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개미기공 (2)
‘벽을 넘지 못하는 건 그동안 내가 쌓아 온 발판이 빈약했기 때문이야.’
나아갈 게 아니라 되돌아봐야 할 때라는 걸 직감한 나는 간부들을 물리고 그동안 성장해 온 과정을 되짚어 봤다.
스몰 워커는 기문 호흡을 통해 마력을 쌓는다.
1차 진화종이 되면 마석과 기감이 생기는데, 나는 스몰 워커 때 기감을 터득하며 운기를 통한 마력 불리기에 들어갔다.
진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얻는 걸 앞당겨 익히면서 나는 뭔가가 부실한 채로 다음 스텝을 밟게 됐다.
마치 선행 학습에 매몰되어 생겨난 구멍들을 무시한 채 나아가고 있는 상황.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 채 지나와서 그런지 어디서부터 메워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포스를 제외한 모든 개미가 완전 숙련을 거치며 다음 단계에 발을 들인 게 아니었다.
‘진화 조건과는 관계없는 것들이 많으니까.’
강함에 집착하지 않은 나우피어는 자신이 갖춘 능력에 대한 숙련도가 매우 높았는데…….
‘놈이 강한 것도 포스와 비슷한 이유일 거야.’
그에 비해 나는 쌓기 힘든 흑마력으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노가다로 강해질 여유 따윈 없었어.’
전쟁을 통해 흑마력을 확보하고, 고블린 제사를 통해서도 방대한 흑마력을 얻었다.
덕분에 다른 솔져나 워커들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대기만성?
‘웃기는군.’
그동안 뭔가 착각한 것 같다.
‘마력량만 키워 놨지, 부실 공사가 따로 없잖아.’
지금의 나는 겉만 화려할 뿐인 모래사장 위의 전각.
사상누각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강해지기 위한 수련과 기연들이 내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 어떻게 나아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
아니, 나아갈 방향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 길은 성과가 보이지 않는 지루한 길이며, 나아가는 것이 아닌 되돌아가는 길.
‘지금 와서 복습이라니. 효율적이지 못하단 말이야.’
다른 길이 있다면 꼭 피해 가고 싶었지만, 이 길만큼 확실한 수단이 없었다.
‘얼마나 걸릴까?’
2년? 4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4차 진화종의 수명은 약 400년.
시간도 넉넉하니, 더 멀리 가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았다.
나아갈 방향을 정한 나는 공책과 펜을 가져와 그동안 익힌 것들을 정리했다.
내가 걸어온 길만 봐선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으니, 다른 개미들에게도 그들의 성장 과정을 기록하여 제출하게 했다.
‘자이언트와 울트라의 호흡과 운기 방식도 참고해야겠어.’
더 많은 비교분을 얻기 위해 세크리에게 개미들의 성장 과정을 기록해 오게 했다.
“네, 비서 팀과 하녀 팀에게 명해 두겠습니다.”
“여기 틀에 맞게 정리해서 보고해.”
“네!”
나는 세크리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개미들의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할 수 있었다.
‘기본은 같지만 조금씩 다르단 말이지.’
기본 골조와 도달한 지점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호흡의 깊이와 운기 방식에서 차이가 났다.
호흡과 운기에 관해 연구하며 시간을 보내니, 디아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연공법을 만드는 건가?”
“연공법이요?”
“오러를 키우는 수련법을 우린 연공법이라 한다. 개미족은 다르게 부르나 보군.”
내가 연공법에 관심을 보이자 디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해 줬다.
“연공법의 틀은 크게 다르지 않아. 제국 병사들이 익히는 연공법을 예로 들면…….”
제국의 병사들은 아레스 교의 백병기공에서 파생된 강병공을 배운다고 했다.
“모든 연공법은 무기를 휘두르며 호흡법을 병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간들은 반복된 동작과 호흡으로 대기의 기운을 신체에 담는 과정을 거쳐 기감을 얻었다.
기감을 얻으면 몸에 퍼져 있는 기운, 개미족은 마력이라 부르지만, 인간들은 마나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르는 것을 아랫배로 유도하여 마나 코어를 만들었다.
‘마석에 해당하는 기관을 단전에 만드는 거군,’
마나와 마력은 밀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코어를 형성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2단계로 마나를 움직이는 길과 호환되는 무기술을 병행하여 마나에 의지를 심는다.
‘외공처럼 보이는 내공심법 같은 건가?’
인간들은 연공법에 의해 정제된 마력을 오러라 칭했고, 오러는 강화만을 목적으로 삼으며 제어가 쉽고 큰 위력을 발휘했다.
“마법사와 몬스터가 가진 마력은 마나가 뭉친 형태로 오러 만큼 제어가 쉽지 않아. 대신 쌓이는 속도가 빠르고 대기의 마나와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있지.”
“그럼 디아가 다루는 힘은요?”
“내가 다루는 건 권능이 더해진 흑마력이지. 흑마법사와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야.”
마력과 오러의 차이.
마력이 자연에서 퍼온 광천수라면 오러는 연공이란 공정을 거친 정제수다.
마력에는 속성이 있고, 오러에는 속성이 없었다.
“감응력이 없으면 마력을 다룰 순 없어.”
마나 친화력이라고도 불리는 감응력은 마력을 움직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었는데…….
개미족은 진화를 통해 자연스레 기감이 열리며 감응력을 갖추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했다.
“극소수의 인간만이 감응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그들은 마법사가 되거나 성직자가 된다.”
디아는 자신의 대검에 강기를 두르며 말했다.
“모르는 녀석들은 이걸 오러 블레이드라고 착각하지만, 이건 홀리 블레이드의 대척점에 있는 다크 블레이드야.”
클라우드 왕국은 기사를 중심으로 사회가 형성됐다.
“제국에선 병사들에게도 연공법을 가르치지만, 왕국에선 귀족들이 연공법을 독점하고 기득권을 지켜 왔지.”
오러는 적은 양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 마력의 엑기스로 취급받고 있으나, 디아가 말하길 오러는 마력의 열화판에 불과하다고 했다.
“강병공은 익스퍼트가 되기까지의 수련법이고,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상급 연공법이 필요해. 내가 익힌 건 마신께서 내려주신 흑기공이지.”
상급 연공법이라 해도 마스터가 되기까지의 수련법에 불과했고, 마스터가 되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했다.
“내가 본 마스터들은 오러에 속성을 끌어들여 마력을 모방하려고 하더군.”
“그래서 열화판이라는 거군요.”
디아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신성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 신들이 연공법을 하사했고, 그러한 연공법이 누군가의 손에 개량되면서 익스퍼트의 수가 늘며 기사들의 시대가 도래한 듯했다.
“고대 마도 문명의 쇠퇴와 연공법의 관계성은 밝혀진 게 없지만, 제국의 학자들은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더군.”
‘부족한 재능으로 마력을 다루는 수련법이라니.’
인간들의 연공법은 개미족에게 맞지 않으나, 참고할 부분이 많았다.
‘개미족에게 맞게 뜯어고쳐 보급하면 3.5차 개미가 폭증할 거야.’
3.5차가 늘어나는 만큼 4차 진화종의 발생 확률도 높아질 테니…….
‘개미족을 위한 연공법을 만들어야겠어.’
나는 디아에게 들은 다양한 연공법을 참고하여 개미족에게 맞는 연공법을 만들어 봤다.
말이 연공법이지, 개미족이 성장하며 깨닫는 호흡, 운기, 강화, 마기 네 개의 과정을 세분화한 단계별 수련법이었다.
마력에 치중한 수련법이라 각성 능력을 발동하여 군체원의 마력 정보를 끌어오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연공법 설계에 몰두하고 있으니, 왕급들과 준왕급이 하나둘 내게 모여들었고, 내가 설계한 연공법에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호흡만 제대로 해도 반은 먹고 가는 거야. 여길 좀 더 깊이 있게 단련하면 잠재력 자체가 달라지지.”
“마력을 활용한 신체 강화는 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과정을 제대로 거쳐야 튼튼한 신체를 만들 수 있어.”
호흡을 중시하는 나르본느, 신체 강화를 중시하는 갑각왕.
“마력이 다닐 길은 최소한으로 잡는 게 좋더군.”
자신이 체득한 운기 노하우를 알려주는 포스.
“포스 말대로 했다간 마력 축적 속도가 느려져. 마력은 크게 굴려야 하는 거야.”
나르본느가 포스의 말에 반박하자, 크라스가 한마디 했다.
“넓은 길 하나만 있으면 모든 길은 뚫리기 마련이다.”
기분이 상한 나르본느가 크라스를 째려봤다.
“넓은 길 하나로 전신이 망가지는 걸 못 봤으니까 그런 소릴 하지.”
“제대로 단련하면…….”
“야! 이건 호흡만 간신히 하는 하위종들이나 하는 거라고. 뭘 좀 알고 말해!”
“그럼 호흡 단계에서 좀 더…….”
“그럼 더 크게 굴리지 왜 작게 굴리는 걸 고집하는 거야?”
“…….”
네론도 끼고 싶었던지, 자신이 가속할 때 마력을 어떻게 쓰는지 공개했다.
왕급들이 자신들이 체득한 걸 공유하며 공부의 장이 되어버렸고, 서로의 다름에서 깨달음을 얻어 갔다.
‘운기의 법칙은 복잡한 듯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해.’
나는 그들의 의견을 수렴해 가며 포스와 함께 개미족의 연공법을 개량했다.
‘진화 조건에 필요한 영양은 충분하니, 급하게 강해질 건 없어. 그러니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수개월 간 다양한 문제점들을 보완하여 연공법을 완성했다.
“개미기공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어떤가요?”
완성된 연공서를 읽어본 포스가 만족해했다.
“궁금하군. 이걸 익힌 아이들이 얼마나 강해질지.”
“뭐, 신세대에 뒤처지지 않도록 저희도 노력해야죠.”
디아에게 연공서를 보여 주니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굉장하군. 하지만, 이걸 익힐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거다.”
디아의 우려대로 내가 만든 연공법은 노가다 요소가 짙다.
인간이었다면 백이면 백 포기할 방식이지만, 개미족이라면…….
‘단순 반복만큼은 개미족을 따라갈 종족이 없지!’
1단계, 부동 호흡.
축기 효과가 있는 기문 호흡만 죽어라 시킨다.
2단계, 상시 호흡.
어떠한 상황에서도 호흡법이 끊이지 않도록 단련한다.
두 과정을 스몰 워커 때 마스터하면, 진화했을 시에 막대한 마력량과 제어력을 얻게 된다.
문제는 스몰 워커가 되면 일을 배워야 해서 호흡에 전념할 수 없고, 부동 호흡을 마스터하지 못한 채 상시 호흡으로 넘어가면 부실한 기초로 인해 반쪽짜리 호흡법을 익히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몰 워커의 수명은 300일.
사실상 300일로 상시 호흡까지 마스터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니 디아도 내가 만든 연공법을 이상적인 실패작이라 여겼는데.
‘다 방법이 있지.’
함정과 교육에 관심이 많은 칠 장로 트라이.
그의 각성 능력은 감각 공유다.
개미 지배와 비슷한 능력으로 제약이 있긴 하지만, 하위종에 빙의하여 잠시간 조종할 수도 있었는데.
나는 트라이에게 부동 호흡을 가르쳤고, 애벌레를 조종하여 호흡법을 전수하게끔 했다.
그럼, 앞으로 태어나는 스몰 워커는 유충 때부터 호흡법을 익힌 천재라 할 수 있다.
천재의 성장 속도는 범재와 같지 않다.
영양을 조절하여 진화를 늦추고, 교육 개미를 붙여 어떻게든 진화 전에 상시 호흡을 마스터시킬 계획이었다.
그리고 나는 간부들과 함께 상시 호흡을 익히며 부족했던 기초를 다졌다.
함수를 하다 덧셈 뺄셈을 하고 있으니 지루할 만도 했지만, 감정을 지우고 무념무상으로 수련하니 어렵진 않았다.
겨울이 오며 여왕들이 산란을 멈췄다.
공주를 낳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 것인데.
개미기공의 완성으로 내년에 있을 공주들의 교육과정은 매우 특별해질 예정이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