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블레이더 VS 하프 데몬 앤트
크라스는 팔이 두 쌍이다.
한 쌍은 허리에 찬 칼을 들기 위한 인간의 손이고, 나머지 한 쌍은 어깨에 붙은 사마귀 앞발이었다.
외골격 비중은 매우 적고, 초록색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외계인 같은 피부를 연상시켰다.
내 마안은 상대의 무력을 대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저놈은 진짜 위험했다.
‘압축된 기운… 왕급은 못 되지만, 왕급에 근접한 놈이야!’
왕급에게 팔 하나 정도는 가져가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녀석이니, 왕급에 못 미치는 내가 저놈을 상대했다간 팔이 아니라 목이 날아갈 확률이 높았다.
‘내 목적은 귀환이니, 굳이 싸울 필요는 없어.’
애초에 놈을 제거해 봐야 내게 득 될 건 없다.
‘놈도 준왕급, 남쪽 영역의 수호자니까.’
지성체인 나는 대화를 시도해 보려 했지만, 나르본느의 안배가 만만치 않았다.
“네놈이 이걸 노리고 있다는 건 거미왕에게 들어 알고 있다.”
크라스가 자신의 허리춤을 툭 치며 열쇠 하나를 보여 줬다.
“베르제붑 던전 열쇠의 반쪽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
크라스가 쌍칼을 빼 들며 말을 이었다.
“목숨이 아쉽지 않다면 가져가 보아라.”
난 베르제붑 던전이 뭔지 모른다.
저 열쇠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길 좀 비켜 줄 수 없을까요?”
그러나 놈이 착각을 해도 단단히 했나 보다.
“그런 수작은 내게 통하지 않으니, 덤비도록.”
놈이 비켜 줄 생각이 없으니 내가 빙 둘러 가려 했으나, 그가 자세를 낮추며 공격 자세를 갖췄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늦었다!”
‘망했다.’
잘못 움직였다간 머리가 떨어질 판이다.
내가 먼저 공격하지 않으니, 상대가 돌진기로 거리를 좁혀 오며 혈투가 시작됐다.
‘큭!’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아 마땅한 방어 수단이 없어, 놈의 검로를 읽고 피하는 데 주력했다.
‘빨라!’
아직 사마귀 팔을 쓰고 있지 않음에도 쾌속한 공격에 압도당했다.
근접전에서 불리하다고 판단한 내가 거리를 벌리려 하니, 접혀 있던 놈의 사마귀 앞발이 쏘아졌다.
‘어딜 노리는 거야?’
사마귀 낫은 순식간에 뒤로 길게 뻗어 나가더니, 물러나던 나의 등을 꿰뚫었다.
“컥!”
젠장…….
사마귀 앞발이 사냥감의 도주를 막기 위한 무기임을 너무 늦게 떠올렸다.
사마귀 앞발에 붙들린 이상, 나 역시 이제는 피할 수 없었다.
남은 건 놈과의 정면 승부뿐.
‘내가 정면 승부를 못할 줄 알아!’
싸움을 즐기지 않을 뿐.
엘리트의 성실함에 개미족의 습성까지 더해진 나는 지금까지 자기 단련에 소홀한 적이 없다.
일찍이 둥지 무력 2위가 됐어도, 더욱 강해지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노력해 왔다.
싸울 일이 없어 내가 약하다고 착각하는 개미들도 있으나, 무투파 개미들은 내 강함을 인정했다.
그런 나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는데.
‘말벌족과의 전쟁에서도, 데카이저와의 전투에서도… 난 전력이 아니었어!’
이 순간만큼은 기교를 모두 버리고서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승부다!’
마력을 한껏 주입한 주먹으로 놈의 검격에 맞섰다.
파워로는 밀리지 않았으나…….
문제는 공격 횟수.
놈의 공격을 절반조차 쳐 내지 못한 나는 맨몸으로 공격을 받아 내야 했다.
“이걸 버티다니.”
전신에 마기를 둘러 공격을 받아 냈으나,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실시간으로 혈선이 늘어 갔다.
내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지만,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놈도 한 방이 없다!’
놈도 나의 공허의 마력과 격돌하며 마력이 뭉텅이로 소모되고 있었다.
‘시간은 내 편이야!’
급속 재생으로 상처를 치료해 가며 놈의 마력을 전부 소멸시킨다면…….
‘육탄전으로 붙어 보자!’
잡몹인줄 알았던 내가 만만치 않자, 놈의 눈빛이 변했다.
“사과하지. 자격도 없는 놈이 베르제붑의 던전을 노리는 줄 알았다.”
대화로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럴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 제대로 상대해 주마.”
역시나…….
놈도 전력이 아니었다.
크라스의 검에 선명한 초록 기운이 씌워졌다.
‘마강기!’
촤악!
마기만으로 방어할 수 없는 검격이 내 몸을 훑었다.
“컥!”
급속 재생으로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지만, 재생에는 막대한 마력이 필요했고, 치명상을 재생하던 나는 순식간에 방전되고 말았다.
촤악!
결국, 전신을 난도질당한 나는 무릎을 꿇었다.
“쿨럭… 내가 졌다…….”
“좋은 승부였다.”
좋았겠지, 일방적으로 압도한 승부였을 테니까.
쓰러진 내 얼굴에선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는데…….’
놈이 마강기를 꺼낸 순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각성 능력을 온존하여 보험을 들었다.
‘강자에게 맞서 승리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은 못 되겠어.’
쓰러진 나는 공허의 심상을 되뇌며 생기를 지웠다.
즉, 죽은 척을 하며 마지막 기회를 노린 것이다.
“이건 맹독이군…….”
내가 흩뿌린 피를 맛보더니 날 먹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가 날 버리고 떠났다.
마지막 노림수.
그건 각성 능력으로 마력을 끌어와 지치고 방심한 놈을 치는 것이었는데, 초반에 제압하지 못하면 내가 끝장날 테니…….
사실 승률이 낮은 도박이었다.
‘갔나?’
한참이 지나 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각성 능력을 발동했다.
[군체 연결 : 마력 공유]
미리 동의를 받아 둔 3차 진화종들에서 마력을 끌어오자, 급속 재생이 활성화됐다.
‘휴… 목숨은 건졌군.’
몸은 회복했지만, 일시적으로 받은 타격이 너무 컸던지 정신이 혼미했다.
“잠깐 죽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르본느 년.
훈련을 명목으로 날 골로 보내려 하다니…….
그녀가 떠나며 한 말이 떠올랐다.
‘어쨌든 살아서 둥지로 돌아가 봐. 그럼 넌 확실히 준왕급에 준하는 존재가 돼 있을 테니까.’
준왕급을 꺾고 돌아가면 당연히 준왕급이 돼 있어야겠지.
그런데 어쩌나.
난 그녀의 의도대로 크라스과 격돌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하루만 쉬었다가 놈을 피해서 돌아가야겠어.’
간만에 땅을 팠고, 적당한 깊이에 몸을 눕혔다.
‘아늑하네.’
보통 일이 분만 자면 피로가 깔끔히 지워지는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재부팅에 시간이 걸렸다.
마치 소프트웨어가 업데이트되듯, 긴 잠에서 깨어난 나는 한동안 변화한 몸 상태를 확인했다.
‘마력도 늘었고… 몸도 가벼워졌어.’
더듬이 감각 쪽도 예민해진 것으로 보아 크라스와의 일전은 내게 큰 발전을 가져다 준 것 같았다.
‘그럼 슬슬 돌아가 볼까?’
그렇게 크라스가 없을 듯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가는 길에 거대한 붉은 열매를 발견했다.
마치 악마의 열매처럼 생긴 걸 까 보니, 속은 버터 같은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걸로 비누나 화장품을 만들어도 되겠어.’
기름 덩어리인 붉은 열매는 무시하고, 분수도 모르고 날 노린 자이언트 튤라와 자이언트 웹을 사냥해 배를 채웠다.
슬슬 이동속도를 높이려 할 때, 불길한 기운이 접근해 왔다.
‘크라스다!’
기척을 죽이고 숨었지만, 들키고 말았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하하… 이번에는 그냥 좀 보내 주면 안 되겠냐?”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냐?”
“포기고 뭐고, 난 그냥…….”
“베르제붑 던전에 그냥 보내 줄 순 없다. 정 가고 싶다면 나를 꺾어라!”
망했다.
놈은 벌써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거리를 내주면 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그러니 나는 놈의 사마귀 낫이 닿지 않도록 급히 물러났다.
‘절대 거리를 내주면 안 돼!’
잡히면 끝.
반대로 말해 잡히지만 않으면…….
‘할 만하다!’
거리를 벌린 나는 살짝 그러쥔 손을 손바닥으로 받쳤다.
동그랗게 만 구멍 사이로 마기를 응축한 뒤, 크라스를 향해 마력의 탄환을 쏘아냈다.
무형의 탄환이 공간을 가르며 날아가 접근해 오는 크라스를 견제했다.
“소용없다!”
맞아도 큰 타격은 없을 테지만, 마력을 뭉텅이로 가져가는 탄환이다.
놈도 허공에 칼을 휘두르더니, 마기로 이루어진 칼날을 쏘아 냈다.
공간을 가르며 날아온 무형의 칼날.
강렬한 살상력으로 장애물을 베어 넘겼지만, 그래 봤자 마력 덩어리라 공허의 마력을 흩뿌리는 것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이대로 소모전으로 끌고 간다!’
놈은 아직 나의 각성 능력을 모른다.
그러니, 놈이 유리하다고 생각되게끔 마력을 낭비하는 모습을 보여 놈도 마력을 소모하게끔 유도했다.
‘큭.’
전략은 좋았지만, 전력이 부족했다.
‘계산 착오다!’
아무리 견제해도 놈의 접근을 막아 내긴 힘들었다.
결국, 놈에게 접근을 허용하게 된 나는 근접 격투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끝내 주마!”
전력을 끌어낸 놈의 공격은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다.
‘저놈의 마강기!’
저번처럼 사마귀 낫에 걸리지만 않으면, 공격의 절반은 피해 낼 수 있다.
문제는 남은 절반은 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거다.
치명상만 간신히 피해 가며 나머지 공격을 급속 재생으로 커버했다.
놈도 지치는지 살짝 당황한 눈치였지만, 마강기 출력을 더욱 높여 돌진기로 내 몸을 상하로 양단해 버렸다.
촤악!
“죽었군.”
지금 급속 재생을 썼다간 놈에게 갈가리 썰릴 게 분명했기에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나는 허무에 떠도는 존재. 그 무엇도 아니니 무엇도 될 수 있나니…….’
공허의 마력으로 생기를 지워 시체로 위장하는 건 나의 특기다.
덕분에 놈을 두 번이나 속일 수 있었지만…….
한 번 속았던 놈이라 그런지 의심이 많았다.
“재생 불가의 치명상이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놈은 나의 팔과 다리를 잘라 버렸고, 몸에 칼을 박았다 뺐다를 반복했다.
“역시 죽었군.”
흑기사와 나르본느의 수련이 없었다면 난 분명 죽었을 것이다.
‘이게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둘과의 수련을 통해 사지가 잘리고 허리가 잘린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부분 재생을 터득해 둔 게 목숨을 살렸다.
‘갔나? 확실히 갔겠지? 더는 버티기 힘든데…….’
놈이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한 나는 각성 능력을 발동하여 주요 장기와 개미 엉덩이 부분만 집중적으로 재생시켰다.
팔다리 없이는 살 수 있어도, 개미 엉덩이 없이는 뒈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주요 장기와 개미 엉덩이를 늦지 않게 회복시켰다.
나머지 사지를 새것으로 뽑기에는 시간이 걸릴 듯하여 마기를 드릴처럼 사용해 땅속으로 파 들어갔다.
아늑한 흙더미에 묻힌 나는 숨을 죽인 채 회복을 꾀했다.
신체를 회복하고 컨디션을 복구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
사흘 동안 습격해 오는 곤충형 몬스터로 배를 채웠고, 그들의 피로 목을 축였다.
이번 전투에서도 많은 성취가 있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놈과 조우한 건 우연이 아니란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느껴져. 이 찝찝한 시선…….’
어딘가에서 나르본느가 지켜보고 있음을 감지했고, 몸 이곳저곳에 붙은 얇은 실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은 그녀가 만든 게 틀림없었다.
‘크라스는 내 머리를 노리지 않았어.’
목을 날리면 간단한 일을 그러지 않았다는 건…….
‘나르본느의 언질이 있었던 게 분명해.’
나르본느의 언질로 놈은 내 머리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날 죽이려 했다.
‘이게 나르본느가 생각한 실전 훈련인가?’
만약 이게 훈련이라면, 슬슬 나르본느가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르본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두 번까지는 속았을지 몰라도 크라스도 바보가 아니니 세 번은 없다.
‘…한 번 더 만나면 분명 죽을 거야.’
놈은 내 회복력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다음에는 분명, 지금 이상의 상처를 남길 테니.
‘그러니까, 다음이 마지막 코인이란 말이지…….’
무정한 나르본느의 실전 수련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놈을 꺾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하…….’
두 번이나 싸워 보며 놈의 전력과 전투 방식은 충분 파악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놈을 꺾긴 힘들어.’
그러니, 놈을 꺾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좋아, 이길 수 있겠어.’
그동안 축적된 데이터로 계산을 마쳤다.
남은 건 전장을 선택하는 것인데.
이번 전략에선 지형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이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한 그와 마주칠 수 있었다.
“대단하군. 허리가 잘리고도 살아날 줄이야.”
나는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력이 남아 있는 한, 난 죽지 않아.”
“그렇군. 이번에는 마석도 함께 썰어 주마!”
마지막 코인이 소모되어 더는 뒤가 없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크라스를 담았고, 놈의 공략을 시작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