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모여드는 강자들
자신의 신분이 들킨 것에 살짝 놀란 제논.
그는 놀람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주인님께서 알려 주셨기에…….”
“주인이 누구지?”
문트리아가 깊게 절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에 관해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감히 저하를 무시하는 것이냐?!”
필라이가 검을 뽑으려 하자 제논이 말렸다.
“됐다. 무지한 상인에게 예우를 따질 생각은 없다. 그래서 날 만나고자 한 이유가 뭔가?”
“저하가 왕성까지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 주인이란 작자가 궁금해지는군. 왕국의 귀족인가?”
“주인님에 관한 걸 말씀드릴 순 없지만, 원하시는 정보가 있으시다면 뭐든 구해 오겠습니다.”
문트리아와의 대화 중에도 제논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뒷배가 벨레삭 백작이라면 자신을 숨길 이유가 없어. 그럼 유리 바르퀴르 자작인가? 아니야, 자작이 신분을 숨겨 가며 날 지원할 필요는 없지. 나와 칠 왕자 양쪽에 선을 대려는 자일 수도 있겠군. 그럼 중립을 표방한 가르탈 백작이나 세야누스 백작이려나…….’
왕국의 유력 귀족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던 제논은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취급하는 물건의 품질이 너무 좋다. 그런데 왜 상단을 지원해서 신전 세력을 자극하는 거지? 왕국의 귀족이 아닌 건가?’
제논과 적대하는 칠 왕자의 생모인 칠 왕비는 제국의 유서 깊은 백작가의 영애였고, 그녀의 조상 중에 황실과 맺어진 자가 있어 황제의 먼 친척이라 할 수 있었다.
‘칠 왕자의 존재 때문에 제국이 날 도울 일은 없어. 그럼 포카이나 다슬리 왕국 쪽에서 약세인 날 지원해 왕국의 분열을 일으키려는 건가?’
제논이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내가 너희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문트리아가 고개를 살며시 들어 제논을 응시했다.
필라이가 꾸짖으려 하자 시리우스가 말렸고, 맑게 빛나는 문트리아의 눈이 제논의 동공에 담겼다.
“저는 상인입니다. 기사와 같은 충심을 보일 수 없으니, 가진 재주로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문트리아는 제논 일행에게 금화 주머니 열 개를 건넸다.
“여비로 써 주신다면 삼대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메르손이 주머니를 열어 보곤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저하, 금화와 은화가 섞여 있습니다. 족히 20골드는 되어 보입니다. 이게 열 주머니면…….”
생각보다 큰 금액에 놀란 제논을 향해 문트리아가 말을 이었다.
“개미 문양이 새겨진 곳은 저희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미리 말해 뒀으니 떠나기 전에 장비를 갖추시면 좋을 듯합니다.”
마차와 식료품까지 준비해 뒀다는 문트리아의 말에 제논은 경계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 개미 상단은 우리가 이곳을 빨리 떠나길 원하는군.”
“저하의 복귀가 늦어질수록 칠 왕자의 세력이 커질 것이란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서두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여…….”
“할 말은 그것뿐이냐?”
제논은 카론이 말해 준 부정한 행위를 숨기기 위해 자신을 보내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이걸 받고 더는 깊게 파고들지 말라는 것 아닌가?”
문트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받은 명령은 어디까지나 저하를 안전하게 모시라는 것이지, 급하게 보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원할 때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 둔 것이지요.”
용병이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찾아온 것만큼 이상한 상황.
“상인이란 자가 아무런 대가도 원치 않는다?”
제논의 경계가 짙어짐을 느낀 문트리아는 긴장한 채 말을 이었다.
“제 주인께선 아무런 대가를 원치 않았으나, 개인적인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제논은 이것이 본론이라 직감하며 귀를 기울였다.
“상단에서 취급하는 약품을 왕실에 납품하고 싶습니다.”
문트리아는 왕실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 신전 세력의 압박으로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쌓인 재고를 풀고자 했다.
“약품의 납품권이라.”
“저하, 약품은…….”
약품에 대한 납품권은 신전 세력에 주어진 특권이었다.
‘나와 신전 세력의 갈등을 부추기려는 건가?’
제논은 개미 상단을 의심하면서도 바르퀴르 영지가 전염병 피해를 크게 보지 않았다는 걸 주목했다.
‘검증해 볼 가치는 있어.’
제논 일행은 약효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개미 저택에 머물게 됐다.
그가 개미 상단과 관계를 다지는 동안에도 전염병의 확산세는 꺾이지 않았다.
‘신기하군. 이들은 귀족처럼 돈을 쌓아 두지 않고, 버는 만큼 사람들을 고용하거나 노예를 사들여 일거리를 주고 있어.’
제논 일행은 개미 상단의 직원 교육과 행정 체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많은 상점을 문제없이 관리하는 것도 놀랍지만, 소속원의 수준 자체가 왕실 행정원 이상이야.’
개미 상단에 대해 알아 갈수록 제논은 문트리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개미 상단을 보면 알겠다. 네 주인은 하층민을 보듬어 주고자 불명예를 각오하고 상단 따위를 지원하고 있을 테지.”
다크에게서 돈 굴리는 방법을 배운 문트리아는 크게 당황했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신전 세력과의 일전도 각오했을 텐데… 일찍 알아주지 못한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
문트리아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을 알아주신 건 세자 저하가 유일하십니다.”
“그럴 테지.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을 테니.”
“…네. 매우 고독하십니다.”
시간이 흘러 약에 대한 검증을 마친 제논은 문트리아와 밀약을 맺은 후 왕실로 돌아갔다.
“국왕 전하, 제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도 세자 교체가 필요합니다!”
“아니 되옵니다. 국왕 전하, 제국의 힘을 빌리는 순간 속국으로 전락하여 귀족의 영애와 공주를 바쳐야 할 겁니다.”
“지금도 평민들을 노예로 바치고 있지 않나? 좀 더 성의를 보이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렇게 성의를 보이던 포카이 왕국의 꼴을 보게. 왕권은 추락하고 썩은 귀족들이 판을 치며 망해 가고 있지 않나!”
“그 망해 가는 포카이조차 우릴 무시하고 있지 않나?”
칠 왕자 파는 사대주의에 빠져 있었고, 왕세자 파는 결속을 다져 민족주의를 관철하고자 했다.
“전하, 작금의 황제는 내부의 분열을 막느라 왕국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이 기회에 포카이 왕국을 병합하시면 제국도 저희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국의 허가도 없이 전쟁이라뇨. 쿠드라 백작이 제국을 몰라도 한참이나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국왕 전하께선 귀담아듣지 마소서.”
“전하께서 곤란해하시지 않나. 진정들 하시고, 다들 전염병 문제로 모였을 테니 세자 저하가 가져온 성과에 대해 논의하도록 합시다.”
“성과? 책임을 잘못 말씀하신 듯합니다.”
“검증도 되지 않은 고서를 믿고 베르제붑 던전과 전염병을 연관 지은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요.”
“아무리 적통이라곤 하지만, 독단으로 탐사대를 꾸린 건 좋지 못한 선례로 남을 수 있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합당한 처벌을 내려 주십사 간청 드리옵니다.”
왕실에 도착한 제논 일행은 칠 왕자 세력의 정치적 공세를 묵묵히 받아 내며 문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왕국 전역에 약품을 유통했다.
신전들의 거센 견제가 뒤따랐으나, 왕실을 등에 업은 약국 사업은 전염병만큼이나 빠르게 퍼져 나갔다.
겨울에 접어들 무렵 왕국의 전염병 문제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제논은 큰 업적을 세운 셈이었고, 개미 상단과 함께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됐다.
신전 세력은 개미 상단을 더는 비난할 수 없었고, 명분을 잃은 귀족들도 제논을 향한 공세를 멈춰야 했다.
약국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문트리아는 영향력을 넓혀가며 금화를 차곡차곡 쌓아 갔다.
“이걸로 내 밥값은 충분히 한 것 같아.”
다른 측근들에 비해 늦게 합류했지만,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해 낸 문트리아는 다크의 허락 아래 귀족 부럽지 않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됐다.
* * *
왕국의 전염병이 수그러들자 칠 왕자 세력은 의아해했다.
홀로 정원을 산책하던 어린 소년이 흑색 로브로 얼굴을 감춘 자를 만났다.
“계속 퍼트리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 적당한 선에서 손을 빼야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빨리 해결되는 문제였나?”
“새로운 약을 개발해 낼 줄은… 애초에 벤자민 녀석이 실패한 게 문제였습니다. 실패자와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으니, 놈이 지키려던 것들을 철저히 망가뜨려 본보기로 삼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로브의 존재가 물러가며 말했다.
“세자의 목숨이 좀 더 연장됐을 뿐, 달라지는 건 없으니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 우습군. 고작 하위 귀족을 생모로 둔 제논 따위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왕이 될 수 없다는 건 하찮은 평민들조차 알고 있을 테지.”
* * *
인간들은 세 개의 달에 각각 신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
달과 미의 여신 세레나.
달과 밤의 여신 디아나.
달과 사냥의 여신 루나.
세 번째 달인 루나가 뜬 해에는 대기의 마력이 들끓으며 동식물의 성장이 가속되고, 고갈된 지력이 회복되거나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시기가 되면 몬스터를 대비하느라 전쟁 물자들의 가격이 치솟는다.
봄이 오자, 개미족은 공주 개미들을 낳고 키우느라 외부 활동을 중단했고, 다크를 비롯한 상위종 몬스터들은 들끓는 마력을 다스리기 위해 칩거에 들어갔다.
포식자들이 잠잠해지자 숲의 몬스터들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남부 대산림이 마의 축복을 물씬 받아 가며 변화하고 있을 때, 말벌족의 영역에선 102마리의 특별한 애벌레를 위해 모든 자원을 쏟아붓고 있었다.
“더 강한 아이가 필요해, 개미족을 몰아내 줄 강력한 아이가!”
사냥감이 부족할 때는 동족까지 먹여 가며 키운 귀중한 애벌레들.
킬러 퀸 수십 마리를 먹어 치우며 오랜 시간 키워 온 애벌레들이 고치를 틀자, 남은 킬러 퀸들은 환희에 젖어 들었다.
한 달이 지나고 고치에서 깨어난 건 두 마리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일대의 킬러 퀸 모두에게 전해질 만큼 강렬했다.
일벌도 아니며 그렇다고 여왕도 아닌 존재.
단지,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두 존재는 가드비라 불렸다.
가드비의 신체 구조는 인간형 몬스터와 흡사했지만, 머리가 말벌이었고 전체적인 외형 또한 말벌에 가까웠다.
신장은 1.8미터.
비행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손을 아래로 살짝 꺾으면 손등에서 60센티에 이르는 굵직한 원뿔형 침이 나왔다.
“우린 왕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 킬러 퀸들은 왕의 영접을 준비하라!”
가드비는 킬러 퀸들을 지배하려 했고, 말을 듣지 않는 킬러 퀸에겐 폭력을 행사하여 굴복시켰다.
킬러 퀸들은 가드비의 지시에 따라 특별한 고치 백 개를 한곳에 모았다.
시간이 흐르자 고치들이 합쳐지기 시작했다.
100개의 고치가 50개가 되고 25, 12, 6, 3을 거쳐 한 개로 합쳐지자 고치를 뚫고서 킬러 킹이 태어났다.
킬러 킹은 외골격 비중이 데몬 앤트 수준이었고, 킬러 퀸보다 화려한 말벌창을 지닌 창기사 같은 몬스터였다.
“이곳은 이제부터 나만의 왕국이 될 것이다. 복종하지 않는 킬러 퀸은 필요 없으니 왕국을 위해 죽어라.”
갓 태어난 킬러 킹은 자신을 말벌왕 키르라 칭했고, 두 가드비에게 레프와 라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킬러 퀸을 처단하여 배를 채웠다.
“거기 너, 지금 말벌족이 처한 상황을 말해봐라.”
현재 말벌족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된 키르는 턱을 괴곤 생각에 잠겼다.
‘인근에 포진한 개미족을 쓸어버리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야.’
개미족을 쓸어버리려 하니 등골이 싸늘해진 키르.
‘개미족 중에 나보다 강한 자가 있는 건가?’
자신과 가드비들이 어느 정도 강한지 알아보기 위해 숲을 돌아다녀 봤지만, 말벌족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그리즐리 베어마저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 정도 수준의 사냥감으론 내 힘을 확인할 수 없어.’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 근질근질한 그에게 자이언트 킬러비가 소식을 전해왔다.
“각지의 포식자들이 서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레프, 라이. 무슨 일인지 알아 와라.”
“충!”
얼마 후, 숲의 포식자들이 무투회를 목적으로 미노타우로스의 영역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무투회를 통해 강자들이 실력을 겨룰 수 있단 말이군.”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고 싶었던 그는 레프와 라이를 데리고 미노타우로스들의 영역을 향해 이동했다.
무투회를 향해 움직인 건 말벌왕 만이 아니었다.
마의 축복으로 탄생한 모스퀴토 퀸, 모기왕 퀴토.
말벌족과 마찬가지로 구석에 내몰려 일족끼리 동족상잔을 거듭하여 탄생한 코크로치 킹, 바퀴왕 크로치.
그리고 오랜 세월 살아오며 피해야 할 포식자를 마킹해 두기 위해 나선 포이즌 모스킹, 나방왕 버플.
황무지에서 갑각왕 헤라클레스가 무투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한 스콜피온 킹, 전갈왕 스콜.
거미왕 나르본느가 무투회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곤 모습을 드러낸 두꺼비왕 하와, 지네왕 갈파고스.
트롤 부족의 멸망 소식을 접하여 무투회에 나서기로 한 트롤킹 트롤레.
오그르트의 죽음을 느끼고 오거 숲의 맹약을 잇기 위해 모여드는 오거들.
자신들의 강함을 알려 영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선 키클롭스 전사들.
수련을 쌓기 위해 남쪽 늪지에서 출발한 상반신은 여자면서 하반신은 뱀인 라미아 전사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네임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