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각성 능력 (1)
“이게 메탈 워커가 만든 철검이에요.”
그들이 만든 철기는 일반적인 강철 무기보다 내구력이 좋았고, 녹슬지도 않았다.
‘정교해. 그리고 광물 자체를 강화한 것 같아.’
인간의 기술로 만들 수 없는 품질에 살짝 놀랐지만, 메탈 워커 한 마리가 생산할 수 있는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메탈 워커는 여러 가지 광물을 섞어 새로운 금속을 만들 수도 있어요.”
합금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활용도가 높아.’
내가 메탈 워커를 극찬하자 세크리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물리 내성은 쓸 만하지만, 움직임이 느려서 작업 능력이 떨어져요. 색적 능력도 부족해서 사냥 개미로도 쓸 수 없고요.”
광물을 캐고 고품질 장비와 보석 세공에 특화된 개미.
이들은 잡다한 광물을 먹었고, 미처 소화하지 못한 광물을 액체의 형태로 배설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메탈 워커는 단단한 광물로 가로막힌 부분을 뚫기 위해 투입됐는데, 그들의 배설물이 일대의 토양을 광물로 바꾸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세크리, 이게 무슨 말이야?”
“그게…….”
들어보니 지렁이가 토양을 비옥하게 가꾸듯 메탈 워커의 배설물에는 일대의 환경을 광물로 바꾸는 미생물이 함유된 듯했다.
‘먹어치운 광물의 두세 배를 창조해 낸다니.’
광부면서 광산을 만들어 내는 존재.
‘미쳤군.’
이들로 인해 원하는 광물의 지속적인 채광과 보석 세공이 가능해졌지만, 수가 적어 생산성이 부족했다.
“진화 조건은?”
“꾸준한 광물 흡입인 것 같아요.”
“빅 워커들을 광부로 투입하고, 영양에 광물 가루를 섞어 줘 봐.”
“메탈 워커를 늘리시게요? 그럼 광물이 더 늘어날 텐데….”
세크리는 광물이 늘어나는 걸 우려했으나, 연료 없이 광물을 자유롭게 조형할 수 있는 메탈 워커는 개미족의 문명을 끌어가 줄 귀한 존재였다.
“걱정하지 마. 메탈 워커가 늘면 반짝이는 광물부터 처분할 거니까.”
잉여 자원을 처분하고 인간을 사거나 고용한다.
한동안 이 전략으로 인간 세계에 개미교를 퍼트릴 예정이었다.
그렇게 개미교가 충분히 퍼지면, 개미족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건 뭐야?”
보고서를 읽어가던 중, 고블린 산맥 쪽의 피해 상황을 보게 됐다.
“그게…….”
하드 부대 네 개가 서쪽 영역의 오크 부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오그르트가 가끔 고블린 산맥으로 넘어와 깽판을 쳤다고 한다.
“하위 군체들의 피해가 막심해서 포스 님이 나서 주셨어요.”
포스가 출두하여 경고하자, 오그르트는 고블린 산맥까지 자신의 영역임을 주장하며 포스를 도발했다.
“포스 님도 고블린 산맥을 오그르트의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두 왕급 존재가 충돌하기 직전, 갑각왕이 난입하여 중재를 섰다.
“갑각왕이 고블린 산맥을 중립 지역이라 선포했어요.”
즉, 오그르트가 언제든 들쑤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갑각왕 덕에 충돌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그 후로 오그르트는 개미족과 오크의 전쟁에 껴서 하드 워커를 학살했고, 오크 부족과 트롤 부족을 이끌고 고블린 산맥을 침공해 왔다.
“오크들이 부족한 병력을 고블린으로 채워서 저희가 밀리는 형국이에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며 휴전에 들어갔지만, 봄이 오면 오그르트와의 일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스 님은 오그르트와의 일전을 대비해 수련에 들어갔어요.”
‘오그르트 녀석, 포스 님과 싸워 보고 싶은 건가?’
단지 힘을 겨루고 싶은 거라면 다행이지만, 목적이 포스의 제거라면…….
‘이쪽도 대비는 해 둬야겠지.’
내년 봄, 인간 세계에 풀어 둔 개미교라는 독이 풀리는 동안 서쪽 숲부터 평정하는 게 좋을 듯했다.
상대를 모르면 대비할 수 없다.
나는 세크리에게 관련 자료를 받아 훑어봤다.
고블린 산맥 너머의 서쪽 숲은 거대한 과일나무와 오크나무가 많은 비옥한 숲이었고, 개미족은 그곳을 오거 숲이라 불렀다.
자원도 풍부하고 하위 군체로 삼을 만한 개미 군체도 많다.
고블린과 말벌족을 포함한 다양한 몬스터가 각축전을 벌이는 곳이었고, 그중 오크와 트롤이 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며 생태계를 이루어야 할 놈들이 지금은 오그르트의 지배 아래 하나로 뭉쳐서 우리의 영역을 넘봤다.
‘트롤과 오그르트가 문제긴 해.’
고블린, 말벌족, 오크는 궁기병과 하드 워커로 충분히 밀어 버릴 수 있으나, 트롤을 상대하려면 3.5차 개미가 투입돼야 한다.
오그르트는 포스 홀로 잡을 수 없을 뿐더러, 개미족이 총력을 쏟아도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저번에 봤을 때 이동속도가 장난 아니었지.’
몬스터 도감을 통해 알아본 오거의 특징은 몬스터 중 힘으로는 최고였고,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를 제외하고는 생채기조차 남길 수 없는 가죽을 가졌다고 했다.
잡기만 하면 천금을 벌 수 있는 대박 몬스터.
거기다 오거의 특급 마석을 흡수하면 내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트롤 킹의 심장으로 급속 재생을 얻었으니.’
문제는 개미족의 힘만으로 오거의 처리는 힘들다는 건데…….
내겐 비장의 카드가 있다.
‘괴물을 상대하려면 괴물을 쓰는 게 좋겠지.’
마스터급 검사인 디아와 거미왕 나르본느.
둘을 잘 꼬드겨서 오그르트와 충돌시키면 될 듯했다.
“다크 님, 거미왕이… 남쪽 훈련소에 찾아왔어요.”
때마침 나르본느가 찾아왔다.
디아와 함께 남쪽 훈련소에 가 봤다.
나르본느는 비무장의 디아를 알아보곤 반가워했고, 나의 성장을 확인하곤 아쉬워했다.
“이상하네… 진화 조건을 충분히 갖춘 것 같은데.”
나르본느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만, 마신어를 쓴다.
페어리 워커가 통역을 해 주자, 디아가 나의 상태를 설명했다.
“신마력으로 그릇 자체를 키우고 있더군.”
“앗! 흡수 능력이라 그렇게 되는구나.”
나르본느는 측은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위로해 줬고, 디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상태를 진단했다.
“그릇의 한계점은 언제가 찾아오게 돼 있다. 그리고 녀석은 아직 자신의 잠재력을 모두 끌어내진 못했어.”
“하긴, 개미족의 능력도 걸음마 수준이니.”
나르본느와 디아의 토론이 한참이나 오가며 합의점을 찾더니, 내게 겨울 특훈 방향을 제시해 줬다.
그 첫 번째는 마력수를 흡수하여 신체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는 것.
두 번째는 나르본느, 디아와의 대련으로 전투 기술을 연마하는 것.
작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훈련 메뉴였지만, 여기서 한 가지가 추가됐다.
“포스를 찾아가라고요?”
“응, 포스도 왕급이니, 우리가 간과한 부분을 알려 줄지도 모르니까.”
세 번째는 포스에게서 조언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흠…….”
3차 진화종인 내 수명은 80년 정도.
4차 진화를 이루게 되면 약 400년의 수명을 얻게 되고, 숲의 왕급들과 동급이 되면 적수가 없어지니 객사할 일도 없다.
‘확실히 400년이란 수명은 매력적이지.’
둥지는 나 없이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 나는 부담 없이 겨울 특훈에 들어갔다.
갑주를 챙겨 입은 디아와의 대련은 힘 대 힘의 격돌이 된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 능력을 갖추게 된 나였지만, 그녀와의 대련에선 힘, 마력량, 지구력 등 모든 면에서 압도당했다.
“하… 하…….”
준비한 무기가 모두 부서지고 급속 재생을 발동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고갈되면 디아와의 대련이 끝났다.
대련 직후 그녀에게 물어봤다.
“함께 오그르트를 쳐 주실 수 없나요?”
디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거는 몬스터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존재다. 거기다 너희가 오그르트라 부르는 존재는 제국에서도 보기 드문 네임드 오거야. 그러니 내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나르본느에게도 물어보니 그녀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걘 너무 강해.”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지 않아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해된다.”
“방해돼.”
합을 맞추면 되지 않냐고 물었더니, 둘은 신마력의 특성상 합공이 어렵다고 했다.
‘이것도 사도들의 공통점인가?’
상처는 마력만 충분하면 금세 회복되지만, 누적된 피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 컨디션의 회복까지는 좀 더 휴식이 필요했다.
둘을 어떻게 설득할지는 천천히 고민해 보기로 한 나는 디아에게 둥지의 훈련소에서 가디언, 워커맨, 인간, 홉 고블린 등을 모아 제국 권법, 창법, 검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가르치는 걸 좋아했던 디아는 흔쾌히 수락하여 둥지로 가 줬다.
나는 마력수를 섭취해 가며 마력 회복 속도를 높였고, 신체 능력도 올렸다.
며칠 후, 컨디션을 회복한 나는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나르본느와 암살 대결을 펼쳤다.
기척을 숨기고 상대 기척을 찾는 훈련.
상대를 찾아 기습하고 쫓는 훈련.
상대의 기습에 대응하는 훈련.
잠시 동안 휴식 시간을 가질 때, 나르본느가 말했다.
“흑기사가 오그르트의 힘을 빼 주면, 그 뒤는 내가 처리할 수 있긴 해.”
“정말요?”
내가 살짝 들뜬 표정으로 묻자, 나르본느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문제는 오그르트가 제거된 후야.”
나르본느는 왕급들이 서로 싸우지 않는 이유를 말해줬다.
“우리 중 하나가 사라지면 숲에 큰 이변이 생길 거야.”
갑각왕의 존재는 인간과 몬스터의 대규모 충돌을 막아 내는 방파제였고, 오그르트는 숲에 봉인된 던전을 지키는 파수꾼임과 동시에 서쪽의 강적들을 막아 내는 존재였다.
“난 봉인된 던전과 호수를 지키고 있고, 남쪽 습지의 몬스터를 막아 내고 있어. 네우라 킹인 네론과 블레이더인 크라스도 마찬가지고…….”
잠자리 왕인 네론과 사마귀 왕인 크라스.
둘 또한 숲의 평화에 기여하고 있었고, 왕급과 준왕급 중 누구 하나가 없어지면 숲에 큰 혼란이 찾아온다고 했다.
“오그르트의 빈자리를 메울 정도로 강한 존재가 없으니, 아니꼬워도 참는 거야.”
나르본느가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오그르트를 대체할 존재가 있으면 녀석 따윈 없애도 상관없다는 거지!”
나르본느는 오그르트를 싫어했고, 예전부터 그를 대체할 왕급을 키워 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크라스와 네론도 내 지원이 없었다곤 말 못할 거야.”
갑각왕은 포스의 성장을 기대하는 듯했으나, 나르본느가 볼 때 포스의 한계는 명확했다.
“슈퍼 울트라 퀸이나 배틀 울트라 퀸이면 모를까… 마스터 가드 퀸의 체급으론 오거를 이기긴 힘들어.”
나르본느는 날 키워 그를 대체하고 싶어 했다.
“충분히 쉬었으니 시작하자!”
나르본느에게 탈탈 털려 멘탈이 박살 난 나는 며칠간 휴식을 취한 후, 수련 중인 포스를 찾았다.
“수련을 봐 달라고?”
“네.”
“개미족의 전투법은 매우 단순하지.”
개미의 힘, 외골격 방어, 더듬이 감각, 전투 페로몬, 그리고 산성액.
산성액은 진화를 거치며 퇴화해버렸다.
“힘과 외골격은 흑기사가 단련해 줬을 거고, 더듬이 감각은 거미왕이 단련해 준 것 같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던 포스가 말했다.
“페르에게 페로몬 능력을 배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보다 손쉽게 강해질 방법이 있긴 하지.”
편법은 좋아하지 않지만, 당장 내년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최대한 효율적인 길을 택하고 싶었다.
“단지 강해지고 싶을 뿐이라면 각성 능력을 얻는 게 제일 빨라.”
“각성 능력이면 일리아나와 제르다코가 가진…….”
여왕 혹은 장로가 가진다는 각성 능력.
페르가 말하길 모든 여왕과 장로들은 각성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단지 그걸 깨닫지 못할 뿐이지.”
“그럼 포스 님은 어떤가요?”
포스가 4차 진화를 통해 각성 능력을 얻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니, 내겐 각성 능력 따윈 필요 없다.”
“…….”
포스의 강함은 탁월한 감각과 마력 제어 능력에서 나오니, 일반적인 개미족의 강함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개미족의 각성 능력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케어와 페르를 찾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여왕들의 능력과 장로들의 능력은 발동 조건이 다르단다.”
둘은 빅 퀸이 되면서 저절로 능력을 깨달았기에 내게 길을 제시해 줄 수 없었다.
“일리아나와 제르다코에게 물어보거라.”
케어의 조언대로 일리아나와 제르다코에게 각성 능력에 관한 걸 물어봤다.
“군체를 위한다는 생각이 중요해! 그럼 모두의 힘이 내게 모이는 거야.”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인식하면 깨닫는다.”
둘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각성 능력의 명칭을 생각해보면 감이 왔다.
[군체 연결 : 집중의 시간]
[군체 연결 : 철벽의 시간]
개미족은 진화하거나 장로가 됐을 때 군체와의 연결이 긴밀해진다.
‘아마 그 감각과 연관이 있을 거야.’
하위 군체의 여왕 100마리.
즉, 100개의 다양한 능력이 있는 셈.
나는 예전에 세크리에게 그들의 능력을 알아 오게 했다.
대체로 쓸모없는 능력이 많았지만, 몇몇 능력은 군체 성장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들 중 한 여왕의 능력이 연결 강화라는 게 떠올랐다.
당시에는 무엇에 대한 연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보니 장로들의 각성을 보조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추측됐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