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암흑마창 (2)
인간들의 적대감이 생각보다 강했다.
‘보자마자 공격이라니.’
메르손과 성기사 키논.
둘은 힘을 중시하는 검사여서 검속이 느린 편이었다.
‘창을 쓸 필요도 없겠어.’
손바닥에 있는 외골격 덕분에 두 검을 상처 없이 잡아챌 수 있었다.
검을 빼려고 용을 쓰는 둘.
그래 봤자 힘 차이가 커서 검을 놓고 거리를 벌리는 수밖에 없을 텐데.
‘검을 놓는 선택지는 없나?’
경지에 든 기사들이라 그런지, 검을 끝까지 놓으려 하지 않았다.
흑마력과 신성력은 상극의 기운이지만, 공허의 마력은 모든 종류의 마력을 포용한다.
‘꺼림칙하지만, 흡수할 순 있겠어.’
오염된 둘의 기운이 폭주할 듯하여 마강기로 흡수한 후, 가슴을 밀어 쳤다.
퍽!
개미의 힘과 오거의 힘을 발동하고 있지 않아, 몇 발짝 물러나는 수준으로 그칠 줄 알았는데…….
‘이런.’
그동안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하다 보니, 인간의 나약함을 깜빡하고 말았다.
멀찍이 날아간 두 인간이 벽에 충돌하며 피를 토했다.
내상이 깊었지만, 갑옷이 충격을 일정 부분 완화해 줬는지 즉사는 면했다.
숨소리와 마력 상태를 보니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거기다 조금 전 오염된 마력을 모두 흡수해 줬으니, 가만히 두면 알아서 회복하지 않을까?
‘인간이라 힘드려나?’
전생에 인간이긴 했지만, 마력을 품고 있는 이곳의 인간과는 근본이 달라 기준을 잡기 어려웠다.
용병들이 나르본느를 알아보며 인간들이 엎드려 절해 왔다.
제발 관심 갖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 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제스처였는데, 제논과 짐꾼들의 마력 상태가 심각하여 지나칠 수 없었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몰라 긴장하며 접근하자, 제논이 일어나 최상급 마석을 건넸다.
“이걸 줄 테니, 물러가 주지 않겠나?”
제논과는 말이 통할 것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건, 보답이야.”
최상급 마석을 챙긴 나는 제논의 팔을 잡아챘다.
마강기로 오염된 마력을 흡수해주려 한 건데, 필라이가 공격해 왔다.
‘성급하기는!’
필라이는 최상급 익스퍼트의 실력자.
온전한 상태였다면 쉽사리 제압할 수 없으나, 지금의 그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너도 느리네.”
나는 필라이의 검격을 가볍게 흘리곤 팔을 잡아 꺾어 버렸다.
제논과 필라이가 내게 잡혀 있는 상황.
마도사들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는 마강기로 둘의 마력을 모두 흡수한 후 풀어 줬다.
풀려난 제논과 필라이가 어리둥절해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몸이 한결 가벼워졌어.”
필라이도 자신이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더는 공격해 오지 않았고, 나는 그들을 지나쳐 짐꾼 넷의 마력을 흡수해 줬다.
남은 건 마도사 셋.
“내가 무섭나?”
“허허. 이거 마도사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시리우스, 페이론, 푸아그라.
한 명씩 다가와 내게 몸을 맡겼다.
“부탁드립니다.”
용병 넷을 마지막으로 인간들의 오염된 마력을 모두 제거해 줬다.
그들은 내게 도움을 받은 게 믿기지 않았는지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잊고 있는 메르손과 키논을 가리키며 말했다.
“포션이라도 먹이지 그래? 부족하면 내 걸 줘도 돼.”
마력수를 확보한 개미족의 약물은 매우 발달해 있다.
사교위에 담아 둔 최상급 치유 포션을 뱉어 줄 수도 있지만, 몬스터의 토사물이라 생각할 테니 관두기로 했다.
필라이와 짐꾼이 급히 움직여 쓰러진 둘을 챙길 때, 시리우스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개미족인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여 주자 놀란 눈치였다.
“데몬 앤트 다크. 숲에선 포식왕이라 불리고 있지.”
“데몬 앤트… 그렇군요.”
“여기 있으면 회복이 힘들 거야. 15층으로 데려다 주겠다. 따라와라.”
인간들을 휴식 공간인 15층에 데려다 주자 제논이 물었다.
“두 분은 왜 저희를 도와준 거죠?”
“…….”
네가 죽으면 군대가 몰려올 수 있으니 살려서 보내는 것이라고 말해 주면 내가 군대를 두려워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아니면 갑각왕처럼 평화 지향이라 여길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난 군대가 두려운 것도, 평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서쪽 몬스터들과 숲의 패권을 다투는 중이라, 시기상 인간과의 마찰을 원치 않을 뿐.
거기다 전쟁 외의 수단으로 인간을 정복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는데.
내 계획에 제논이 더해지면 나쁘지 않을 듯했다.
‘왕세자 정도면 이용 가치도 크지.’
바르퀴르 자작이 된 유리처럼 서로 협업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왕국 장악이 쉬워질 텐데.
서자라는 이유로 궁지에 몰려있던 유리와 달리 제논은 왕국의 적통이기도 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그러니 이쪽 사정을 최대한 감출 생각으로 최상급 마석을 보여 주며 적당히 둘러 댔다.
“보답이야.”
나름 괜찮은 핑계라 생각했는데, 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합리적인 핑계가 아니었나 보다.
나와 나르본느가 떠나자, 그들 사이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정말 마석 때문에 우릴 도운 걸까?”
제논의 독백에 시리우스, 페이론, 푸아그라가 한마디씩 했다.
“상대는 특급 몬스터입니다. 최상급 마석 하나로 도와 주진 않을 테죠.”
“저희에게 호의적이라기보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이더군요. 아무래도 온전한 상태의 우릴 가지고 놀려는 게 아닌지…….”
“놈이 어떻게 우릴 치료했는지가 의문입니다. 만약 마력을 흡수한 것이라면, 거미왕 이상의 괴물일 겁니다.”
필라이는 마도사들의 이야기에 끼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고, 용병들은 마도사와 달리 얼빠진 이야기를 나눴다.
“뱅, 어때? 눈만 가리면 예쁠 것 같지 않냐?”
“제정신이냐? 진.”
“뭐야? 넌 거미왕 쪽이야? 하긴 그쪽도 무난하게 예쁘지.”
“미친놈.”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며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우리의 의도가 어떻든 급이 맞지 않으니, 회복에 집중할 것.
지하 16층, 커스 퀸이 앉아 있던 의자에 도착한 나는 슬슬 집중해야 해서 개미들과 연결된 감각을 차단했다.
“이건 내가 보관하고 있는 열쇠야.”
나르본느가 의자 뒤편에 있는 구멍에 열쇠를 끼워 돌렸다.
그르르릉―
그러자 벽면 한쪽이 열리며 문이 나타났다.
“여기서 필요한 게 크라스와 네론이 보관하던 두 열쇠지.”
나르본느는 내게 열쇠 하나를 건넸고, 우린 문 양쪽 구멍에 열쇠를 끼워 돌려야 했다.
문이 열리며 보물 창고가 나왔다.
“미안, 지저분하지?”
그곳에는 금은보화와 마석들이 가득했다.
거미족인 나르본느에겐 먹지 못하는 잡동사니에 불과한 듯했으나, 자본주의 사회를 겪어 본 내게는 다르게 보였다.
‘이게 다 얼마야?’
잘만 활용하면 왕국을 세우고도 남을 자금.
이런 걸 썩히고 있었다니…….
‘거지인 줄 알았는데. 재벌이었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나는 나르본느에게 선심 쓰듯 말했다.
“제가 치워 드릴까요?”
“그러면 고맙지만, 이걸 어떻게 치우게?”
“디아의 아공간 주머니를 빌려 와서 여러 번 오가야죠.”
“오… 그런 수가 있었구나.”
나르본느는 예전에 바구니로 금은보화를 치우려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힘들어서 포기했는데, 디아의 주머니라면 가능할 것 같아.”
그녀의 말을 통해 버드나무 숲 어딘가에 금은보화가 버려지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됐다.
“나르본느가 주로 쓰는 쓰레기장 위치도 알려 줘요.”
“그건 왜?”
“한 번 정리해 드릴게요.”
“쓰레기장을? 괜찮은데…….”
“정리해 드릴게요!”
“음… 귀찮지 않아?”
“전 쓰레기 청소를 좋아해요.”
“…….”
나를 보는 눈빛이 살짝 이상해졌지만, 어찌 됐든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르본느에게서 던전 보물에 대한 권리를 받아 냈다.
추후 나르본느가 주로 애용하는 쓰레기장 몇 군데를 알려 주기로 했는데, 그곳도 마석과 보물이 가득할 터.
이곳의 보물이 자금화가 이루어지면, 지금의 사업 규모가 더욱 커지며 시장 장악에도 가속도가 붙을 텐데.
‘보석과 돈을 한 번에 풀면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없어.’
문트리아를 통해 각지에 보석점을 열어 왕국의 보석 시장을 독점하게 하면…….
‘보석 처분이 수월해질 거야.’
암흑마창 회수라는 목적을 이루기 전임에도 그녀를 따라온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보석들을 뚫고 도착한 지하 공터.
그곳엔 사슬에 감겨 있는 흑색 봉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저게 암흑마창인가요?”
“맞아.”
나르본느가 말하길 암흑마창은 혼돈의 권능을 품고 있어 사용자에게 흡수 능력과 파괴적인 마강기를 제공한다고 한다.
“권능을 품고 있는 무기는 세계에 몇 자루 되지 않아. 암흑마창은 그중 하나지.”
혼돈의 사도가 쓰면 권능을 극대화해 주는 전용 무기라 할 수 있지만…….
“암흑마창은 너의 부족한 공격력을 채워 줄 거야.”
내게도 꼭 필요한 기능을 갖춘 무기였다.
‘사용자에게 파괴적인 마강기를 제공한다니.’
부러지지 않는 미스릴 무기와는 비교되지 않는 스펙.
그런 무기가 방치돼 있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나의 의문에 나르본느가 친절이 답해 줬다.
“아무도 저곳에서 창을 뽑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야.”
다들 힘이 부족해서 그랬나 싶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닐 것 같아 자세히 물어봤다.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창을 잡으면 마력이 빨려서 힘을 쓸 수 없어. 뭐, 개미족의 힘이라면 마력 없이도 충분히 뽑을 수 있다곤 생각하는데 쉽진 않을 거야.”
나르본느의 재촉에 꽂혀 있던 암흑마창을 잡게 됐다.
순간, 격이 높은 존재를 마주한 듯한 강렬한 압박이 느껴졌다.
‘창이… 마력으로 날 짓누르려 하고 있어.’
창에 담긴 마력이 상당한 듯했으나, 나 또한 모든 세포를 마력 창고로 쓰며 마력량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마력수로 키워 온 내 마력량은 왕급 중에서도 톱클래스다!’
거기다 공허의 마력은 상대가 쏟아 내는 마력을 흡수해 버리기 때문에 압박감은 금세 지워졌다.
이상하게도 창의 마력이 흔들리며 당황이란 감정을 내비쳤다.
‘이 녀석, 의지가 있는 건가?’
세계에 몇 없는 무구라더니, 의지라는 게 있는 듯했다.
마력 압박을 포기한 창이 나의 마력을 흡수해 가려 했고, 나의 흡수 능력과 상충하여 서로의 마력을 당기는 줄다리기 상황이 벌어졌다.
‘내 쪽이 더 우세해!’
흡입력에선 내가 조금 더 우세한 듯하여 마력이 조금씩 흘러 들어왔다.
“어때? 뽑을 수 있겠어?”
걱정 가득한 나르본느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고, 힘껏 창을 뽑았다.
‘엇.’
그 누구도 뽑지 못한 창이라 해서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손쉽게 뽑혀 살짝 당황했다.
창도 당황스러운지 요상한 마력을 풍겼고, 나르본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 뽑아 버렸네…….”
“네?”
“난, 그냥… 네 수련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데려온 건데. 그거 왕급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조작된 복권에서 나올 수 없는 1등이 나온 상황인가?
휘둘러보니 무게가 묵직한 게 마음에 들었다.
그때, 창이 뽑힌 곳에서 흑마력이 넘쳐흐르더니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저건 뭐죠?”
“나도 모르겠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아요?”
“괜찮아. 혹시 몰라 검도 챙겨 왔으니까.”
흑마력이 뭉쳐 만들어 낸 건 주요 부위를 검은 털로 가린 인간형 파리 몬스터.
‘커스 퀸보다 인간에 가까워.’
붉은색의 파리 눈과 짧은 더듬이.
파리 엉덩이와 찢긴 날개.
온전치 못한 상태로 보였음에도 기세가 남다른 걸 보아 5차 진화종에 해당하는 파리족이 아닌가 싶었다.
“크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풀려났다!”
광소를 터트린 정체불명의 존재와 마주한 나와 나르본느.
놈에게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나는 사슬에 감긴 암흑마창을 힘껏 휘둘렀고, 나르본느 또한 쌍검으로 검격을 퍼부었다.
놈은 가진 기세와 달리 창격에 머리가 터졌고, 나르본느의 검격에 전신이 썰렸다.
“뭐야? 약하잖아?”
갈기갈기 찢긴 놈의 육체와 달리 마력이 온전한 걸 보아…….
“아직 이에요!”
흩어진 마력이 다시금 뭉쳐 형상을 이루었다.
“데몬 주제에 감히 바알군 휘하의 하이 데몬인 날 건드리다니!”
격분한 듯한 그의 외침은 강렬한 압박을 동반했지만, 흔들리는 놈의 마력을 보면 데미지를 전혀 입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불멸의 존재 베르제붑. 날 깨운 공로를 봐서 한 번은 봐주겠다만… 두 번은 없다!”
놈이 일대의 마력을 빨아들여 급속히 강해지고 있음을 직감한 나는 몸을 날리며 외쳤다.
“나르본느, 놈이 회복하기 전에 끝내야 해요!”
“알았어!”
나와 나르본느는 문답 무용으로 놈의 몸뚱이를 쳐부쉈다.
“잠…잠깐만! 난 베르…제붑… 꺼내 준… 보답…….”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간다.
분명 살려 주면 어쩌고저쩌고하다가 뒤통수치겠지.
거기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거부감은…….
‘마치 천적을 만난 기분이야.’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