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안식의 권능
다크가 의식을 잃었음에도 암흑마창에서 뻗어 나온 마강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를 경계하던 암흑마창은 뭉치려는 검은 연기를 타격했다.
그렇게 여러 장소에서 연기가 뭉치려다 흩어지길 반복하던 중 나르본느가 깨어났다.
“흐잇. 예전 암흑신전의 인간들과 재회할 뻔했어.”
나르본느는 더듬이가 없는 대신 이마에 붉은 보석 여섯 개가 있다.
“다크는 쓰러졌고, 암흑마창은 폭주 중이고… 무슨 상황이지?”
그녀는 보조 눈의 뛰어난 안력을 활용해 일대를 감지했고, 손을 높이 뻗어 쥐었다 펴며 바람의 흐름을 읽었다.
암흑마창의 마강기가 검은 연기를 쫓고 있음을 감지한 나르본느.
“뭐야? 아직 살아 있잖아!”
나르본느는 마창의 공격에 휩쓸릴 것 같은 다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안심하고 푹 쉬고 있어.”
속삭이듯 말한 나르본느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다크를 지켰다.
이어진 마강기와 연기의 추격전.
빨아들인 마력이 부족해졌는지 마강기가 빠르게 줄며 연기에 대한 견제가 약해졌다.
“디아와 마찬가지로 소모가 빨라.”
마창의 공간 장악력이 떨어지자 숨어 있던 빅 플라이 몇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사슬을 챙겼다.
그러곤 곧장 마창을 향해 날아가는 빅 플라이.
화들짝 놀란 듯한 암흑마창이 마강기로 사슬을 쳐내려 했지만, 사슬에 닿은 마강기가 튕겨 났고, 순식간에 사슬이 펼쳐져 마창을 휘감아 버렸다.
그러자 사방으로 뻗어 있던 마강기 역시 힘을 잃고 창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방해자가 사라진 검은 연기가 뭉치며 베르제붑이 주먹만 한 크기로 부활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소용없음을 알라!”
광오한 그의 말을 듣는 건 나르본느 뿐.
“풋.”
“웃어? 뭐, 좋다. 그 웃음을 절망으로 바꾸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지.”
베르제붑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외쳤다.
“무한 증식!”
그가 마력을 증폭시켜 본신의 힘을 되찾아 가자, 한 뼘 크기에서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르본느가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 아무런 견제도 하지 않자, 베르제붑이 눈살을 찌푸렸다.
“포기한 건가? 재미없군. 좀 더 발악해 보지 그래?”
“포기? 발악? 미안한데… 넌 이미 죽었어.”
“푸하하하! 중간계에서 날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정말이야?”
“그렇다! 신이 아닌 이상 날… 큭, 컥컥…….”
베르제붑이 쓰러지며 고통스러워했다.
“근원이, 내 근원이… 설마 네놈은…….”
베르제붑은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죽었고,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소멸했다는 듯 장내를 채우고 있던 흑마력이 붉은 입자가 되어 눈처럼 내렸다.
“뭐야? 너도 별수 없잖아?”
다크는 그녀의 마력이 맹독과도 같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단순한 맹독이 아니었다.
마신으로부터 나르본느에게 부여된 권능은 안식.
“이게 죽기 직전인 상대에게만 발동되는 거라 까다롭단 말이지…….”
상대의 격에 따라 주입해야 하는 마력량과 발동에 필요한 시간이 달라지지만, 특정 조건 몇 가지만 더 충족되면 그 어떤 존재에게도 작용하는 즉사의 권능이었다.
“그러게 넌 이미 죽어 있다니까.”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던 나르본느가 독백했다.
“베르제붑의 죽음으로 라크와의 맹약이 깨졌어.”
수백 년 전, 어느 인간과 맺은 맹약으로 인해 던전을 지켜야 했던 그녀는 자신이 자유로워졌음을 깨달았다.
“라크, 네놈이 예언한 대로야…….”
* * *
개미족은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꿈을 꿨다.
칠흑으로 덮인 세계.
그곳에선 어둠의 밀도로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는데, 열두 명의 존재가 나를 보며 의아해했다.
그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네놈은 무엇이냐?]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것이군.]
또 하나의 존재가 내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그 또한 대답을 듣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알아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키틀레야와는 무슨 관계지?]
나는 이들이 왜 내게 질문을 던지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들은 내게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그렇게 나에 대해 탐색하던 12인이 흐릿해지며 칠흑이 걷혔다.
끔벅끔벅.
‘이상한 꿈이야.’
꿈에서 깬 줄 알았는데, 현실적이지 않은 풍경을 보아 여전히 꿈속인 것 같았다.
‘저게 뭐지?’
거미줄로 짜인 해먹 위에서 낯선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나.
허공에서 붉은 결정이 생성되어 떨어지는 광경은 몽환적이었다.
‘예쁘네.’
대각선 위에는 나르본느가 나와 마찬가지로 해먹 위에 누워 있었고, 아래는 붉은 결정으로 덮여 있었다.
‘이건 마석인가? 마석 부스러기가 눈처럼 내리는 꿈이라니.’
전생이었다면 복권을 사고 싶게 만드는 꿈이었다.
‘슬슬 일어나야겠지.’
저주에 노출돼 죽기 직전까지 갔던 나르본느를 떠올린 나는 잠에서 깨기 위해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잠이 안 깬다.
거기다 이전에 없던 감각 하나가 추가됐다.
‘마창이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어.’
암흑마창과 감정을 공유하게 된 듯했다.
‘잘못하면 마창의 감정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겠는데….’
공허의 마력을 각성한 나는 어떠한 감정에 노출되더라도 금세 평정을 되찾는다.
그러니 마창의 감정에 휘둘릴 일은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감각도 새로워.’
더듬이 감각과 개미 지배의 감각 또한 크게 확장되어 예전 보다 훨씬 섬세해졌다.
마력량 또한 폭증했는지, 당장이라도 왕급들과 대련을 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꿈속의 난 현실과 달리 상당히 강한걸.’
개미 지배의 감각이 15층에 뿌려둔 개미들에게 닿았고, 휴식을 마친 인간들이 14층에 진입하려는 걸 볼 수 있었다.
“꿈이 좀 생생하네.”
“음냐.”
대각선 위에 있던 나르본느가 내게로 추락했다.
개미 지배로 분산된 집중력 때문에 행동이 늦어졌지만,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 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퍽!
나는 문제없이 잘 받아 줬으나, 나르본느가 몸을 비틀며 팔꿈치로 나의 복부를 찍었다.
“컥!”
외골격이 없는 부위, 거기다 힘을 주지 않고 있어 상당히 아팠다.
‘아프잖아!’
꿈인데 왜 아픈 걸까? 아프다는 걸 느낀다고 착각한 건가?
사색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안겨 있던 나르본느가 나의 사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잠꼬대가 심했고, 왕급의 잠꼬대는 위협적이다.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긴 나는 그녀를 해먹 밖으로 내던졌다.
털썩.
나르본느를 내던지니 내게 평화가 찾아왔고, 사고 끝에 이것이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럼 이 마석들은 전부…….”
공허의 마력으로도 가라앉히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대박이다.”
마석 가루에 파묻힌 나르본느를 깨우고, 묻혀 있던 암흑마창을 회수했다.
‘베르제붑 녀석은 이걸 봉마의 사슬이라 했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대상의 마력을 밖으로 분출하지 못하게 막는 물건이었다.
사슬에 묶인 암흑마창은 자신을 써달라며 보챘지만, 베르제붑을 상대하며 써본 마창에는 지대한 문제가 있었다.
‘이건 자기 마음대로 격발되는 방아쇠 없는 총이나 마찬가지야.’
일반적인 무기라면 내 의지로 마강기를 조절하고 위력과 특성을 맞출 수 있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놈의 마창은 자기 마음대로 마강기를 휘두르니, 전략적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을 불러온다.
‘피아 식별이 가능한지도 의심스러워.’
그러므로 실전에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큰 무기였다.
다만 완전히 다룰 수 있게 되면 나의 무력을 한 층 더 강화해 줄 무기다.
‘상성도 좋단 말이지.’
상황에 따른 대응 루틴을 인지시킬 수만 있으면…….
‘굉장할 거야.’
평소에 마력을 듬뿍 주입해 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도 있을 듯하고, 대량 살상에도 쓸 수 있을 것 같고.
다양한 사용법을 떠올리며 마창을 어떻게 길들일지 고민했다.
‘돌아가서 차근차근 연구해 봐야지.’
파수꾼이 죽고, 마창도 회수했고, 베르제붑까지 죽어 버린 던전.
마력 밀도가 차츰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한동안 몬스터가 생성되지 않을 거야. 내년에 와도 이번처럼 많지 않을 거고.”
나르본느는 10년을 주기로 던전을 청소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 내년 무투회에 함께 갈 수 있겠네요.”
나르본느는 고개를 끄덕이곤 볼을 긁적였다.
“고마워. 덕분에 자유로워졌어.”
감사하고 싶은 건 내 쪽이다.
예상치 못한 던전의 보물에 더해 베르제붑이 죽으며 나타난 마석 가루까지.
‘최하급 마석을 갈아서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마석은 불이 붙는 인화물이기도 하지만, 이걸 장작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
인간들은 최하급 마석을 가루 내서 비료와 섞어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품질 미달의 깨진 마석이 쓰이는 거지, 온전한 마석이 쓰이진 않았다.
개미족은 마석과 마력수를 섞어 각종 약물, 비료, 촉진제를 개발했고, 최근에는 여왕들의 산란량을 늘리고 진화 촉진에도 쓰이고 있어 마석이 부족해졌다.
때마침 확보한 양질의 마석 가루.
품질로만 따지면 상급 수준의 마석이었다.
이 정도면 3.5차 개미의 수련용 영약 조제에 쓰일 터였다.
보물 창고의 물자는 여름이 가기 전에 옮겨 두기로 하고, 나와 나르본느는 15층에서 잠시간 휴식을 취한 후 오거 숲에 마련한 훈련소에 가 있기로 했다.
그곳에서 수련을 쌓으며 밀릴 듯한 전선을 도우려 했는데…….
이동 중 잔류한 저주에 노출된 인간들이 몬스터도 없는 지하 8층에서 뻗어 버린 게 감지됐다.
‘신관이 없으니 자력으로 빠져나갈 수 없구나.’
던전 밖까지 데려다 주기로 한 나는 죽어 가는 인간들을 또 한 번 구해 줬고, 그들을 던전 밖까지 안내했다.
통로를 걷던 중 시리우스는 나와 나르본느의 무기에 관심을 가졌다.
“거미왕께선 좋은 보구를 가지고 있군요.”
“보는 눈이 있구나. 암흑마창보단 못하지만, 내 것도 나쁘지 않지.”
나르본느는 마신어로 말했지만, 시리우스는 표정만으로 그녀가 기뻐하는 걸 눈치챘다.
밖에 나온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 생각한 제논에게 고개를 저었다.
“목숨값.”
“…….”
목숨값으론 그들이 사용한 고가의 마법 아이템들과 가진 마석 전부를 받았다.
“왜 저희를 도와줬는지 모르겠지만,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논은 필라이와 마도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가의 문장이 들어간 명패를 줬는데, 이는 클라우드 왕국에서 반역을 제외한 어떠한 죄를 지어도 한 번은 사면 받을 수 있는 면죄부라고 했다.
“거미왕과 포식왕을 함께 볼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걸로 저흰 평생 술값 걱정이 없어졌어요.”
“아레스 님께서 보내 주신 분께 피해가 가선 안 되겠지요.”
용병들은 개미족 토벌 의뢰를 받지 않는 것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했고, 아레스의 성기사는 나와 나르본느에 대한 걸 알리지 않음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떠나가는 인간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르본느가 중얼거렸다.
“숲에서 빠져나가는 건 힘들 텐데.”
인간들이 숲에 들어올 때야 몬스터들이 그들의 존재를 몰라 쉬웠을 테지만, 돌아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배는 힘들다.
신관을 잃고 전위가 줄며 인간들의 전력은 현저히 약해진 상황이니,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동안 인간을 미행하기로 했다.
“먼저 가 계실래요?”
“아냐, 나도 따라갈래.”
나르본느가 함께 미행해 준다니, 감사한 일이다.
“그럼, 몬스터 좀 몰아줄 수 있어요?”
“살려서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
살려서 보내긴 할 건데, 편하게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보여 주려고요.”
“뭘?”
왕이 될지도 모르는 제논이 남부 대산림을 얕봐선 내게 좋지 못하다.
“숲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제대로 알려 줄 생각이에요.”
나는 그들의 여정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