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통곡의 절벽
이동하던 모기왕 퀴토와 바퀴왕 크로치가 만났다.
“죽어!”
여성체인 모기왕은 날아다니며 손목에서 발사되는 흡혈관으로 바퀴왕을 공격했다.
바퀴왕은 뛰어난 감지력으로 공격들을 읽어 냈고, 신속한 움직임으로 모든 공격을 피했다.
“해보자는 거냐?”
바퀴왕이 나무를 재빠르게 올라가 모기왕을 덮쳤다.
“흥!”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모기왕이 흡혈관을 쏘았지만, 바퀴왕이 날개를 펼치며 피해냈다.
지나가는 고블린이 둘의 공방을 보곤 눈을 비볐다.
둘의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잔상만이 어렴풋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싸웠지만 서로 스치지도 못한 둘.
“…화해하자.”
“알겠다.”
모기왕은 화해하는 척하며 흡혈관을 날려 봤으나, 바퀴왕은 그조차 가볍게 피해내며 화를 냈다.
“이대로 계속하면 네놈이 먼저 지칠 거다. 가던 길이나 가.”
“알았어.”
둘은 서로 신경 쓰지 않고 각자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따라오지 마라.”
“너야말로.”
속도를 올리며 경쟁하던 둘은 뒤늦게 자신들의 목적지가 같다는 걸 깨달았고, 서로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저 녀석은 내게 위협이 안 돼.’
‘이 녀석이라면 괜찮겠지.’
그렇게 동행하게 된 둘.
앞서가던 말벌왕과 가드비를 발견했다.
달리는 스포츠카 앞에 똥차가 막고 있으면 짜증이 나는 법.
“죽어!”
“뒈져!”
바퀴왕이 나무를 타고 뛰어올라 좌측의 가드비를 후려쳤고, 모기왕이 우측의 가드비를 향해 손을 뻗어 흡혈관을 쐈다.
가드비 레프는 반응할 새도 없이 바퀴왕에게 걷어차여 나무와 충돌해 기절했고, 라이는 모기왕의 흡혈관 하나를 막았으나, 다른 쪽 손에서 뻗어 나온 흡혈관에 허벅지를 뚫렸다.
라이는 허벅지에 꽂힌 흡혈관을 끊기 위해 손등에서 솟아난 원뿔형 무기로 찔러 봤지만, 흡혈관은 끊어지지 않았다.
피를 쭉쭉 빨린 라이의 다리가 푸석하게 말라가자, 말벌왕 키르가 움직였다.
“내 부하들에게 무슨 짓이지?”
흡혈관을 힘껏 쥔 말벌왕.
“큭.”
흡혈관이 말벌왕의 악력에 눌려 피가 빨리지 않자 살짝 당황한 모기왕 퀴토.
섬뜩한 위기감을 느낀 그녀였지만, 기습적인 발차기를 날리는 바퀴왕을 보곤 이때만큼은 그와 함께 한 걸 신의 한 수라 여겼다.
“뒈져라!”
푹!
바퀴왕의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바퀴왕의 몸이 창에 뚫려 바닥에 버려졌다.
자신과 동급으로 여겨지는 바퀴왕의 허무한 최후에 화들짝 놀란 모기왕이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붙잡힌 흡혈관으로 인해 몸을 빼지 못했다.
말벌왕이 잡고 있던 흡혈관을 힘껏 당기자 모기왕이 끌려왔다.
퍽!
휘둘러진 창에 어깨가 박살 난 모기왕은 말벌왕의 살벌한 눈빛에 몸을 떨며 말했다.
“살… 살려 줘. 뭐든… 뭐든 할게…….”
잠시 동안 고민하던 말벌왕 키르가 물었다.
“개미족이랑 친한가?”
살기 가득한 눈빛을 마주한 모기왕은 그가 원하는 답변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몰라, 개미족 같은 건 몰라!”
“정말인가?”
“난…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그럼 아무것도 모르겠군.”
말벌왕은 모기왕이 자신과 비슷한 유형으로 탄생한 상위종임을 알곤 흡혈관을 놓아주며 말했다.
“살려 주는 대신 내 부하가 돼라.”
부하가 되지 않으면 당장 죽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모기왕이 고개를 맹렬히 끄덕였다.
모기왕을 부하로 삼은 말벌왕은 바닥에 버려진 바퀴왕의 시체를 향해 창을 던져 복부를 꿰뚫었다.
지상에 내려와 창을 회수한 말벌왕이 바퀴왕의 시체를 쑤시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본 모기왕은 말벌왕이 죽은 상대의 시체에 화풀이한다고 생각했다.
‘성질 한번 더럽네.’
몸에 구멍이 늘어나자 바퀴왕이 다급히 외쳤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나도 부하하면 되잖아!”
“살아 있었군.”
“알고 그런 거 아니야?”
“몰랐다. 단지 그냥 가기에는 기분이 찝찝했을 뿐.”
“…….”
그렇게 말벌왕은 바퀴왕도 부하로 삼게 됐다.
바퀴왕에게 당해 기절했던 가드비 레프가 깨어났다.
라이는 말라비틀어진 다리로 인해 짝다리가 됐으나, 주로 날아다니며 싸웠기에 전투력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바퀴왕의 뚫린 몸에 살이 차올랐고, 모기왕 또한 인근의 몬스터들의 피를 흡수하여 박살 난 어깨를 되돌렸다.
“충분히 쉬었으니 출발하겠다.”
그렇게 다섯으로 늘어난 말벌왕 일행은 미노타우로스들의 영역을 향해 이동했다.
이동하던 도중 모기왕과 바퀴왕은 말벌왕의 속도가 자신들처럼 빠르지 않다는 것을 꺠달았다.
그러나 모기왕은 말벌왕의 피를 상상하며 입맛을 다셨고, 바퀴왕은 말벌왕과 함께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할 것이라 판단하여 한동안 같이 다니기로 했다.
“무투회 참석 희망자인가?”
“넌 안내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죽이면 안 되겠군.”
말벌왕은 미노타우로스를 만나고 투지를 불태웠지만, 모기왕과 바퀴왕은 압도적인 질량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서 기다려라, 조금 후에 출발하겠다.”
먼저 와 있는 오거가 그들을 보곤 입꼬리를 올리자, 말벌왕이 그에게 다가가 창을 휘둘렀다.
퍽!
창은 오거의 손에 가볍게 막혔다.
“무투회에서 벌레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벌. 레. 친. 구.”
말벌왕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창이 막힌 것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강하군.”
“벌레인 네가 약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
그 광경을 본 모기왕은 말벌왕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할 듯한 오거를 보며 두려움과 동시에 흡혈 욕구를 느꼈다.
“저 녀석에게 한 방 맞았다간 박살 나겠어.”
바퀴왕은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무투회를 떠올리곤 긴장과 흥분이 섞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교대자가 왔군. 첫 번째 예선은 지구력 시험이다. 도착은 늦어져도 상관없으니, 따라올 수 없다면 추적 능력을 십분 활용해도 좋을 거다.”
교대를 마친 미노타우로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 능력을 지닌 말벌왕이나 모기왕은 문제없이 따라붙었고, 쾌속한 질주 능력을 갖춘 바퀴왕도 미노타우로스의 뒤를 바짝 쫓았다.
오거도 무리 없이 따라붙긴 했으나, 지구력이 미노타우로스보다 떨어지는지 시간이 흐르자 헐떡이며 처지기 시작했다.
“지쳤나?”
“뭐야? 이것도 못 따라오는 거야?”
“덩치만 컸지, 체력은 쓰레기군?”
그 모습을 본 셋은 오거를 비웃었고, 무투회가 무력만 시험하는 곳이 아님을 느꼈다.
* * *
예선 첫 번째 관문, 지구력.
달리는 미노타우로스를 쫓아가는 것이었는데.
네론이야 워낙에 빠르니 문제없었고, 나르본느도 거미줄을 활용하여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갑각왕과 크라스는 지속적인 비행이 힘들었는지 날개를 접고 뛰기 시작해 뒤처지고 말았다.
미노타우로스는 조금 늦게 도착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나와 디아, 그리고 하이 오크들도 뒤처졌지만, 나는 개미 지배 능력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추적할 수 있어 급할 게 없었고, 하이 오크들은 나르본느가 남긴 거미줄을 이정표 삼아 발에 열이 나도록 뛰었다.
나방왕 버플은 비행 속도가 느린 건지, 아니면 나와 디아를 지켜보기 위함인지 우릴 뒤쫓아 왔다.
‘저 녀석… 조금 거슬린단 말이지.’
반나절 정도 지나자 헤라클레스와 크라스가 뻗었다.
“난 쉬어야겠다.”
“우리의 발로 대형 몬스터인 놈을 따라잡는 건 무리야.”
반쯤 포기 상태인 둘과 합류한 나와 디아는 함께 휴식을 취했다.
“다크, 이러다 예선에서 떨어질 것 같다.”
디아가 걱정하며 한 말에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확답해 줬다.
“조금 뒤처졌을 뿐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요.”
“우리 속도로?”
“네. 우리 속도로요.”
하이 오크들이 우릴 지나쳐 가자, 자존심 상한 헤라클레스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출발해야겠다.”
“그러죠. 제가 앞장설 테니 따라와 주세요.”
내가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일행을 이끌었는데, 거미줄이 없는 길로 빠지자 헤라클레스가 의문을 표했다.
“길을 잘못 들었다.”
“아뇨, 이 길이 더 가까워요.”
대형 몬스터의 길은 한정적이다.
거기다 놈은 빙빙 둘러 가는 듯하니, 무작정 뒤쫓으면 체력만 고갈되고 만다.
‘놈의 이동 경로를 분석한 뒤, 목적지를 예측해서 움직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
* * *
미노타우로스는 지구력이 좋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하던 말벌왕 일행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크 일행을 맡은 미노타우로스는 어떻게든 한 마리라도 더 떨어뜨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쉽게 따라붙는 느림보들을 보게 됐다.
“언제 따라붙은 거지?”
대략적인 상황을 눈치챈 미노타우로스는 헛웃음을 흘렸고, 나방왕 버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독백했다.
“다크호스인가…….”
* * *
이동하는 중간중간에 충분한 휴식을 취했음에도 하이 오크들보다 훨씬 잘 따라붙은 걸 보아, 첫 시험은 추적 능력과 잘 돌아가는 머리만 있으면 쉽사리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된 듯했다.
나방왕 버플을 무임승차 시켜 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거미줄에 낚인 하이 오크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며칠간 이동 끝에 도착한 목적지.
“1차 시험 통과를 축하한다. 그리고 환영한다. 이곳이 바로 두 번째 시험이 치러질 통곡의 절벽이다. 5일 후, 정오부터 시험이 치러질 예정이니 그때까지 푹 쉬도록.”
통곡의 절벽.
구름을 뚫고 치솟은 절벽이었는데, 아무래도 두 번째 예선은 절벽 타기인 듯했다.
‘이거 꿀이군.’
개미족의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는 미세한 털들이 있다.
그 털들은 벽면을 단단히 부여잡는 역할을 해서, 벽 타기만큼은 평지를 걷는 것만큼 쉬운 과제였다.
즉, 육중한 대형 몬스터들에겐 통곡을 자아내는 절벽일지 몰라도 곤충족 몬스터에게 있어선 애매한 시련이었다.
‘음, 1차 시험인 지구력 테스트를 생각해 보면, 종족별로 유리한 게 하나씩 있는 건 당연할지도.’
“너무 일찍 왔는걸, 아직 5일이나 남았어.”
통곡의 절벽 아래론 미노타우로스, 오거, 키클롭스 같은 대형 몬스터들이 돌아다녔고, 하이 오크, 트롤, 라미아같이 숲에서 힘 좀 쓴다는 종족들도 있었다.
‘저건 고블린 아닌가?’
내가 신장 3미터쯤 되는 고블린을 신기해하며 유심히 바라보자, 나방왕 버플이 부탁하지도 않은 설명을 시작했다.
“홉 고블린 챔피언이군요. 자이언트 홉 고블린의 진화형으로 개미족으로 치면 4차 진화종에 해당하는 존재지요.”
마력으로 보아 과거 데카이저보다 훨씬 강한 수준.
‘낙오된 하이 오크 리더와 비슷하려나?’
주변을 둘러보던 중 사방에서 우릴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올해는 헤라클레스 님과 나르본느 님이 참석하신 덕분에 곤충족 출신의 몬스터가 많군요.”
나와 디아가 반응해 주지 않자, 나방왕 버플은 미소 띤 얼굴로 다른 녀석들에게 인사하러 갔다.
포유류 몬스터들은 대체로 동족들과 어울리며 휴식을 취하는 반면 곤충족 몬스터들은 각자 홀로 떨어져 휴식을 취했는데, 어디에나 예외는 있었다.
‘신기하군. 말벌족에 수컷이 있다니…….’
인간형 바퀴와 모기를 양옆에 끼고 있던 녀석이 날 향해 날아왔다.
“개미족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여 주자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돌아섰다.
“별 것 없군.”
공허의 마력은 드러나지 않는 특성이 있어 이렇게 얕보이는 경우가 잦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는데, 놈에게서 강렬한 적의가 느껴져 요주의 몬스터로 찍어 뒀다.
찍어 둔 몬스터는 한동안 지켜보다가 위협이 될 거라 판단되면 불행한 사고로 처리해 버릴 계획이었다.
‘원래 행사에는 사고가 따르는 법이지.’
왕급과 준왕급, 그리고 그 수준에 미치진 못하지만 준왕급에 근접한 녀석들까지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가끔 나르본느와 갑각왕에게 인사하러 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며칠간 쏘다니느라 보이지 않던 나방왕 버플이 다시금 합류해왔다.
“전갈왕 스콜이 오고 있다더군요.”
그 말을 들은 헤라클레스가 움찔했다.
“확인해 보니, 오거, 미노타우로스, 키클롭스 진영의 우승 후보와 비견되는 몬스터는 헤라클레스 님과 스콜 님 정도에요.”
내 마안으로 평가할 수 없는 강자들이 꽤 많았는데, 나방왕의 확신 어린 분석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궁금해졌다.
“저 녀석은 수백 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무투회에 참석한 놈이야. 이번 예선이 어떻게 치러질지도 파악했을걸?”
나르본느의 말을 들어보니 나방왕은 무투회의 고인물 격인 존재였다.
“뭐… 두 분이 예선에서 통과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요.”
절벽 타기는 분명 곤충족 몬스터인 우리에게 유리한 종목인데, 나방왕의 뉘앙스를 보아 다른 복병이 있어 보였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