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전염병
폭우가 그쳤다.
여관에서 비를 피한 인간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갈 곳 없는 슬럼의 인간들은 내가 거두어 쓰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냥 필요해서 고용했을 뿐인데, 그들은 날 생명의 은인처럼 여겼다.
‘정말… 인간 부리기 좋은 세상이야.’
땅이 마르니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징집했다.
내 쪽에서도 메르디크 준남작이 찾아와 비굴한 태도를 보였지만, 어쨌든 징집에는 협조해야 했다.
강제징용이라 보수도 없었고, 밥도 챙겨 주지 않았다.
유리를 찾아가 한마디 했더니, 그가 곤란해했다.
“미안하다. 지금 식량값이 폭등해서 사정이 좋지 않아. 어떻게 식량 좀 저렴하게 납품해 줄 수 없겠나? 이렇게 부탁하지.”
‘이거 괜히 찾아왔네.’
유리가 사정사정해서 가격이 폭등한 식량을 기존 납품가에 내주기로 했다.
“6개월 할부로 지은 집이…….”
징용 대상이 아닌 인간 중에는 집이 파괴되어 망연자실한 이들도 많았다.
목재와 장작을 파는 상인들은 습기 먹은 나무를 말린다고 분주했고, 상인들도 젖은 상품을 살리려고 필사적이었다.
농사도 망했는지 인근 농가의 사람들이 자작령에 몰려와 비어 버린 슬럼을 채웠다.
‘슬럼 쪽 땅에 6층짜리 아파트를 세울 생각이었는데…….’
외곽지의 인간들이 무너진 집을 재건하려 했으나, 자재 품귀 현상에 부딪혀 절망했다.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어디가 슬럼이고 어디가 중심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자력으로 겨울을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인간들은 가족을 데리고 노예상을 찾았다.
“내 가족도 받아 주게.”
“아이들은 포기해. 너랑 부인은 특별히 받아 주는 거야.”
많은 인간이 노예가 되길 원했지만, 식량값이 폭등한 상황에서 마구잡이로 노예를 받았다간 유지 비용이 더 커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노예 상인들은 쓸 만한 인간만 골라서 받고 있었다.
‘노다지네.’
지금이야말로 주머니를 열어 인간을 쓸어 담을 때라고 생각했지만, 벨레삭 백작령에서 루리아와 존이 보내 준 노예들이 질도 좋고 값도 싸서 이미 자금 태반을 사용한 상황이었다.
메틴과 술집에 놀러 가 보니, 날 알아보지 못하는 종업원들이 늘어나 있었다.
나를 구직자로 착각한 신입이 다가와 말했다.
“미안, 여긴 꽉 찼어. 다른 술집을 알아봐. 북문 근처에 있는 술집에 아직 여유가 있을지도 몰라.”
티오가 없다며 말해 주는 신입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는데, 메틴은 내가 화났을까 봐 긴장한 눈치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가끔 짜증은 느껴도 인간일 때 느끼던 강렬한 감정과 욕구가 없었다.
가령 사랑, 분노, 질투와 같은 감정과 탐욕, 식욕, 수면욕, 성취욕, 생존욕 같은 욕구들 말이다.
모든 개미가 나 같은 건 아니다.
다른 개미들을 보면 상위종으로 진화할수록 점점 감정이 선명해졌다.
예를 들어 페르는 강해질수록 질투가 많아졌고, 나우피어는 겁이 많아졌다.
그들과 달리 나는 강해질수록 감정을 잃어 간다.
‘다크 워커 때만 해도 파괴 충동이 있었으니, 공허의 마력 때문일 거야.’
대부분의 개미는 집단 번영을 꿈꾸며 기여, 공헌, 희생을 특히나 좋아했는데, 희생과 거리가 먼 나는 이기심이 잔뜩 섞인 집단 번영이 목표라 일반적인 개미라 할 순 없다.
이는 전생의 기억과 흑마력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이러한 내 상태를 인간들은 모르니, 언제나 내 감정을 살피며 눈치를 봤다.
‘난 아무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신입의 실수를 뒤늦게 알아챈 데이지가 화들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다크 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데이지에게 끌려간 신입이 혼나는 동안 엘리샤가 나를 특실로 안내해 줬다.
“오랜만이에요. 프릴과 릴리는 잘 있나요?”
“음… 모르겠네.”
“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 줄 아는지, 씁쓸한 표정의 엘리샤.
“보고가 없는 걸 보면 살아 있어.”
그녀에게 내년쯤에 건강해진 프릴과 릴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줬고, 술집을 오가는 용병과 상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엘리샤 본인의 고충들을 들어 줬다.
“윤활제와 맥주 공급이 줄었다고?”
“네. 폭우로 공급망에 문제가 생겼나 봐요.”
물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영업이 힘든 상황.
매출도 덩달아 폭락하여 술집의 여인들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대로 겨울을 버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식품값이 계속 오르고 식구도 늘어서…….”
비어베어 놈들은 가혹한 겨울을 어떻게 버틸지 고심하는 그녀들을 대상으로 상납금을 더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
“마담들이 반발하긴 했지만…….”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만큼, 이번 상납금 인상은 술집들이 단합하여 반발했다고 한다.
“여긴 다크님이 찾아 주시니 비어베어 놈들도 조심하는 편이에요.”
이곳만 조용할 뿐.
비어베어 놈들의 패악은 날이 갈수록 악독해지고 있었다.
몇몇 마담들이 본보기로 희생됐고, 그 자리를 이은 신입 마담들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종업원을 굴리며 보수도 챙겨 주지 않는다고 했다.
“너무하네. 그럼 노예랑 다를 게 없잖아.”
“그렇긴 하죠.”
좀 더 악질인 마담들은 신용 대출까지 받게 하여 종업원들의 인생에 족쇄까지 채웠다.
그들도 살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지만, 이처럼 쥐어짜기만 하면 밤 시장은 발전하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 말곤 저희를 받아 줄 곳도 없어서…….”
술집의 관리는 비어베어의 간부 아론이 맡고 있다.
인신매매의 마르코와 정보의 첸은 내게 상납까지 하며 노력하는데, 놈과 무력 담당 웨인은 날 찾아온 적이 없다.
‘아직 누가 갑인지 모르고 있단 말이지.’
상납도 안 한 녀석이 내 영역에서 설치고 있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론 녀석, 저번부터 거슬렸는데. 이참에 없애 버릴까?”
화들짝 놀란 엘리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엘리샤는 그들 없이는 살 수 없다며 더럽더라도 잠깐만 참으면 된다고 했다.
“겨울만 넘기면…….”
엘리샤에게 들은 이야기는 며칠 후 정보기관의 수장 격인 베르딘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듣는 건 잘 정리된 정보지, 이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거리를 걸으며 용병 길드를 가 보거나, 식당과 술집에 들러 이들이 처한 현실을 직접 느꼈다.
즉, 시장 조사의 일환인 것이다.
“하여튼 아론 녀석, 맘에 안 들어.”
상납을 안 해서 그런 건 아니다.
조만간 술집 상권을 비롯한 암흑가를 먹으려 하는데, 쥐어 짜내는 듯한 양아치식 경영 방침이 맘에 들지 않았다.
‘술집을 키울 생각은커녕, 어떻게든 자기 주머니만 채우려는 놈이야. 이런 놈은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돼.’
그동안 술집의 경영 실태를 살펴보면, 술을 너무 못 팔기도 했고 답답한 점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인테리어부터 바꾸고 위생 부분도 개선하고 싶어. 애들 노동량도 줄여서 서비스 품질도 개선해야 해.’
저택에 돌아와 베르딘을 불렀다.
“윤활제랑 맥주 유통망을 장악할 수 있게 아론 일파 좀 어떻게 해 봐.”
“아론 일파요?”
“어때, 할 수 있겠어?”
“해 볼게요.”
자신감 가득한 베르딘.
그리고 다음 날, 아론의 주검이 냇가에서 발견됐다.
아론 일파는 무력을 담당하는 웨인 일당을 비난했고, 웨인이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자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사실, 베르딘이 관리하는 스파이들이 아론의 핵심 수하들을 매수하여 아론을 담근 것이었고, 비난의 화살을 웨인 쪽으로 돌려 진실을 은닉한 것이다.
“일 처리가 빨라. 깔끔하기도 하고.”
베르딘을 재평가한 나는 그를 차기 암흑가 수장으로 내정했다.
‘문제는 암흑가 보스라기엔 너무 약하다는 거지, 어리기도 하고…….’
한편, 흑기사 디아는 요즘 심심한지 둥지에서 시험적으로 만든 근력 운동 기구에 맛을 들였다.
그녀는 지하 헬스장에서 쇠질을 하며 근육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런 디아에게 핵심 인간 멤버들의 겨울 특훈을 부탁했다.
“잘됐군. 함께 쇠질할 동료가 필요했는데.”
“흠… 실전 훈련이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실전? 그보다 몸이 먼저다.”
훈련 커리큘럼이 걱정되긴 했지만, 전문가인 디아가 잘해 줄 거라 믿었다.
거리를 오갈 때마다 널브러진 인간을 쓸어 담고 싶었지만, 아직 폭우 때 수용한 슬럼 쪽 인간을 교육하느라 데려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빵과 물을 나눠 주게 하여 폐사를 막았고, 간혹 보이는 괜찮은 인간에겐 페로몬을 묻혀 뒀다.
‘일단 찜이라도 해 두자.’
한동안 나는 약국 사업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느라 바빴다.
예상대로 인간들 사이에선 설사병이 유행했다.
“문트리아, 잡화점 옆에 약국을 만들어.”
“약국이요?”
이곳 세상에는 약국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물론 약초꾼이 있어서 잡화점에서 약초를 팔기도 했고, 신관에게 치료를 받는 등 의학에 아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모두 상당한 돈이 들기 때문에 아파도 참다가 악화되어 슬럼에 버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잡화점에서 팔면 안 될까요?”
“음… 잡화점은 전문성이 너무 떨어져.”
예전에 잡화점에서 파는 약을 사 본 적 있던 나는 개미족이 생산하는 약이 같은 취급을 받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전문적인 약국을 만든 뒤, 메디에게 교육을 받은 약사를 파견할 계획이었다.
‘최소한의 응급조치 능력과 사람마다 증상에 맞게 약을 내줄 정도는 돼야 해.’
그렇게 영지 곳곳에 약초 빻는 도구 이미지와 개미 문양이 합쳐진 간판이 걸렸다.
나는 직원들에게 약국에서 필요한 약을 사 먹게 하여 그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문제가 있다면, 일반인들이 약국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들 신관들이 만든 포션을 사지, 저희가 생산한 약을 사진 않을 거예요.”
인간들은 개미 상단이 폭우로 젖은 식품을 약이라며 속여 판다고 생각했고, 아무도 사 주지 않으니 직원들에게 재고를 떠넘긴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나름 합리적인 가격 설정으로 폭리를 취하려 했는데, 이곳 인간들의 의심병을 얕봤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아직 개미 상단의 브랜드 파워도 약했거니와 예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평민들을 괴롭힌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약국 사업이 예상치 못한 난항을 겪어 살짝 아쉬웠지만, 루리아와 존이 폭락한 노예와 함께 대량의 자금을 보내 주고 있어 사업 몇 개쯤은 말아먹어도 상관없었다.
‘여관 사업도 그렇고 쉽지만은 않네.’
다행히도 최근 부유층이 여관을 찾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이는 여관에서 보호한 인간 중 심부름을 나왔다 미아가 된 하녀가 있었기 때문인데…….
한 명의 하녀가 저택으로 돌아가 여관의 청결함과 시설에 대한 걸 소문내자, 호기심 많은 도련님들이 찾아왔다.
이곳 부유층은 다양한 사교 활동을 벌이고 많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어 필연적 인싸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
놈들에겐 좋은 게 있으면 함께 공유하고, 싫은 녀석은 함께 조지는 습성이 있다.
그 습성 덕에 부유층 방문이 잦아지며 적자 폭이 크게 줄었다.
나는 그들의 니즈를 최대한 반영하여 서비스의 질과 단가를 차츰 올리게 했다.
‘내년이면 흑자 전환이 가능하겠어.’
여관 사업은 월리엄에게 맡겨도 문제없이 돌아갈 듯했으나, 세레나 교와 아레스 교가 본격적인 포교 활동에 들어가며 약국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