 하려 했지만, 때마침 프릴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릴리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말았다.

“…….”

릴리는 놀란 그녀들을 지나쳐 프릴을 일으키더니 등에 업고서 방을 나서려 했다.

마담이 릴리를 막아섰다.

“한밤중에 어딜 가겠다는 거야! 당장 들어가지 못해!”

릴리가 말을 듣지 않자 흥분한 마담이 손을 치켜들었다.

“너!”

하지만, 마담은 차마 상처투성이인 릴리를 때리지 못했다.

릴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비켜 줘요, 마담. 전 제 친구를 살려야겠어요.”

그 올곧은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마담이 길을 비켜 주며 주저앉았고, 엘리샤가 릴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려놔.”

“싫어요.”

“그 몸으론 부축하기 힘들잖아. 내가 반대쪽을 부축해 줄 테니까, 내려놔.”

릴리가 놀란 눈으로 엘리샤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함을 유지했다.

“어디로 갈 생각이야?”

술집에서 나온 엘리샤가 릴리에게 물었고, 그녀는 영주성이라고 답했다.

“우리 같은 게 가면 귀족 모독죄로 무조건 죽어.”

“그래도 가 볼래요.”

엘리샤는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라리 개미 저택으로 가자.”

“다크 님에게요?”

최근에는 물 대신 신선한 피로 화원을 가꾼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어 다크는 귀족보다 더한 악녀로 여겨졌고, 다크의 무심한 눈을 직접 접해 본 릴리는 그녀가 프릴을 위해 귀한 포션을 내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안 돼요. 다크 님은 우릴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요.”

“그분이 우릴 벌레 이하로 여긴다는 건 알아. 그래도…….”

엘리샤는 다크의 행동에서 자신들이 배려를 느끼곤 했다.

“그 가능성에 기대 봤으면 해.”

엘리샤의 말을 들은 릴리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 목적지를 결정했다.

“엘리샤 언니를 믿어 볼게요.”

두 여인은 프릴을 부축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개미 저택.

정원에 설치된 푸른 마광석과 맞물려 미처 치워지지 않은 고인 핏물과 검붉은 화원이 을씨년한 풍경을 자아냈다.

엘리샤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며 발길을 돌리자고 했지만, 릴리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고마워요, 언니.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요.”

떠나가는 릴리를 보며 엘리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내가 그녀를 사지로 보낸 거야.’

몸을 돌려 돌아가던 엘리샤는 비어베어의 조직원 셋에게 둘러싸였다.

“이거 엘리샤 아니야?”

“지나갈게요.”

“출장이라도 온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여기까지 왔으면 빼지 말라고!”

엘리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포자기할 때, 무음의 칼날이 조직원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엇…….”

토막 난 조직원들이 널브러지는 광경을 본 엘리샤는 석상처럼 굳었다.

엘리샤는 시체를 회수하러 온 페스트를 만나게 됐다.

“오늘의 간식 확보! 어라, 하나 더 있었네.”

페스트는 주저앉은 채 눈만 껌뻑이는 엘리샤를 향해 손을 뻗었고, 화들짝 놀란 엘리샤는 급히 말했다.

“저… 다크 님과 아는 사이에요.”

페스트와 다크가 닮아 있어 살기 위해 뱉은 말이 엘리샤를 살렸다.

“정말?”

“정말이에요!”

“그럼 따라와. 확인해 보고 맞으면 보내 주고, 아니면…….”

엘리샤는 시체 세 구와 함께 페스트에게 끌려가며 다크가 아는 척을 해 주길 간절히 빌었다.

* * *

본관에 들어온 릴리는 날 보곤 기절해 버렸다.

릴리는 타박상이 심해 한동안 요양이 필요했고, 프릴의 상태는 겉만 봐선 알 수 없었다.

“이거 지하로 보내야겠는걸.”

둘을 메디에게 보냈을 때, 저택 인근의 감시자들을 처리하고 온 페스트가 돌아왔다.

“다크 님을 안다고 해서 데려왔어요.”

“누구더라…….”

개미족은 한 번 본 건 좀처럼 잊지 않는데, 가게 밖에서 보니 이미지가 달라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엘리샤! 프릴이랑 릴리와 함께 일하는 엘리샤예요!”

“앗! 가게 매출 2위 얼음 미녀잖아?”

내가 알아봐 주자 엘리샤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네, 얼음 미녀예요.”

“일단 집무실로 가서 이야기하자.”

“저… 릴리와 프릴은…….”

“치료실로 보냈어.”

무표정한 엘리샤였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 의심이었다.

‘뭘 의심하는 거지?’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치료실은 비밀 공간에 마련해 둬서 말이야. 비밀의 의미는 알지?”

엘리샤의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지.’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녀는 경계하는 모습을 최대한 감추며 입을 열었다.

“최근 잡화점 주인인 린지 폰 비고가 고리대금업을 시작하면서 저희 술집을 자주 찾기 시작했어요.”

내 덕에 커 버린 린지와 비어베어.

둘은 사석에서 날 호구 취급했다고 한다.

“그렇구나. 내 덕을 본 녀석들이 날 술안주로 삼았단 말이지? 재밌네. 걔들 말고는 없어? 날 호구로 여기는 놈들 말이야.”

나의 물음에 동공 지진을 일으키던 엘리샤가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영지에 영향력이 있는 거물들의 이름이 흘러나왔고, 내 뒤편에 서 있던 문트리아가 공책을 꺼내더니 메모를 시작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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