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베르제붑 던전 (2)
“여기서 저기까지 가려면…….”
나르본느가 거미줄의 탄성을 이용해 활처럼 쏘아졌다.
그녀의 이동 경로에 걸린 자이언트 플라이들은 순식간에 거미 다리에 찢겨져 나갔다.
함께 움직이면 방해만 될 것 같아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조금 이따 봐요.”
“응.”
내게는 나르본느와 같은 광역 돌진기가 없다.
그저 소리 없이 움직이며 한 마리씩 암살했고, 나르본느가 거미줄로 만들어준 보자기에 마석을 챙겨 넣었다.
최하급 마석의 판매가는 8쿠퍼.
하급 마석은 80쿠퍼.
중급 마석이 8실버 정도 한다.
3.5차인 상급 마석부터는 기사급 인간이 목숨을 걸고 사냥해야 해서 매우 귀하다.
벨레삭 백작령에선 상급 마석이 3~5골드에 거래됐다.
준왕급 수준의 최상급 마석은 수도에서나 볼 수 있고, 경매에서 수십 골드를 호가했다.
‘여긴 최저 임금도 없고, 복지도 없단 말이지.’
최저 임금이 없어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열악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 통상적으로 주어지는 임금이 있다.
무력을 갖추지 못한 일반인이 2실버 정도의 월급을 받았고, 성공한 부장급 인간이 5실버 정도 받는다.
이런 세상에서 80쿠퍼란 적은 돈이 아니었다.
던전에서 창을 휘두를 때마다 80쿠퍼가 생겼고, 나르본느는 돌진기 한방에 8실버는 버는 듯했다.
이곳에선 무력이 돈과 직결되니…….
‘돈 벌기 참 쉬운 세상이야.’
나와 나르본느가 인간 무리와 마주치지 않게 돌아다니자 지하 6층의 몬스터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하루 정도 열심히 사냥하여 인간들을 지하 7층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사냥해 마석을 챙기며 인간들의 사냥감을 덜어 줬다.
지하 10층에도 분수 딸린 공터가 있었고, 인간들은 그곳에서 푹 쉴 수 있었다.
“몇 층까지 있어요?”
“16층까지 있어.”
“파수꾼은 16층에 있는 건가요?”
“맞아, 거기에 암흑마창이 꽂혀 있는 비밀의 방도 있지.”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 인간들이 지하 11층에 돌입했다.
11층부터는 커스맨이란 인간형 파리가 걸어 다녔다.
파리 털로 뒤덮인 옷을 부분적으로 입고 있는 커스맨.
꼬리뼈 쪽에는 파리의 배가 있다.
암수 양쪽 다 있으며 체형에서 차이가 났다.
몸만 보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머리가 통째로 파리여서 인간들의 눈에는 징그러울 터였다.
개미족인 내겐 인간과 커스맨 둘 다 사냥하기 좋은 영양으로 느껴질 뿐.
영양 가치는 인간이 더 높지만, 마석을 주는 커스맨도 나쁘지 않다.
커스맨의 공격 방식은 자이언트 플라이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산성액, 저주의 마력, 그리고 촉수.
특히 암컷의 촉수에 당하면 주입된 알이 숙주의 마력을 흡수하여 부화한 뒤 살을 파먹으며 급속하게 성장한다.
즉, 알을 주입당하면 빅 플라이 애벌레 수십 마리의 숙주가 되는 셈.
개미족에겐 산성 내성이 있으니, 촉수 공격만 외골격으로 막아내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3차 진화종과 같은 급으로 보기엔 너무 약한데?’
커스맨은 워커맨처럼 힘이 강한 것도 아니며 급소 부위를 단단하게 감싼 형태도 아니기에, 오크나무 숲과 버드나무 숲을 헤치고 온 인간들에겐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그냥 중급 마석이 쏟아지는 맛집이네.’
인간들은 11층부터 사냥에 가속도를 붙여 빠르게 치고 나갔다.
12, 13, 14층을 거쳐 15층 휴식 공간에 도달한 인간 무리.
그곳에서 보스전을 준비하며 휴식을 취했다.
“다음 층에 파수꾼인 커스 킹이 있을 겁니다. 커스 킹은 매우 빠르니 기사님들이 포위해서 처리해 주셔야 해요.”
“그 녀석만 처리하면 던전이 안정되는 건가?”
“바로 안정되는 건 아니고, 서서히 안정될 겁니다.”
뱅과 필라이가 나눈 이야기를 들은 벤자민.
그가 풍기는 배신의 마력이 짙어졌다.
“난 쟤만 살려 주면 되는 거야?”
벤자민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느낀 나르본느가 물었고, 왕세자를 제외한 다른 인간이 어찌 돼도 군대가 몰려올 것 같진 않았다.
“네, 저 소년만 신경 써 주면 돼요.”
인간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던전 밖으로 나와 버드나무 숲에 진출해 있는 정찰 개미들을 만났다.
“페스트에게 서쪽 전황과 클라우드 왕실 정보 좀 가져오라고 해.”
둥지에 정보를 요청한 나는 다시금 던전으로 들어가 인간들을 주시했다.
휴식을 마친 인간들은 16층에 진입하여 마기를 피워 올린 커스맨 무리와 조우했다.
커스맨의 마기는 물리력이 형편없는 대신, 접촉 대상의 마력을 오염시켰다.
기사와 마법사가 있었다면 곤란한 상황이었겠지만, 신관들이 오염된 마력을 정화할 수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커스맨들을 처리하며 이동한 그들의 앞에 커다란 석문이 나타났다.
힘으로는 쉽게 열 수 없는 석문이었지만 일행을 감지했는지, 새겨진 문자들이 빛나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활짝 열리며 통로가 나왔다.
“다크, 빨리 가야해.”
하지만 조심히 추적하느라 거리가 꽤 떨어져 있던 상황.
인간들이 모두 들어가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이런.’
닫히는 문을 향해 급히 이동했지만, 통과하긴 힘들어 보였다.
“나르본느, 먼저 가 줘요!”
나르본느가 거미줄을 뿜어내며 쾌속히 날아갔다.
쿵.
나르본느는 안으로 진입했지만, 나는 늦고 말았다.
“거기서 기다려. 문에 마력이 충전되면 다시 열릴 거니까.”
“알겠어요. 나르본느는 소년만 안 죽게 신경 써줘요.”
“걱정하지 마. 소년은 내가 마킹 해 뒀어.”
문밖에서 대기하게 된 나는 감각이 이어진 개미들을 통해 그들의 상황을 살폈다.
통로 끝에 도달한 인간 무리.
그곳에는 대전이 나왔다.
권좌에는 새하얀 피부의 여성체 몬스터가 앉아 인간들을 내려다봤고, 그 아래로 60여 마리의 커스맨이 포진한 채 권좌의 몬스터를 지키는 듯했다.
‘저게 파수꾼인가?’
파수꾼으로 보이는 여성체 몬스터는 주황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지녔고, 눈동자가 파리 같았다.
‘파리족의 4차 진화종이야.’
개미족과 마찬가지로 꼬리뼈 쪽과 연결된 파리 엉덩이가 있었으며, 외골격은 페르처럼 극소 부위만 주황색 털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또한 등에는 산란관으로 보이는 촉수가 네 개나 있었다.
파수꾼과 마주한 인간들이 당황했고, 용병들을 향해 따지듯 외쳤다.
“킹이 아니잖아!”
“파수꾼이 커스 퀸이라니… 예상 밖의 상황이군요.”
“헬리오스님의 시련이군요.”
나르본느 또한 인상을 구기며 내가 붙여 둔 개미를 통해 상황을 설명해줬다.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커스 퀸이야. 저건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한데… 어쩌지?”
내게도 그녀가 붙여 둔 거미가 있어 소통에는 문제없었다.
“용병들과 달리 왕세자 쪽에선 긴장한 정도지, 두려워하는 것 같진 않아요.”
변수라면 벤자민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것뿐.
“상황 봐서 왕세자만 빼돌려 줘요.”
“알겠어.”
왕세자는 후방으로 빠졌고, 기사인 메르손과 물을 다루는 시리우스가 왕세자의 호위를 맡았다.
짐꾼 넷과 호위를 제외한 인원 모두가 선봉으로 나섰다.
벤자민과 왕세자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니, 나로서는 신경 쓸 게 없어졌다.
편한 마음으로 인간들의 커스 퀸 레이드를 관전했다.
인간 측 전력은 최상급 기사 한 명, 상급 기사 다섯 명, 화염, 번개 마도사가 각각 한 명, 헬리오스의 신관과 아레스의 성기사가 각각 세 명씩 있었다.
거기에 더해 미스릴급 용병 파티인 뱅 일행 넷.
이들도 기사급 실력자지만, 왕실 기사보단 한 수 아래로 중급 기사 정도 됐다.
“헬리오스시여, 사악한 존재로부터 저들을 지켜 주소서. 퓨리 스킨!”
“아레스시여, 저들에게 어둠에 맞설 힘을 주소서. 홀리 스킨!”
신관과 성기사의 저주 저항 버프가 발동되며 전투가 시작됐다.
권좌의 커스 퀸은 움직이지 않았고, 마기를 피워 올린 커스맨들이 나섰다.
기사 다섯, 성기사 셋, 용병 넷까지.
총 열두 명의 인원이 전위로 커스맨 60마리와 격돌했고, 신관 셋과 두 마도사가 후위에서 영창을 시작했다.
수적인 우위에 있다지만 커스맨은 인간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열두 마리의 커스맨이 썰리고, 여덟 마리 정도 타죽자 커스 퀸의 촉수가 움직였다.
커스 퀸에게서 뻗어 나간 촉수 네 개가 각각 널부러진 커스맨의 사체에 박히자, 화염 마법사인 페이론이 영창을 중지하곤 외쳤다.
“커스 퀸부터 막아!”
필라이가 커스맨을 뚫고서 촉수 하나를 끊어 냈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다른 커스맨에게 발이 묶여 촉수가 사체에 무언가 주입하는 걸 막지 못했다.
“커스맨은 무시해!”
페이론이 또 한 번 외쳤고, 신관들도 촉수를 향해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신관들이 쏟아 낸 정화의 불꽃은 커스맨들이 몸을 던져 막아 내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비켜라! 내가 처리하겠다! 번개여, 나의 부름에 응해 적을 섬멸하라! 라이트닝!”
푸아그라가 커스 퀸을 향해 번개 마법을 쐈으나, 커스 퀸은 고속 이동으로 피해 버렸다.
‘빠르잖아?’
커스 퀸은 내가 놀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선보였고, 인간들은 고속으로 이동하는 커스 퀸을 경계하느라 촉수에 대한 대응이 지체됐다.
“늦었다, 피해!”
뭔가 주입된 커스맨의 시체가 부풀어 올랐다.
펑!
부푼 살점이 터지며 빅 플라이 수십 마리를 쏟아 냈다.
빅 플라이 수십 정도면 1분 안에 정리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수십이 수백이 되기까지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쳤군.’
커스 퀸의 촉수는 조금 전에 태어난 빅 플라이에게 꽂혔다.
그러자 부풀어 오르는 빅 플라이.
커스 퀸은 빅 플라이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수십 마리로 늘릴 수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빅 플라이 무한 복제가 시작됐다.
나는 나르본느가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이유를 알게 됐고, 인간들은 쏟아지는 빅 플라이 떼를 상대하며 커스 퀸을 쫓았다.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 커스 퀸의 속도가 워낙에 빠르다 보니, 기사들이 대처하기란 불가능했고, 신관들의 정화의 불꽃 또한 맞질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번개보단 빠를 순 없다.
“적을 섬멸하라! 라이트닝!”
번쩍.
푸아그라의 전격 마법에 당한 커스 퀸이 추락했다.
기회라 여긴 기사들과 성기사들이 빅 플라이를 걷어 내며 커스 퀸에게 다가갈 때, 세 신관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저 녀석, 목표가 신관이었던 건가?’
난전 중에 신관을 벤 건 벤자민이었다.
후위에 있던 메르손이 나서서 벤자민과 격전을 벌였고, 신관의 지원을 잃은 전방이 차츰 무너져 갔다.
용병들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소극적으로 변했고, 마도사들도 마력을 소진했는지 조금씩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성기사와 기사들은 목숨을 내던지며 커스 퀸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커스 퀸의 마강기는 왕급이라고 보기에는 물리력이 매우 약했다.
‘공격력과 방어력은 형편없어.’
속도만 조금 빠를 뿐, 무력으로 치면 준왕급에 미치지 못했다.
즉, 네론의 하위 호환이라 할 수 있었는데.
성기사들이 촉수를 하나씩 맡아 커스 퀸의 발을 묶었고, 기사들이 몸을 던져가며 커스 퀸을 압박했다.
벤자민의 목과 커스 퀸의 목이 떨어지며 인간들이 승리를 쟁취했지만, 피해가 컸던지 그들은 누구도 승리의 함성을 지르지 못한 채 절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커스 퀸의 마력에 당한 건가?’
한참 후에 그들이 죽어 가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직접적인 지원을 고려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