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폭우
문트리아의 장담대로 잡화 시장을 독점하는데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기 때문에 가능한 속도였다.
기반을 잃고 떠나는 린지 일가를 비어베어 놈들이 잡아들이려 했으나, 린지가 고용한 용병들의 방해로 놓치고 말았다.
‘아쉽네. 잡아 오면 실컷 괴롭히고, 페르 님에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시장을 독점하니 교역 상인이 가져온 식량을 비싸게 사 줄 필요가 없어졌다.
매입가를 인근 농민들이 판매하는 수준으로 낮췄더니, 영지의 식량 도매가가 폭락했다.
처음에는 내게 쩔쩔매던 상인들이었지만, 식량 매입량을 차츰 줄이자 더는 못 참겠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개미 상단의 물건을 사 줄 수 없어!”
“더는 식량을 공급하지 않을 거야!”
잡화점의 점주를 협박하는 놈부터 점원을 매수하려는 상인들까지.
그러나 체계적인 기록을 토대로 돌아가는 잡화점에선 그 어떤 예외 상황도 내 허락 없이 통과되지 못했다.
아무리 찔러봐도 효과가 없자 상인들도 조급한 건지, 작당 모의 끝에 거대한 연합을 형성하여 날 압박했다.
그들이 물건을 사 주지 않으니, 무한정 치솟던 나의 금력도 마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요구는 둘.
하나는 잡화점의 식량 구매가를 올려 달라는 것.
또 하나는 연합 소속의 상인 한정으로 도매가 납품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놈들도 내 눈치를 보는지 들어줘도 크게 상관없는 수준의 합리적인 요구를 해 왔지만, 연합해서 날 압박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지금 나랑 힘겨루기 하자는 건가?’
여기서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면 패배라 할 수 있고, 추후 더한 압박이 들어올 수 있으니…….
이참에 확실히 밟아 두기로 했다.
‘안 산다는 놈들에게 억지로 팔 필요는 없지.’
이쪽은 산전수전 다 겪어 본 21세기 엘리트.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도 잘 알았다.
‘자금을 확보하고 판로를 개척한다.’
나는 집사에게 루리아와 마부 출신인 존을 불러오게 했다.
“존, 둥지에서 전마로 쓸 수 없는 수컷 말들 좀 데려와.”
“짐말이 필요하신 건가요?”
“맞아. 벨레삭 백작령을 오갈 수 있게 준비해.”
벨레삭 백작령은 이곳보다 시장 규모도 크고 상인도 많을 테니 물건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터.
“네, 알겠습니다.”
루리아와 존에게 사병 50명과 짐꾼 50명을 붙여 짐마차 열 대를 준비하게 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둥지에서 무력으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나우피어도 딸려 보냈다.
“도착하면 외곽에 거점을 마련해 놔.”
“네!”
“이쪽에서 물자를 계속 보내 줄 테니, 그곳에선 아이들과 노예를 사서 보내.”
유리의 원료도 확보할 수 있으면 보내 달라고 했지만, 벨레삭 백작령 인근에선 유리 공방이 없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벨레삭 백작령과의 교역을 준비하며 영주인 유리에게서 각 상품의 독점 납품권을 받아 냈다.
내가 유리에게 식량을 비롯한 잉여 자원들을 납품하여 자금을 확보하자, 상인들이 개미 상단의 핵심 인원에게 몰래 접선하여 웃돈을 줘가며 물건을 구매해 갔다.
즉, 상인 연합에 분열이 발생한 것이다.
‘그냥 잡화점에서 사 가면 되지. 뭘 웃돈까지 줘 가며 사는 거지?’
상인들은 서로 협력 관계로 묶여 있어 배신자라는 낙인을 두려워했다.
다시금 돈을 쓸어 담기 시작한 내가 어디에 돈을 쓸지 고민할 때, 비어베어의 간부 마르코가 개미 저택의 핵심 인사인 베르딘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정말 저희가 아니니 믿어 주세요.”
“알겠어. 다크 님에게 그렇게 전해 줄게.”
마르코의 소속 조직원이 프릴과 릴리를 건드린 적이 없다며 어린 노예들을 상납했다.
“그러니까… 술집 담당인 아론이란 녀석이 릴리를 그 꼴로 만들었단 말이야?”
“네.”
베르딘의 보고를 들은 나는 아론이란 녀석을 어떻게 조질까 고민하며 좀 더 정밀한 정보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다.
“베르딘, 네가 정보기관을 관리해 봐.”
“정보기관요?”
“간단해. 식당, 여관, 술집, 상단, 암흑가, 영주성… 여기 바르퀴르 영지 곳곳에 사람을 심을 거야. 그곳에서 모이는 정보들을 취합해서 정리해 주면 돼.”
“네, 해 볼게요.”
베르딘과 사병 50명을 정보기관 쪽에 투입했고, 둥지에서 선발한 고급 인력을 다양한 곳에 스파이로 심었다.
둥지에서 데려온 만큼 이곳의 인간을 다시 둥지로 보냈고, 그들 또한 육성 과정을 거쳐 쓸 만한 인재로 거듭났다.
지하의 공간이 넓혀지며 지상과 오가는 길을 확보할 생각으로 영지 내의 여관을 모두 인수하기로 했다.
여관 주인 출신인 월리엄을 움직여 봤지만, 대부분의 여관 주인이 거절 의사를 밝혔다.
“월리엄, 개미 여관을 차리자.”
내 제안을 거절한 여관 앞에 수관이 매설된 4층 건물을 올려 식당, 목욕탕, 빨래방을 겸하는 고급 여관을 차리게 했다.
화장실, 욕실, 목욕탕, 그리고 난방과 통풍 시설을 통한 온도 조절까지 가능하게 만든 여관들은 기존 건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했고, 대형 세탁기를 도입하여 빨래 효율을 극대화했다.
건축 설계에 개미족의 기술력과 인력이 남몰래 투입된 결과였다.
여관업을 독점할 생각으로 기존 여관과 같은 수준의 돈을 받았다.
그러자 많은 여관 주인이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부탁이에요. 개미 여관의 가격을 올려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예전 내가 머물던 곳의 딸내미들이 찾아와 애원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곤 했지만, 그렇다고 여관업의 독점은 포기할 수 없는 법.
“미안.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야.”
“흑흑…….”
위로의 차원에서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쥐여 줬다.
“일자리가 필요하면 고용해 줄 테니까, 필요하면 말해.”
절망 가득하던 소녀가 골드 세 닢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골드가 세 개나…….”
그녀는 일반인이 일해서 15년은 모아야 할 돈을 성큼 내준 내게 머리가 닳도록 절을 하다 급히 뛰어가 부모를 데려왔다,
그들은 날 보고 절을 올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뼈가 부서지랴 일하겠습니다.”
“…그래.”
서비스업에서의 접객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거기다 나는 모든 가게에 개미 문양을 걸었으니, 균일한 품질을 보장해야만 했다.
“그럼 직원 교육부터 받아.”
교육이란 말에 살짝 거부감을 보인 여관 주인이었지만, 딸들이 눈치를 주자 비장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뭐든 배우겠습니다!”
이들의 소식이 퍼지며 길거리에 나앉은 베테랑 종업원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개미 상단의 문을 두드렸다.
“여기 오면 일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문트리아가 급하게 교육 기관을 확장하게 되었다.
돈을 버는 족족 인간들을 사들이고 고용하니 양질의 인재가 넘치게 되었고, 적성에 따라 장인들의 제자로 붙여 주거나 둥지로 보내 추가 교육을 받게 했다.
완성된 고급 인재들은 각 집단에 심어 스파이로 써먹거나, 용병으로 활동시켜 정보를 가져오게 했다.
베르딘의 정보기관이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비어베어 놈들에게 정보를 살 이유가 없어졌다.
큰 수익을 잃게 된 정보 담당 간부 첸이 직접 날 찾아와 아이들과 노예를 상납하며 그동안 대접이 소홀했던 것을 사과했다.
아이들 중 스파이 교육을 철저히 받은 엘리트가 몇 명 섞여 있었는데, 이들에겐 믿고 맡길 수 있는 교육 개미와 수녀들을 붙여 내 편으로 세탁될 때까지 심화 교육을 진행하게끔 했다.
‘정보의 첸과 인신매매의 마르코는 왔는데, 술집 담당과 무력 담당이 아직 안 왔네.’
잡화점의 수익은 나쁘지 않았지만, 크게 지어 올린 고급 여관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민들이 올 일은 없고, 용병들도 자기 집을 짓거나 마구간 같은 곳에서 자니…….’
적자라지만, 여관 사업은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기 위한 거라 포기할 수 없었다.
‘제대로 위장 기지가 되려면 흑자를 내야 할 텐데.’
여관업의 흑자 전환을 고민하던 어느 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개미족 둥지야 배수 설계가 잘 되어 있어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끄떡없다.
그러나 인간들의 집은 달랐다.
지대가 낮았던 슬럼과 성벽 인근의 저렴한 거주지가 수몰됐고, 고블린과의 전쟁 이후 재건 중이던 건물 대다수가 쓰러졌다.
내가 자리 잡은 곳도 지대가 낮은 편이었지만, 개미족이 관여한 건축물은 배수로 공사가 잘 돼 있었다.
일대의 빗물은 지하 저수지에 저장되어 정화조를 거쳐 저택, 고아원, 상단에서 쓰인다.
갈 곳 잃은 인간들은 지인에게 의탁하여 비를 피했지만, 슬럼가의 인간을 받아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백의 인간들이 폭우 속에 거리를 떠돌았다.
차츰 죽어 가는 그들이었지만, 성내의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여성이 개미 여관을 찾았고, 여관 담당인 총관은 난감해하면서도 차마 여성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는 둥지에서 선발된 인원이라 개미족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상부의 질책이 두려웠으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내가 책임질 테니… 방을 내줘.”
“총관님, 이건 그분들을 향한 배신행위에요!”
“알고 있어. 그래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려야지…….”
총관이 나서서 떠도는 사람들을 보호하자, 부총관은 개미 저택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니까 슬럼의 사람들을 수용해 줬다고?”
“네! 총관이 독단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저희가 말려 봤지만…….”
슬럼의 인간들은 노예 상인들도 거를 정도로 거친 성격에 병자들도 많았다.
“잘했네.”
“네?”
“잘했다고.”
개미족의 의료 기술은 수준급이라 웬만한 병은 치료할 수 있다.
즉, 노예 시장을 이용하는 것보다 슬럼의 인간을 치료해 쓰는 게 싸게 먹히는 셈.
그동안 슬럼의 사람을 써 보며 느낀 바로는 적응력이 좋고 충성심도 높다.
거기다 인간 혐오라는 휼륭한 자질을 갖춘 자들이 많다.
그러니 내게 있어 슬럼은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는데.
“월리엄! 이참에 슬럼을 정리하자! 문트리아는 월리엄을 지원해!”
여관 담당인 월리엄을 앞세워 갈 곳 잃은 인간들을 보호했다.
슬럼 쪽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폭우 속에 미아가 되어 집을 찾아가지 못해 방황하는 인간도 많았다.
월리엄은 위중한 자들부터 둥지로 보내 치료와 교육 과정을 밟게 했다.
폭우는 한동안 계속됐고, 많은 건물이 무너졌다.
‘지반 공사를 안 했나 보네.’
남쪽 성벽은 내가 지반을 강화해 둬서 괜찮았지만, 다른 쪽 성벽 일부가 무너지며 유리가 힘들어했다.
비가 오는 동안은 습한 공기 때문에 더듬이 감각이 둔해진다.
나는 괜찮았지만, 다른 개미들은 몸도 무거워지는지 활동을 꺼렸다.
그래서 비가 그칠 때까지 얌전히 수련이나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곧 겨울이 다가올 테고, 상단 역시 확장을 멈추고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그런데 지하에서 교육을 받던 인간들이 피똥을 싸기 시작했다.
‘…이거 전염병 같은데.’
지하 쪽이야 의료 개미들도 있고 환경도 쾌적하니 문제없지만, 똥물로 가득한 지상의 인간들은 다르다.
‘비가 그치면 전염병이 퍼질 거야.’
메디를 불러 전염 경로와 증상을 알아 오게 했다.
“폭우로 오염된 물에 노출되면서 감염된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물을 통해 퍼지는 수인성 전염병인 듯했고, 지상에 널린 똥과 빗물이 만나며 발생한 것 같았다.
증상은 발열과 설사였지만, 흔한 증세라고 방치했다간 피똥을 싸다 탈수 증세로 죽게 된다.
“약은 만들 수 있겠어?”
“능력을 사용해 치료는 가능하지만, 병명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약 만으론…….”
탈수 증세는 소금물만 써도 효과적인데, 메디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힌트를 줬다.
“특효약을 만들라는 게 아니야.”
나는 증상 개선을 위한 약과 수분을 보충해 주는 약을 만들어 지하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임상 실험을 진행하라고 했다.
“그 정도면 어렵진 않아요.”
며칠 후, 꿀벌족이 만들어 내는 천연 항생제인 프로폴리스가 들어간 특효약이 만들어졌다.
‘메디 녀석,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걸 만들어 냈어.’
나는 폭우가 그친 후를 대비해 특효약의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게 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