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맹약
미노타우로스를 포함한 숲의 최강자들이 모이고, 그들 중 토너먼트에 참여할 열여섯 명을 선별하는 게 예선전이다.
“무력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야.”
본선 진출을 위해선 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을 치러야 했다.
‘퀘스트 형식인가?’
그렇다 보니, 지력과 조직력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갑각왕 혼자선 힘들다는 거군요.”
“맞아.”
디아에게 밀려 가려졌지만, 격분한 갑각왕의 무력은 오그르트에게 밀리지 않는다.
문제는 탐색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예전부터 숨겨 둔 물건을 찾으라는 시련이 많았단 말이지. 이번에도 그런 시련이 주어지면 갑각왕은 바로 탈락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왕급과 준왕급 전원이 최고 전력을 지원하여 본선에 올려야 한다.
그래야 맹약을 계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갑각왕이나 디아가 맹약만 계승해 준다면, 미노타우로스의 침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럼 전시 상태가 이어지던 개미족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고, 북과 남으로 뻗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의 공생이 가능하면 좋겠지만, 지금 개미족의 무력으론 놈들과 동등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
‘굽히고 들어갈 필요는 없어.’
맹약으로 시간만 충분히 벌 수 있으면 대 괴수용 무기를 개발해 쓸어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맹약을 계승해야 해.’
놈들의 발을 묶을 방법이 생겼고, 결전의 날은 내년의 여름.
“여름이요?”
“응.”
“그럼 나르본느와 크라스는 참석할 수 없지 않나요?”
“참석할 수 없지. 그러니 이번 여름에 이 문제부터 해결해 줬으면 해.”
나르본느가 꺼내고자 한 본론.
“내가 관리하는 던전의 심층부에 있는 암흑마창을 회수해 줘.”
“저번부터 저한테 가져가라고 하셨는데, 왜 꼭 저여야 하죠?”
“내가 관리하는 건 베르제붑의 던전이야.”
파리 마왕 바알.
그 휘하에 종군했다는 베르제붑.
던전이란 고대 인간이 만든 감옥이었고, 나르본느가 지키던 곳엔 베르제붑이 봉인돼 있다고 했다.
“베르제붑의 던전은 흑마력에 정통한 존재만이 출입할 수 있어.”
흑마력에 정통하지 못하면 베르제붑의 저주에 버티지 못하여 파리 몬스터 빅 플라이의 숙주가 된다.
“디아는 자신의 마력조차 제어하지 못해. 그런 녀석에게 암흑마창을 맡겼다간…….”
나르본느는 디아보다 날 더 신뢰했다.
“나르본느는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와는 상성이 좋지 못한 무기야. 그러니 너뿐이야!”
나르본느가 내게 용건을 밝힌 날.
네론과 크라스에게서 열쇠를 회수해 왔다.
베르제붑의 던전은 여름 기간에만 열리기 때문에 내년 여름 나르본느와 함께 베르제붑 던전을 방문하기로 했다.
봄이 왔지만, 왕급과 준왕급의 수련은 멈추지 않았다.
개미족의 빵빵한 지원 덕에 수련 효과가 극대화되며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왕급과 준왕급이 1년 후의 무투회를 대비하여 수련에 힘쓸 때, 충성심과 잠재력이 높은 인간, 홉 고블린, 오크를 따로 추려 추가적인 훈련을 받게끔 했다.
거기에 프릴, 릴리, 메르디아를 포함시켰다.
수련 중에도 미노타우로스의 소극적인 침공이 이어졌다.
궁기병, 오크 중장병, 돌격병을 차례로 내보내 무리 없이 격퇴했고, 가끔 열 마리가 넘어서면 왕급과 준왕급이 출격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포스도 가끔 출격하여 폭렬권으로 미노타우로스의 무릎을 부숴 버렸다.
금강 모드의 마력 성질이 포스와 같으니 폭렬권을 익힐 수 있을 듯하여 배워 보려 했지만, 쉽진 않았다.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야.’
못해도 수 년은 폭렬권에 매달려야 익힐 수 있을 듯했다.
여름이 되어가니, 나르본느와 크라스가 버드나무 숲으로 돌아갔고, 네론도 숲을 쏘다니느라 바빠졌다.
나르본느는 때가 되면 날 불러 주기로 했는데…….
“다크 님, 인간들이 침범해 왔어요!”
나르본느의 소식을 기다리던 내게 정찰 개미들이 인간들의 침공을 알려 왔다.
“얼마나 온 거야?”
“스물네 명이에요.”
스물네 명이면 정찰병이거나 용병.
‘길 잃은 화전민일지도 모르겠네.’
오크나무 숲에 진입한 무리가 둥지를 향해 접근했다.
외곽의 하위 군체가 자이언트 워커를 쏟아 냈지만, 예상외로 너무 쉽게 당했다.
‘어……?’
2차 진화종이라지만, 자이언트 워커는 절대 만만한 개미가 아니다.
‘단순한 용병이 아니야!’
성난 개미들이 출격하려는 걸 다급히 말렸다.
‘이건… 대형 벌집이다!’
개미 지배 능력으로 확인해 보니, 무장 정도와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선 자작령 수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딱 봐도 신분이 높아 보이는 자들이 여럿 섞여 있었다.
‘구성도 특이해.’
로브 속에 감춰진 복장을 확인해 보니 신관, 성기사, 마법사, 기사, 용병, 짐꾼 등이 섞여 있었다.
‘귀족도 섞여 있는 것 같아.’
건드리면 군대를 불러올 놈들이다.
인간과의 충돌은 시기상조라 판단한 나는 비상 대피령을 내렸다.
“둥지 출입구를 감춰라! 인간들에게 반응하지 마!”
개미 지배로 인간 무리에서 오가는 대화를 엿들어 봤다.
“갑각충들이 있는데, 이쪽 길밖에 없나?”
기사의 물음에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용병이 답했다.
“이 길이 목적지까지 제일 가까운 길입니다.”
“아무리 가깝다지만, 이런 위험한 길을…….”
“기사님께서 자극만 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질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확실한가?”
기사의 압박에 용병이 난감해하자 인솔자로 보이는 기사와 마법사가 한마디씩 했다.
“그만해라 벤자민, 뱅 파티는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미스릴급 용병들이다.”
“의뢰 성공률 100%인 뱅 파티라면 마도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지요.”
경지에 든 마법사를 마도사라 칭한다.
‘마력량도 상당한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마법사로 여긴 세 인간이 마도사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필라이 경. 갑각충은 처음 봐서…….”
벤자민이 마도사를 무시하며 상급자인 필라이에게 사과했다.
마도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벤자민의 무례를 가볍게 흘리곤 말을 이었다.
“그럴 수 있지요. 저도 갑각충을 볼 기회는 흔치 않아 한 마리 정도는 사냥해 보고 싶습니다만.”
마법사들이 탐욕 어린 시선으로 갑각충들을 바라보자, 용병들이 화들짝 놀랐다.
“마도사님들, 여기서 마법을 쓰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용병인 뱅의 말에 딱 봐도 다혈질로 보이는 백발 마도사가 말했다.
“탐색 마법으로 확인해 봤다. 네놈들이 말한 갑각왕이란 몬스터는 어디에도 없었지. 있는 건 이상할 정도로 강한 빅 워커와 자이언트 워커뿐이야.”
비쩍 마른 마도사가 한 마디 덧붙였다.
“루나의 달이 뜬 것도 아닌데, 고블린과 마수들도 이상할 정도로 많군요.”
마도사들이 갑각충을 향해 마법을 펼치려 하자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소년이 나섰다.
“갑각왕은 전설 속 몬스터가 아니다. 그는 왕국이 건립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몬스터이니. 마도사들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뱅의 말을 듣도록 하라.”
소년의 말에 마도사들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답했다.
“세자 저하의 명을 받듭니다.”
“시리우스, 페이론, 푸아그라. 밖에선 제논이라 불러 줬으면 한다.”
“예. 제논 저하.”
“저하도 빼게.”
“…….”
뱅 파티라 불리는 미스릴급 용병 4인조가 안내인을 맡고 있었고, 귀티 나는 소년이 이곳 클라우드 왕국의 왕세자란 사실을 알게 됐다.
‘왕세자가 왜 이런 곳에?’
바르퀴르 자작령을 거쳤다면 분명 소식을 전했을 텐데.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는 건가?’
왕세자가 숲에서 변고라도 당하면 일이 커진다.
나로선 그들이 되도록 무사히 돌아가 줬으면 했다.
‘목적이 뭔진 몰라도 개미들에게 주의를 줘야겠어.’
개미족 토벌이 목적이었다면 고블린을 잔뜩 보내 괴롭혀서 쫓아냈을 텐데.
부산물에 관심이 없는 걸 보아 토벌이 목적은 아닌 듯했다.
불청객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챈 갑각왕이 그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갑각왕이 그들과 충돌할까 봐 걱정되어 따라 다녔다.
“헤라클레스 님, 웬만해선 안 건드리는 게…….”
“걱정하지 마라, 저들이 숲을 해할 마음이 없다면 나 또한 나서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숲을 해한다는 기준이 참 모호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저놈들이 숲에서 죽기라도 하면, 개미족 나름의 대비도 필요할 테니까.’
수고롭지만 나는 그들이 숲에서 나갈 때까지 감시하기로 했다.
며칠간 일정 거리에서 그들을 주시하며 개미 지배로 대화를 엿들었다.
신관과 세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나르본느가 관리하는 베르제붑 던전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거긴 암살 계열의 몬스터가 많은데.’
오크나무 숲보다 배는 위험한 곳이라 걱정됐지만, 그동안 몬스터를 상대로 압도하는 기사들의 전력을 보면 세자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여섯 중 한 명은 크라스급이야.’
인간의 경지론 최상급 익스퍼트.
왕국의 마스터급 인사는 채 다섯이 되지 않고, 최상급 익스퍼트 역시 채 스무 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필라이 경이라 불리는 기사는 왕국에서도 이름난 기사로 추측됐다.
남쪽 외곽까지 따라붙다 관심을 잃었는지, 적당한 나무 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갑각왕.
“계속 따라갈 거냐?”
“네, 전 따라가 볼 생각이에요.”
“난 훈련장으로 돌아가 보겠다.”
갑각왕이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인간들은 거미족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 * *
“여기서부턴 버드나무 숲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특급 몬스터들은 마력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죠. 이곳에선 마법은 절대 쓰시면 안 됩니다.”
“신성 마법도 안 되는 건가?”
신관의 물음에 뱅이 답했다.
“이곳은 거미왕의 영역. 신성 마법도 예외 없이 포착될 겁니다. 그러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 있다면 저희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뱅의 경고에 마도사들은 흥미로워했고, 기사들은 긴장했다.
이동이 계속되니 심심했던 일행은 용병들에게 곧잘 질문을 던졌다.
“거미왕을 본 적이 있나?”
“저는 본 적이 없지만…….”
“그럼, 아무도 못 봤다는 거 아닌가?”
“…….”
그들의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자이언트 웹과 자이언트 튤라의 습격이 이어졌고, 용병, 기사, 성기사들이 일행을 지키느라 분투해야 했다.
한 차례 습격자들을 처리한 기사들이 적당한 공터를 찾아 휴식에 들어갔고, 경계를 서던 기사 필라이에게 온화하게 생긴 마도사가 다가갔다.
“필라이 경도 몬스터가 두려운가 보군요.”
“시리우스 님은 두렵지 않은가요?”
“마도사들에겐 미지란 두려움이 아닌 탐구심을 자극하지요.”
“모든 마도사가 시리우스 님 같진 않나 봅니다.”
“페이론과 푸아그라 말인가요? 뭐, 그들은 저와 달리 전투에 특화된 마도사라 그럴 겁니다.”
“그렇군요.”
각종 곤충형 몬스터의 퇴치, 이동, 휴식이 반복되며 인간들은 목적지인 베르제붑 던전에 도착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여기서 이틀만 쉬고, 던전 정화에 돌입하겠습니다.”
인간들이 베르제붑 던전 밖에서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입구를 찾을 때, 다크는 나르본느와 합류하여 인간들을 지켜봤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