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개미기공 (1)
왕이 될지도 모르는 제논이 숲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열심히 굴렸다.
가는 곳마다 몬스터를 몰아줬고, 위기 때는 개미족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지원했다.
인간들은 실전 속에서 다들 조금씩 성장하게 됐는데, 제논의 성장은 눈부셨다.
‘나이가 어리니 성장도 빠르네.’
마지막 피날레로 정리해야 할 떠돌이 고블린 수천을 몰아주며 그걸 개미족의 돌격 부대로 박살 내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러곤 하이 페어리를 보내 인간들에게 말했다.
“숲을 헤매는 인간들이여, 여긴 우리 개미족의 영역. 너희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하이 페어리가 무해하게 생긴 것과 더불어 꿀벌족의 도움을 받아 온 제논은 망설임 없이 협상을 시도했다.
“저희를 살려 주신다면 목숨값을 치르겠습니다.”
“목숨값?”
제논 일행은 주 무기와 속옷을 제외한 모든 걸 내주며 선처를 바랐고, 하이 페어리는 흔쾌히 승낙했다.
“대가를 받았으니, 너희의 영역까지 안내해 주지.”
무일푼인 거지꼴이 된 제논 일행.
혹여나 돈을 빌리려 할지도 모르니, 개미 상단의 총관인 문트리아에게 제논 일행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며 잘 보여 둘 것을 명했다.
“휴, 힘들었다.”
“넌 시키기만 했잖아? 일은 내가 다 한 것 같은데.”
하긴, 나는 계획만 짜서 나르본느와 정찰 개미들에게 전했을 뿐.
“수고했어요. 이제 저희도 서쪽 훈련장으로 가죠.”
“또 지루한 훈련이나 하려고?”
“지루하지만 어쩌겠어요. 베르제붑과의 전투에서 얻은 걸 복기해야죠.”
얻은 걸 정리해야 할 때인데, 인간들에게 숲의 저력을 보여 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이것도 투자니까.’
저번 전투를 통해 나르본느도 확실히 강해졌으나, 수련이 싫었던 그녀는 극구 부인했다.
“난 얻은 게 없는데…….”
“그럼 옆에서 놀고 계세요.”
나와 나르본느가 서쪽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베르제붑 던전이 닫힌 상황.
‘던전의 보물은 내년에 옮겨야겠네.’
마석을 미리 꺼내지 않은 건 아쉬웠지만, 보석들은 가져와도 당장에 처분할 수 없다.
‘보석상도 열어야 하고, 컨셉은 어떻게 잡을지도 결정해야 해.’
이곳의 평민들은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곤 모두 가난하다.
‘골드급 이상의 용병들은 돈을 좀 만지는 것 같긴 한데.’
어쨌든 보석은 사치품인 만큼, 귀족을 상대로 팔아야 한다.
개미족이 특기로 하는 대량 생산과 박리다매로 밀어붙였다간 망할 게 뻔했다.
‘고급화 전략도 쉬운 게 아니야.’
무조건 고급 재료를 쓴다고 맛집이라고 평가받는 게 아니듯, 뛰어난 세공 실력과 희소성을 갖췄다고 프리미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곳 귀족들의 욕구를 자극할 만한 다양한 요소를 충족시켜야 개미표 보석이 최고의 브랜드가 되어 시장을 장악할 수 있을 텐데.
‘보석상은 메르디아를 귀족 영애로 데뷔시킨 후에 진행하는 게 좋겠어.’
귀족들의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 메르디아를 활용할 생각이었다.
글 선생이었던 메르디아는 무기술 습득이 느려 아직 둥지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고, 교양 수업을 비롯한 피부와 몸매 관리도 꾸준히 받고 있다.
골드급 수준으로 만들어 써먹을 거라 보석상 진출은 2년 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급할 건 없어.’
문트리아가 식량, 무기, 방어구, 의복, 여관, 약국 관련 사업을 넓히고 있고, 디그파가 수도까지 이어지는 지하 고속도로를 만드는 중이다.
‘수도까지만 연결하면 나머진 지상 물류망으로 물건을 풀 수 있어.’
현재 문트리아가 벌어들인 돈으로 베르딘이 암흑가 세력인 비어베어를 공략 중이고, 메틴은 개미 용병단을 창설하여 규모를 키우고 있었다.
비앙카의 고아원 또한 수를 늘려 왕국 전역으로 뻗어 가고 있으니.
노예 시장에도 진출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자금이 부족했다.
‘보석상이 자리 잡으면 노예 시장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이곳 노예들의 관리 방식은 매우 낙후돼 있고, 쓰임도 한정적이다.
인간이 소보다 싸게 취급될 정도니까.
‘조금만 다듬고 포장만 잘해도 훨씬 나아질 텐데, 이곳의 인간들은 도통 투자란 개념이 없단 말이지.’
팔리지 않는 노예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은데, 감옥 같은 곳에 가두어 섞이는 것도 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아,’
개선점이 많은 만큼 자금만 받쳐 주면 노예 시장을 장악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했다.
‘왕국 장악은 궤도에 올라 있으니, 신경 쓸 건 없을 것 같고.’
문제라면 숲의 패권이 안정되지 않아 개미족 영역이 불안하단 것이었다.
‘키클롭스야 자기들 영역에서 밭이나 갈고 있어 괜찮아.’
문제는 미노타우로스였다.
놈들의 침공만 없으면 좀 더 발전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고, 개체 수가 충분히 늘면 숲의 패권 또한 어렵지 않게 가져올 수 있을 텐데.
‘무투회에서 맹약만 계승하면 돼.’
무투회에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니, 이번 가을과 겨울은 수련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왜 자꾸 우울하지? 배도 고픈 것 같고, 뭔가 자꾸 죽이고 싶어지네.’
수련 중에 잡념들이 치솟아 도저히 집중이 안 됐다.
‘저놈의 마창 때문인가?’
오가는 감정을 차단할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암흑마창에 대한 걸 연구했다.
암흑마창은 전투와 살생을 좋아했고, 생물을 괴롭히는 것으로 쾌락을 느꼈다.
마석을 부숨으로써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고, 내가 주입한 마력도 곧잘 받아먹었다.
‘마력을 먹이니 좀 낫네.’
사슬을 풀어 주면 마강기로 주변 생물을 괴롭혔다.
‘일단 적아는 구분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안심하고 있었는데, 한 번은 내가 사슬을 바닥에 내려 두니 놈이 날 덮쳤다.
‘이 새끼가!’
다행히 사슬을 손에 쥐니 놈이 얌전해졌다.
‘이게 놈의 고삐구나.’
마창이 내뿜는 마강기는 디아의 폭주만큼 강력하나, 마력 소모가 극심하여 내가 가진 마력으도 감당할 수 없었다.
물론 각성 능력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으나, 각성 능력은 하루 한 번밖에 쓸 수 없어 비장의 수로 남겨 둬야 했다.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적이 없으면 소모량을 보충할 수 없어.’
마창의 자체적인 흡수 능력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베르제붑과의 전투가 특수했을 뿐, 그냥 내버려 둬도 빠르게 마력이 고갈돼서 빌빌거리니 크게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도저히 못 쓰겠네. 그냥 사슬로 묶어 둬야겠어.’
마강기를 쓰지 못하더라도 육중한 무게의 마창은 미스릴보다 좋은 무기였고, 평소에 마력을 충분히 먹여 두면 수련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마력수나 흡수해 볼까?’
베르제붑과의 전투 이후 마력량, 신체 능력, 연산력이 급증해서 그런지 이젠 마력수를 섭취해도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이제 다른 방식을 찾아봐야겠어.’
내가 성장한 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왕급과 준왕급들도 개미족의 지원과 미노타우로스와의 격전으로 성장해 있었다.
“강해졌군. 한번 붙어 보겠나?”
공동의 목표가 있어서인지 왕급끼리는 상당히 친해진 상황이었고, 개인 수련이 막힐 때면 대련을 청해 오곤 했다.
나도 수련이 막힌 상황이라 갑각왕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죠.”
전력으로 부딪히면 서로 무사할 수 없을 것 같아, 서로 간 제약을 걸고서 대련했다.
나는 각성 능력을 쓰지 않기로 했고, 갑각왕도 감정을 가라앉히고서 싸웠다.
갑각왕과의 대련은 비등하게 이어졌고, 무승부로 끝났다.
‘이젠 갑각왕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상위권의 강자인 갑각왕과 디아는 이길 수 있을 듯한데, 이상하게도 하위권인 포스와 나르본느에겐 처참히 발렸다.
‘나르본느와는 상성이 좋지 않아.’
힘 대 힘이 부딪히는 승부라면 밀리지 않을 텐데, 나르본느는 속도 중심의 암살자여서 회피와 기습으로 나를 공략했다.
나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나르본느야 그렇다 치지만, 포스에게 패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힘도 스피드도 내가 더 위야. 그런데… 왜지?’
나르본느조차 대련에선 포스에게 한 수 접어 줬는데.
‘내 창술이 모두 읽히고 있어!’
포스는 따로 무투술 같은 것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적절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기술을 파훼했다.
그러니 디아와 갑각왕 같은 압도적인 방어력으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포스에게 밑천이 털린 후 폭렬권의 제물이 되고 만다.
나르본느와 포스 덕에 내게 부족한 걸 깨달았다.
‘방어력과 전투 센스가 부족해.’
부족한 방어력을 메우기 위해 미스릴 갑옷이라도 만들어 입을까 싶었지만, 왕급의 승부에선 갑옷은 걸리적거리기만 했고, 전투 센스라는 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이게… 나르본느가 말한 성장 한계란 건가?’
단단한 벽에 부딪혀 나아갈 곳을 잃은 기분.
나르본느가 수련을 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벽이란 넘어서기 위해 존재할 뿐.
그렇다고 무작정 노력한다고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며칠간 휴식을 취할 겸 간부들을 불렀다.
“다 모인 건 오랜만이네.”
나의 직속 간부는 총 열다섯 마리.
여덟 마리가 비전투 간부고, 일곱 마리가 무장이라 할 수 있는 무투파 개미들이다.
비전투 간부로는.
워커맨, 행정의 세크리.
메딕 앤트, 의료의 메디.
하이 페어리, 농업의 머쉬파.
워커맨, 사육의 마고트.
치프 앤트, 영양의 쿠쿠.
하이 페어리, 공사의 디그파.
하이 페어리, 보수의 리페파.
워커맨, 설비의 엔지가 있다.
무장으론 가디언인 피어레스, 제르피아, 헤르피아가 있고, 에어 앤트 페스트, 액시드 거너 포룸, 하드 워커 베슬리…….
마지막으로 톱밥 생산처가 엔지의 목공소로 넘어가며 소속이 붕 떠버린 소드 앤트 나우피어가 있었다.
사냥으로 바쁘던 무장들도 겨울이 오면 각자의 스승 아래서 수련의 시간을 가졌다.
피어레스, 제르피아, 헤르피아는 갑각왕의 밑에서 훈련을 받았고, 페스트는 네론에게서, 나우피어는 크라스에게서 배웠다.
액시드 거너인 포룸은 체내의 화학 물질을 이용하는 총잡이다.
따로 스승이 없는 그는 홀로 강해지기 위해 힘썼는데, 그가 강해지는 방법으론 마력을 키우는 것과 체내에 필요로 하는 물질을 축적 및 농축하고 다양한 합성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탈것인 베슬리는 기동력과 방어력만 키우면 돼서 울트라인 포메온의 도움을 받았다.
세크리 산하로는 비서 팀, 하녀 팀, 정보 팀, 행정 팀, 교육 팀이 있고, 메디 산하로도 의료 팀, 생산 팀, 연구 팀으로 나뉘어 일의 효율을 극대화했다.
다른 비전투 간부들도 다양한 팀을 구성해 둥지 발전에 기여 했고, 수련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희도 수련은 하고 있지만, 무투파들에 비해 3.5차의 발생률이 현저히 낮아요.”
부하들의 성장이 더뎌 불만인 세크리.
“1차 진화종은 알 수 없었지만, 상위종으로 갈수록 개체 값 차이가 상당히 컸어요.”
메디는 같은 먹이로 성장한 개미라도 거쳐 온 삶에 따라 신체 스펙이 벌어지며 잠재력 차이가 크다는 걸 말해 줬다.
“3.5차가 될 수 있는 개미는 저희 간부급을 제외하면 극소수에 불과해요.”
‘잠재력이라.’
포스와 자주 대련을 하다 보니 그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다.
그는 태생부터 강한 개미가 아니었다고 한다.
단지, 공주 시절부터 강함에 집착한 포스는 홀로 수련을 쌓다 보니 육체의 한계를 깨닫게 됐고, 호흡에 집중하여 감각을 다듬었다고 한다.
나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나, 포스는 기감을 나만큼 일찍 깨우치지 못하여 호흡 단계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빅 퀸이 된 포스는 다른 여왕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마력량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는데…….
즉, 포스는 개미족이 진화하며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걸 심도 있게 파고든 개미였고, 그로 인해 압도적인 마력 제어력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다른 녀석이 무심코 넘기는 것들을 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게 내 강함의 비결이지….’
4차 진화를 이루며 성장이 더뎌진 포스였지만, 아직 성장은 멈추지 않았고 착실하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 포스가 내게 해준 조언들이 떠오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