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소매업 진출
뒤에서 날 까는 놈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정리할 인간이 많다는 건 침략자인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쓰레기들이 정말 많네. 그중에서 제일 나쁜 새끼가 비어베어 놈들이란 말이지?”
상납금은 꼬박꼬박 챙겨 가면서 술집 여인들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그녀들을 팔아 잇속만 챙겼으니.
“아니에요. 그들이 있어서 저희도 영업할 수 있는 거라…….”
하는 말과 달리,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마력은 솔직했다.
“문트리아, 어때?”
“비고 일가라면 지금이라도 정리할 수 있어요. 비어베어 쪽은 시간이 걸릴 거예요.”
문트리아의 말에 엘리샤의 눈이 커졌다.
영지의 밤을 지배하는 비어베어.
엘리샤에겐 영주만큼 무서운 자들이겠지만, 내가 볼 때는 인원만 많을 뿐인 가난한 조직에 불과했다.
‘식량은 어느 정도 쌓였고, 메디와 엔지에게 맥주 생산도 준비하라고 했으니… 이참에 소매 시장에 진출해야겠어.’
식량 생산량이 차츰 늘면서 엔지, 메디, 디그파가 합심하여 맥주의 생산 설비를 개발 중이었고, 잉여 식품의 장기 보관을 위한 건조실도 만든 상태.
증류 시설을 만들면 소독용 알코올도 만들 수 있다.
개미족을 포함한 곤충형 몬스터는 알코올과 기름에 약하다.
그러니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여 무기로 쓰이지 않도록 제어할 생각이었다.
양질의 맥주가 생산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잡화 쪽은 당장이라도 진출할 수 있다.
잡화점은 서민들이 만든 생산품을 구매하여 교역 상인에게 판매하고, 교역 상인에게 구매한 생필품을 서민들에게 판매하는 곳.
잡화 시장의 장악은 서민들의 경제권을 장악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문트리에게 잡화 시장을 독점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물어봤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본 문트리아가 말했다.
“2주는 걸릴 것 같아요.”
“2주나 걸려?”
재계산을 마친 문트리아가 답했다.
“일주일 안에 정리해 볼게요.”
“그렇게 해.”
비고 일가는 문트리아 선에서 처리하게 했고, 비어베어 놈들을 어떻게 정리할지는 논의가 필요했다.
“놈들의 간부가 몇 명이라 했지?”
술집, 인신매매, 정보, 무력.
“네 명의 핵심 간부가 있어요.”
나와 문트리아의 대화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엘리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집사를 불렀다.
“엘리샤에게 방을 내줘.”
“괜찮아요.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밤늦게 여자 혼자 돌아다니면 이상한 놈들이 엉겨 붙으니. 베르딘과 페스트를 붙여 줬다.
“그럼 잘 가고, 릴리와 프릴은 내가 잘 치료해서 돌려보내 줄게.”
“감사합니다.”
* * *
저택을 나온 엘리샤는 멍한 표정으로 베르딘의 에스코트를 받아 가게로 돌아왔다.
베르딘은 술집에서 한잔하고 싶었지만, 위장 시간을 아껴야 하는 페스트가 있어 급히 돌아가야 했다.
엘리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마담과 데이지는 안도했다.
“그렇구나. 다크 님이 둘을 받아 주셨다니 다행이야.”
“엘리샤, 비어베어에 대한 이야기는 왜 한 거야?”
비어베어는 배신자를 용서치 않는다.
엘리샤가 다크와 주고받은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그녀의 삶은 그걸로 끝이었다.
“나도 알아. 그래도 다크 님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
“다크 님이야 괜찮겠지. 그런데 넌…….”
엘리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는 너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해 볼게.”
한동안 가슴 졸이며 일상을 보내던 엘리샤.
그런데 린지와 관계된 손님들의 낯빛이 나날이 어두워졌고, 사흘쯤 지나자 술집을 찾는 자들이 급감했다.
술집 여인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상인들에게 물어봤다.
“개미 상단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잡화점을 인수하려고 했어.”
“잡화점을요?”
“그래.”
지금의 잡화점은 고리대금과 인신매매까지 연계된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
비고 일가가 순순히 넘길 이유가 없었다.
“린지는 당연히 거절했지. 문제는 그 후야.”
다음 날부터 각 구역에 개미 상단이 직영으로 운영하는 잡화점이 생겼고, 그동안 비고 일가가 독점하던 생필품을 교역 상인들에게서 적정값에 사들여 최소한의 이윤만 남긴 채 판매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직원의 태도가 차원이 달랐어. 얼마나 깨끗하고 싹싹하던지, 내가 무슨 귀족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니까?”
매장의 크기, 위생, 서비스.
모든 면에서 기존 잡화점을 초월한 개미 잡화점이 생겨나며 사람들은 기존 잡화점을 찾지 않게 됐고, 그로 인해 비고 일가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 비고 일가는 개털이야. 술집에 올 돈은커녕, 상점을 유지할 돈도 안 나올 거야.”
“그렇군요.”
“그렇지. 그래도 놈들이 뿌린 돈이 워낙에 많으니, 회수하면 어느 정도 버틸 순 있겠지. 그걸 개미 상단이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것 같지만.”
“두고 보지 않는다고요?”
“너희들은 다크를 몰라. 그녀에게 찍힌 자들은 누구 하나 살아 남지 못해.”
“네?”
“조만간 너희도 알 거야. 왜 상인들이 다크를 미친년이라 하는지.”
린지는 돈을 회수하고 다니며 갚지 못한 자들을 노예 상인에게 넘기려 했으나, 노예 상인들이 그와의 거래를 거부했다.
“아니, 왜!”
“너희랑 거래하면 다크 님에게 찍힌단 말이야.”
“다크? 그년이 그렇게 무서워? 난 비어베어의 간부 마르코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야!”
“도살자 마르코?”
마르코는 비어베어의 조직 내에서 인신매매를 담당하며 노예 상인들과 거래 관계를 맺고 있지만, 상인에게 있어 물건을 공급해 주는 거래처보단 돈을 써 주는 고객이야말로 진정한 갑.
“다크가 노예 시장에 얼마를 뿌리는지 알아? 모르면 닥치고 꺼져!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고!”
채무자를 처분하지 못한 린지는 자금난에 빠졌다.
궁지에 몰린 그는 비어베어를 찾았다.
“그러게 개미 상단을 왜 건드렸냐?”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잡화점을 넘기지 않겠다고 한 게 다야!”
인신매매를 담당하던 비어베어의 간부 마르코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는 것 같아 말해 줄게. 네가 전에 실컷 두들겨 패고 창밖으로 내던진 여자가 개미 저택에서 치료받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그게 무슨…….”
“똥을 거하게 밟았다는 이야기야.”
“…….”
“지금 술집 담당인 아론이 너랑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우리도 비상이야.”
“그게 무슨…….”
“어쨌든 다신 찾아오지 마라. 다음에 오면 그냥 보내 줄 순 없으니까.”
며칠 후, 린지를 비롯한 비고 일가는 하나둘 잡화점을 헐값에 처분하더니 영지를 떠났다.
그 소식을 접한 엘리샤.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번 다크와 문트리아가 주고받은 대화가 떠올랐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어.’
엘리샤에게 있어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거물들이 다크가 부하에게 툭 던진 말 한마디에 기반을 송두리째 잃었다.
거기다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비어베어마저 다크라는 특급 고객을 잃을까 싶어 전전긍긍했고, 다크와 접점이 있다는 이유로 술집의 여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됐다.
‘마치 귀족 같아…….’
마찬가지로 상인들 역시 예전처럼 술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 않게 됐고, 다크의 정보를 얻기 위해 술집을 찾는 손님도 많아졌다.
“엘리샤, 다크와 독대해 봤다는 게 사실이야?”
“네… 예전에 한 번.”
특히 엘리샤는 다크와 친밀하다고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단 한 번도 넘어 보지 못한 데이지의 매출을 넘어서는 쾌거를 달성했다.
* * *
치료실에서 깨어난 릴리는 자기 몸을 더듬는 허브 워커들을 느끼곤 경악했다.
‘개미!!’
당황한 그녀였지만, 패닉에 빠지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다크 님을 만나고… 설마 다크 님이 날 개미굴에 버린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오거 굴에 들어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는 속담을 떠올린 릴리는 눈알을 굴려 봤지만, 개미굴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깨어났음을 인지한 허브 워커들은 메디를 불러왔다.
“깼어?”
사람 말을 하는 인간형 개미를 본 릴리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알을 팽팽 굴렸다.
“넌 내상이 깊지 않아 아쉬웠어. 이제 퇴원해도 돼.”
예상치 못한 말에 릴리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퇴원이요?”
“저기 빅 워커를 따라가 봐.”
치료실에서 쫓겨난 릴리는 언제 자신을 덮칠지 모르는 빅 워커를 따라가야 했다.
도착한 곳에는 릴리와 같은 인간들이 잔뜩 있었고, 그곳에서 개미교의 수녀와 워커맨들을 만났다.
“개미족을 보곤 당황하셨지요? 안심하세요. 이분들은 당신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 개미신 키틀레야 님께서 보내신 자비로운 존재예요.”
장내에 모인 인원들은 몬스터가 지척에 있으니 입을 열 수 없어 수녀의 말에 집중했다.
“물론 이분들이 누구에게나 자비로운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분들의 가족이 된다면 분명 은혜가 내려질 겁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이세요.”
겁에 질린 사람들이 수녀의 말에 따라 하나둘 고개를 숙이자, 가까이 있던 개미들이 다가와 더듬이로 전신을 더듬었다.
몇몇 인간은 두려움을 느껴 그만 접근하는 개미의 더듬이를 후려쳤고, 그러자 주변에 있던 개미들이 즉시 그 인간을 덮쳐 해체해 버렸다.
“자비를 거부하다니, 어리석군요.”
릴리는 산 채로 해체당하는 사람들을 애써 무시한 채 개미들에게 몸을 맡겼다.
한참이나 몸을 더듬던 개미들이 떠나간 후, 수녀들이 다섯 명씩 짝을 이루게 하여 지낼 곳을 알려 줬다.
“조에서 개미님을 위협하는 존재가 발생하면 연대 책임이 됩니다. 그러니 이상한 행동을 하는 조원이 있다면 미리 알려 주시는 게 좋아요.”
“저… 이상한 행동이라면…….”
“음… 개미님을 무시하는 언행은 모두 처벌 대상이고, 여기서 탈출한답시고 개미족 분들의 심기를 건드는 것도 안 돼요. 담당 개미족이나 수녀에게 항상 물어보고 행동하는 게 좋죠.”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누군가의 물음에 수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해 줬다.
“이제부터 교육에 들어갈 거고, 학습 등급에 따라 대우가 크게 달라질 거예요. 잘 따라오면 저희와 같은 위치에 설 수도 있고, 다른 일에 선발될 수도 있죠. 하지만…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면 식량으로 분류되니까, 살고 싶다면 배우세요.”
각 조는 워커맨과 수녀들에게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게 됐고, 살기 위해 필사적이던 릴리는 그곳에서 뛰어난 학습력을 보였다.
릴리처럼 뛰어난 학습력을 보이는 자들은 좀 더 쾌적한 공간과 양질의 식사가 주어졌고, 상위 그룹으로 옮겨지는 반면, 학습력이 떨어지거나 의욕이 없는 자들은 그에 맞는 열악한 대우를 받았고, 언제든지 개미족의 특식이 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껴야 했다.
“죽어 가고 있던 나를 개미들이 치료해 줬지. 네 동료도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지 몰라.”
지하 기지에서 잘 적응한 릴리는 바르퀴르 성의 취약 계층과 환자들이 이곳에 흘러들어 오고 있음을 알게 됐고, 프릴 또한 치료를 받고 있을 거라는 정보를 얻었다.
‘프릴… 난 여기에 있어.’
프릴이 언제가 이곳에 올 것을 직감한 릴리는 수녀와 개미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더욱 노력하여 자신의 학습 등급을 올렸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