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첫 관문
봄이 오며 마의 축복이 시작됐다.
대기의 마력이 들끓었고, 상위종들은 마석을 안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에 비해 흑마력의 밀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암흑마창의 존재로 인해 일대의 흑마력이 모여들고 있어, 나 또한 흑마력을 흡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흑마력을 흡수해도 마력량은 크게 늘진 않았지만, 점차 깊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상위종들이 들끓는 마력에 적응하여 마석이 안정될 무렵, 공주들이 하나둘 태어나 교육 개미들에게 인계됐다.
이번 결혼 비행에 나서게 될 공주들은 칠 장로인 트라이의 각성 능력으로 개미기공의 호흡 단계를 애벌레 때부터 연마시킨 우월한 개체들이었다.
‘영양도 균형 있게 먹여서 그런지 지능도 높아.’
산란 촉진제를 충분히 지원한 200개의 하위 군체에서 보내오는 공주들까지 더해지니 그 수가 10만을 넘어섰다.
백 분의 일만 무사히 여왕이 되어 줘도 일천.
그 정도만 되도 대박인데, 나는 절반 이상 살려 볼 생각으로 이번 결혼 비행을 준비했다.
내 계획대로 잘 풀린다면 개미족의 번식력이 고블린을 넘어설 것이고, 숲의 패권을 넘어서 대륙 지배의 초석을 다질 수 있을 터였다.
‘애초에 개미족의 번식력이 고블린에게 밀린다는 것부터가 수치였어.’
교육장으로 만든 공간이 하나둘 채워졌다.
충분한 준비를 했음에도 교육 개미가 부족했다.
“세크리, 지금 놀고 있는 워커맨을 모두 투입하고, 여왕님들과 일리아나에게도 협조를 요청해 줘.”
“알겠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각성 능력을 지닌 여왕들과 상위종 태반이 투입되어 공주 교육에 매달렸다.
공주들에게 기본적인 무력과 지식을 전수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가 중시한 건 하위 군체가 되었을 때의 이점과 역할을 알려 주는 것과 본진을 향한 복종심을 깊이 새기는 것이었다.
붙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는다.
충성하면 살고, 배신하면 죽는다.
희생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잘 짜인 주입식 교육을 통한 세뇌.
참관할 때마다 공주들의 성장이 눈에 보여 기분이 좋았다.
‘요즘 공주들은 참 바르단 말이지.’
교육관이 되지 못한 개미들은 고블린과 함께 총력을 기울여 신여왕이 살아갈 둥지를 마련했다.
둥지 선정부터 교통망까지 잘 짜 둬서 일단 입주만 하면 본진의 지원으로 급속 성장을 이룰 것이다.
‘크기 싫어도 클 수밖에 없도록 계획돼 있지.’
둥지는 열 마리씩 짝지어 살 수 있도록 설계됐다.
교육을 통해 상위종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로 급을 나눠서, 상위권 공주를 대표 공주로 삼고 함께할 하위권 공주 아홉을 지정해 주기로 했다.
소위 말해 산란 노예 아홉을 붙여 주는 격이지만…….
개미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다를 뿐, 자기 역할만 충실히 해내면 뭐가 됐든 천대받진 않았다.
초기 군체를 위한 둥지가 1만 개 이상 필요했지만, 오거 숲까지 확장된 개미족의 영역은 상당히 넓었다.
‘땅이 모자랄 일은 없겠고, 사냥감도 부족하진 않을 거야.’
지하에서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수년간 사냥감이 불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뒀기에, 지금의 개미족 영역은 각종 몬스터와 맹수들이 바글거리는 나무 반, 고기 반인 험지가 돼 있었다.
‘하위 군체의 관리 체계도 짜야겠어.’
200개의 하위 군체 관리도 쉽진 않은데, 그 수가 열 배 이상 늘어난다면 최악의 경우 페로몬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분열될지도 몰랐다.
여왕들과 장로들은 이러한 문제로 고심하는 듯했지만, 그 해결책은 간단했다.
군체의 급을 나누고 상위 군체가 하위 군체를 관리하게끔 하면 된다.
즉, 본진을 수도 군체로 삼고, 각지에 도시 군체를 만들어 마을 군체를 관리하는 방식이다.
도시 군체가 될 상급 군체들을 선정하고, 중급 군체와 하위 군체를 나누던 중 개미족 영역에 들어선 강자들의 기운이 감지됐다.
‘시작된 건가?’
5년 주기로 찾아오는 마의 축복과 함께 시작되는 무투회.
미노타우로스들이 자신들의 강함을 알리고, 숲속 강자들의 서열을 정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새로운 왕급과 준왕급이 다수 발생한다고 듣긴 했지만, 숲의 몬스터 밀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의 왕급과 준왕급 몬스터가 나타나 개미족 영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쪽도 준비해야겠어.’
공주들의 문제를 일리아나에게 인계한 나는 왕급과 준왕급 동료들을 모았다.
포스는 둥지 수호라는 역할이 있어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럼 둥지를 부탁할게요.”
“걱정하지 마라.”
개미강공을 익히기 시작한 포스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 터라 지금의 그가 어느 정도 강해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분명 5단계인 방출까지 숙달한 것 같아.’
나는 아직 2단계인 부분 강기를 수련 중이었다.
이번 무투회는 나를 비롯한 디아, 나르본느, 헤라클레스, 크라스, 네론 등 여섯이 함께 가기로 했다.
인간인 디아가 참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종족이 참석하는 만큼 인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뭐, 디아라면 상관없겠지.’
디아는 언제나 흉흉한 마력과 살기를 뿜어 대서, 갑주만 입고 있으면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맹약 계승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나까지 갈 이유는 없다.
‘나르본느, 갑각왕, 네론. 셋이면 충분했을 거야.’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가려는 건 숲의 저력을 두 눈으로 직접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경우에 따라선 우호 관계를 넓히고 강력한 부하를 얻을 수도 있을 거야.’
이번 기회에 커 가는 세력을 지탱해 줄 듬직한 동료나 부하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진정으로 노리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강자존의 숲에선 강한 놈이 살아남고 약하면 죽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살아남은 놈이 강한 것이기도 하지.’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
나보다 강한 놈이 많다면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난 약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숲의 패권을 가져오려면 개미족의 세력을 불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 세력들을 흔들어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미노타우로스 녀석들이 있는 이상 서쪽으로의 확장은 막힌 것과 다름없어.’
방해되는 건 미노타우로스뿐만이 아니다.
왕급과 준왕급 중 물량으로 밀어 버릴 수 있는 놈이 있는가 하면, 네론처럼 개미족의 기동력으론 절대 잡을 수 없는 부류도 있고, 오그르트처럼 무식하게 강한 놈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재앙적 존재들이 전략적으로 개미족을 치기 시작하면…….
‘곤란해질 수 있단 말이지.’
다행히도 지성을 갖춘 몬스터의 태반이 무투회에 참석할 테니, 이번 기회에 잠재적 위험 요소를 파악해 둘 생각이었다.
‘제거할 수 있으면 더 좋고 말이야.’
“그럼 출발하지.”
일행의 리더는 갑각왕 헤라클레스.
급하게 갈 이유가 없었던 우린 순수 뚜벅이인 나와 디아에게 맞춰 움직였다.
이동 중 나는 폭렬기를 활용한 이동 기술을 떠올렸고, 실전에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고심했다.
‘뭐지? 이상한 게 따라붙었는데…….’
찝찝한 시선이 느껴지는 게 꼬리가 붙은 것 같았다.
“나방왕 버플이군. 이 시기만 되면 돌아다니는 녀석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크라스와 네론도 헤라클레스의 말에 동의했다.
“버플은 준왕급이라 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약한 녀석이지. 네 상대는 안 될 거다.”
“언제든 처리할 수 있어서 내버려 둔 녀석이다.”
나르본느는 살짝 오묘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왕급 사이에선 이런 말이 있어.”
‘죽지 않고 계속 나타나는 몬스터를 경계하라.’
“버플은 나만큼이나 오래 살아온 녀석이야. 그러니 약하다고 방심하진 마.”
사실 나도 왕급 셋에 준왕급 둘과 함께 다니니 방심하고 있던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나르본느의 말을 듣고 개미 지배 능력을 활성화하여 주의를 기울였다.
미노타우로스의 영역으로 가는 길.
무수히 많은 몬스터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덤비는 간 큰 녀석은 없었다.
오거 영역에서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하니 한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우릴 반겼다.
“갑각왕과 거미왕인가?”
“오랜만이야. 그런데 누구였지?”
“내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다. 내가 너희들의 1차 예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예전에도 똑같은 말을 들었던 것 같아.”
나르본느가 친화력을 발휘하여 미노타우르스와 인사를 나눴다.
“나머지 넷은 처음인가? 무투회에 참석할 거라면 저기서 기다려라. 하루 뒤에 출발하겠다.”
어디 출신인지 모를 하이 오크 십여 마리가 먼저 와 있었다.
하이 오크는 오크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크며 근육 또한 우람한 상위종으로 마기를 다룰 줄 안다.
3.5차 수준인 놈들 사이에서 상당히 깊이 있는 마력을 풍기는 놈이 있었다.
‘종족이 달라 정확히는 모르겠단 말이지.’
어쨌든 우리 일행보단 훨씬 약한 녀석이었다.
웅성웅성.
나르본느와 헤라클레스를 알아봤는지 하이 오크들이 동요했다.
“벌레 따위에 당황하지 마라. 가 보면 더한 괴물이 널려 있다.”
녀석의 말에 우리 일행은 그저 웃었다.
다들 속으로 생각한 것이다.
‘귀엽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조만간 알게 될 현실을 미리 알려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나는 개미 지배의 범위를 넓히며 시간을 보냈다.
나르본느가 심심했던지 네론을 툭툭 쳤다.
“심심하지 않아?”
네론과 크라스는 기본적으로 오만했으나, 나르본느에게는 깍듯했다.
“아닙니다.”
“쟤들 좀 골려 줄까?”
“먹지도 않을 거 놀아 줘 봐야 피곤하기만 합니다.”
“하긴 그래.”
은근 게으른 성격인 나르본느.
자신이 나서기 보단 누군가 나서 주길 기대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아 근처에 해먹을 만들곤 드러누웠다.
몇 시간이 흐르고 나방왕 버플이 합류했다.
노란색 털옷과 나방 날개를 지닌 인간형 몬스터.
크라스와 네론처럼 남성의 외향을 했는데, 인간의 비중이 높은 편이어서 미형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나르본느 님.”
“그동안 어디 있었어?”
“저야 항상 같은 곳에 있지요.”
놈은 나르본느, 헤라클레스, 크라스, 네론 순으로 찾아가 인사했고, 디아와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포이즌 모스킹 버플입니다.”
“데몬 워커, 다크.”
끝없이 탐색하는 눈과 친숙한 기운을 보니.
‘속이 시꺼먼 놈이야.’
나는 그를 요주의 몬스터로 찍어 뒀다.
놈도 하이 오크들과는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는지 그쪽으론 가지 않았다.
마치 우리와 처음부터 일행이었다는 듯 근처에 자리 잡은 나방왕 버플.
‘저 녀석, 마킹 가루를 흩뿌리고 있어.’
놈의 마력이 잘게 쪼개져 우리의 몸을 감싸는 게 보였지만, 마안을 가진 나만이 눈치챈 것 같아 일단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다음 날.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와서 근무 교대를 해 주자, 예선 시험관으로 돌변한 녀석이 말했다.
“예선은 이미 시작됐다. 지금부터 나는 시험이 치러질 장소로 이동하겠다. 너희들은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장소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시험관인 미노타우로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