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지혜의 문
“뭐, 조만간 알게 되겠지.”
오그무트는 의문을 해결하지 않은 채 구석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했다.
절벽 위로 강세종들이 하나둘 올라왔고, 그들은 먼저 도착한 우릴 보곤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우도, 그만하고 가자.”
우리에게 시비를 걸던 우도 역시 우노라는 동료에 의해 끌려가며 소란이 가라앉았다.
상당수의 강세종이 올라왔을 무렵 전갈왕, 지네왕, 두꺼비왕이 올라왔다.
그들은 강세종처럼 우리를 보고 놀라진 않았다.
“먼저 와 있었군.”
“크크크. 절벽 속으로 기어들어 갈 줄이야…….”
“강세종이 저렇게 많이 남아서야… 본선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정오가 되어갈 무렵, 만신창이의 말벌왕, 모기왕, 바퀴왕, 나방왕이 가드비 두 마리와 함께 올라왔다.
우릴 본 말벌왕의 표정이 굳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했나?”
말벌왕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고, 일행을 데리고 적당한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나방왕 버플은 내 쪽으로 날아와 서러움을 토했다.
“너무했어요. 저도 데려가시지~”
“상황이 급했어. 다음에는 잊지 않도록 노력할게.”
믿을 수 없는 동료만큼 위험한 적은 없다.
그러니 다음이 있어도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과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예선에서 협동 능력이 떨어지는 몬스터 대부분이 탈락했다.
통과자 중 하이 오크, 라미아처럼 개개인이 준왕급에 미치지 못한 몬스터 무리도 간혹 보였지만, 이들의 리더는 준왕급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말벌왕, 모기왕, 바퀴왕 같이 조금 미숙해 보이던 녀석들도 이번 시험에서 급성장을 이룬 듯했다.
그러나 우리 일행과 비견되는 존재는 전갈왕 그룹, 그리고 강세종 중에서도 톱클래스의 강자들뿐이었다.
‘나머지는 크게 신경 쓸 것 없겠어.’
탈락자들은 절벽 아래위로 포진한 시험관들에게 구조됐다.
무력만큼이나 생존력이 뛰어난 놈들이라 로크에게 죽은 녀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많지 않다는 건 죽은 몬스터도 있다는 뜻이다.
각자 영역에서 살며 웬만해선 천수를 누리는 강자의 죽음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앞으로 숲에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통과자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무렵, 시험관이 세 번째 예선이 치러질 장소로 이동했다.
뒤처진 자들은 1차 예선 때처럼 추적 능력을 발휘하여 쫓아갔다.
네론과 나르본느를 먼저 보내고, 한참을 달리자 원형의 거대 건축물이 보였다.
‘뭐야, 저건?’
접근할수록 그 거대함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이곳 세계의 문명으론 만들 수 없는 거대 둠이다.’
도착한 목적지에는 높이가 20미터쯤 될 법한 거대한 철문 세 개가 있었다.
“이곳은 우리들의 성지, 크노소스 궁전이다.”
던전과 같이 마법의 흔적이 가득한 건축물.
“이 궁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설명을 들어보니 미노타우로스들이 만든 것 같진 않았고, 유래를 알 수 없는 고대의 건축물인 듯했다.
“여기서 세 번째 예선 시험을 치르겠다.”
나와 키클롭스를 제외한 참석자들은 건축물에 관심이 없었다.
“됐으니까, 시험 내용이나 말하라고!”
오그무트가 진행을 재촉하자 시험관이 시험 내용을 설명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성지 크노소스 안으로 들어가면 통과다.”
말벌왕이 물었다.
“벽을 부수고 들어가는 건 되나?”
미노타우로스들이 웃음기 머금은 표정으로 말벌왕을 내려다봤다.
“잘 봐라.”
우도가 나서서 문 옆쪽의 벽을 도끼로 내려쳤다.
쿵!
그러자 벽면이 동심원 모양의 물결처럼 요동쳤고, 금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보시다시피 성지는 어떠한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결국 육중한 철문을 통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혼자선 힘들지도 모르겠어.’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면 강세종 중에서도 이 문을 열 수 있는 건 몇 되지 않을 듯싶었다.
‘헤라클레스는 통과할 수 있을 거야.’
헤라클레스를 제외한 동료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나르본느가 말했다.
“네가 생각한 것처럼 힘으로 여는 문이 아니야.”
나방왕도 한마디 했다.
“진정으로 까다로운 문이죠.”
강세종들이 종족별로 뭉쳐 각각 하나의 문을 선택해 다가가자 문이 절로 열렸다.
그들이 들어가고 나니 문이 닫혔고,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남은 약세종들이 시험관에게 항의했다.
“안 열리잖아!”
“우린 왜 못 들어가는 거야!”
“시험은 시작됐다. 이 문은 이제 열리지 않을 테니 다른 문을 찾아봐라.”
네론이 잠시 어딘가 갔다 오더니 벽면 곳곳에 철문이 있음을 알려줬다.
다른 참가자들도 이를 파악했는지, 파티 별로 흩어지며 자동으로 열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문들이 모인 곳을 관찰했다.
손잡이마다 각기 다른 생물의 형태를 했고, 문의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20미터짜리가 있는가 하면, 하이 페어리나 출입 가능한 작은 문도 있어.’
누군가 들어가면 손잡이의 생물이 눈을 감으며 다신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나방왕에게 저 문이 왜 까다로운 것인지 물어봤다.
“정보를 주면 이번 예선에서 함께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내키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타우로스는 몬스터 중에서도 지혜롭기로 유명하죠.”
지혜로운 미노타우로스를 본 적이 없어 의아했지만, 계속 들어 봤다.
“크노소스 궁전의 문 너머에는 또 다른 문이 존재해요. 우린 그 문을 지혜의 문이라 불러요.”
문 너머에는 문제를 내는 문이 있고, 그걸 맞혀야 문이 열린다고 했다.
“손잡이의 생물은 문제의 난이도와 유형에 영향을 줘요. 문에 새겨진 문양에 힌트가 있다곤 하는데… 구체적인 건 미노타우로스들이나 알고 있을 겁니다.”
미노타우로스와 키클롭스는 문제 유형을 알고 있어 지혜의 문을 손쉽게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관문은 사실 오거를 줄이기 위한 건데, 약세종도 비켜 갈 순 없죠.”
나르본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멍청한 게 아닌데, 지혜의 문에서 번번이 막혔어.”
헤라클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내용은 파악했으니, 적당히 쉬울 듯한 문을 찾아 봤다.
‘최대한 지능이 낮은 생물을 찾자.’
쥐? 왠지 모르게 똑똑할 것 같고, 고블린은 일견 멍청해 보여도 매우 영악한 놈이고.
개미족은 엄청난 연산력을 지니고 있으니 분명 어려운 문제가 나올 것 같고, 인간은 매우 복잡하니…….
‘멍청한… 멍청한…….’
고르고 골라, 오크 손잡이의 문을 택했다.
‘무식한 무투파인 오크라면, 문제 난이도가 높진 않을 거야.’
문고리를 골랐으니, 문에 양각된 그림을 눈에 담았다.
‘이게 힌트란 말이지.’
숲에서 각종 생물이 서로를 노리는 듯한 그림.
마치 생태계의 약육강식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가 보죠.”
나와 나방왕을 포함해 총 일곱 마리.
열린 문으로 들어오니 통로가 나왔고, 통로 끝에는 10미터쯤 되는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오크 형태의 손잡이만 해도 나 정도는 한입에 꿀꺽할 정도로 컸는데, 갑자기 손잡이가 말했다.
“세 개의 문제를 내겠다. 하나라도 맞추면 지나가게 해 주지.”
세 문제 중 하나만 맞춰도 되니 부담이 줄었다.
첫 번째 문제는 일견 수학 문제처럼 보였다.
“하이 오크 대전사가 송곳니 열 개를 가지고 서인족을 만났다.”
서인족은 멸종이라도 했는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족이라, 나르본느에게 물어봤다.
“서인족은 쥐를 닮은 수인이야. 체내에 마석이 없고, 마신어도 쓰지 못하니,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
“하이 오크는 서인족이 팔고 있는 물건에 관심을 가졌고, 세 개의 송곳니로 팔아 준다고 하여 거래를 했다. 자, 그럼 하이 오크의 수중엔 몇 개의 송곳니가 남았는지 맞춰 보아라!”
나르본느가 당당하게 외쳤다.
“칠! 칠! 열 개에서 세 개를 뺏으니 칠이야!”
“확실한가? 바꿀 기회를 한 번 주지…….”
문의 오크가 웃음기를 머금은 게 일행의 불안감을 자극했고, 나방왕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르본느에게 말했다.
“지혜의 문은 절대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그러니 멍청한 고블린이라도 풀 수 있는 이 문제에는 분명 함정이 있겠죠.”
“그럼 칠이 아닐 수 있다는 거야? 그럼 몇이라는 거야?”
나방왕이 머리를 열심히 굴릴 때, 난 9를 떠올렸다.
‘난센스 퀴즈라면 하이 오크가 가진 송곳니 두 개를 더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군.’
나와 나방왕이 동시에 9라고 외쳤다.
우린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확실한가? 한 번 더 바꿀 기회를 주지…….”
문의 오크가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것도 잠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틀렸다! 오크 전사장은 거래 따윈 하진 않는다! 그러니 정답은 자신의 송곳니와 서인족의 송곳니를 더한 14에서 서인족이 가진 송곳니를 모두 약탈한 값이다. 크하하하!”
고래가 오징어를 먹고 알을 낳으면 무게는 얼마일까요 라는 문제가 떠올랐다.
무게에 초점을 맞췄다간 포유류가 알을 낳지 않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그런 거였나?’
일행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할 때, 다음 문제가 나왔다.
“하이 오크 대전사가 군대를 이끌고서 머리 아홉 개인 히드라의 목 두 개를 베어 냈다. 남은 히드라의 머리는 몇 개일까?”
히드라?
서인족처럼 본 적 없는 몬스터.
“남쪽 독지 끝을 지키는 녀석이야. 엄청난 재생력으로 아홉 머리를 동시에 베지 못하면 죽지도 않지.”
아홉 머리 중 두 개를 벴으니 칠?
나와 같은 급속 재생을 갖춘 듯하니 여전히 구?
그것도 아니면 오크 대전사는 히드라를 베지 못한다?
일행과 논의 끝에 여전히 아홉 개가 남았다고 답했더니, 문의 오크가 비릿하게 웃었다.
“틀렸다. 대전사가 머리 두 개를 떨어뜨릴 동안, 다른 오크들을 손가락만 빨았겠냐? 당연히 나머지 머리를 잘랐겠지!”
나와 헤라클레스를 제외한 일행들은 다음 문제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마지막 문제다. 가장 귀한 금 세 개를 말해 봐라.”
일행은 이미 포기한 눈치여서 의견이 없었다.
‘이 문제, 어디서 많이 본 문제군.’
전생에선 현금, 쬐금, 거금, 방금, 입금, 선금, 정산금같이 각종 답변을 조합할 수 있어 꽤나 재밌는 퀴즈였지만, 이곳에선 정직한 답변을 내 봤다.
“황금, 소금, 그리고 지금이다.”
돈과 소금은 없어선 안 되는 것이고, 시간은 그 무엇보다 귀하다.
“틀렸다! 황금, 순금, 백금이다!”
그럴 줄 알았다.
오크 지능에 맞춰 풀면, 그런 답도 있을 테니.
문의 오크가 우릴 비웃었다.
“멍청한 놈들에게 열어 줄 문은 없다. 꺼져라! 좀 더 공부하고 오도록!”
“또 여기서 탈락하다니…….”
나르본느가 과거의 기억이라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방왕이 실망한 채 내게 말했다.
“나가서 다른 문을 찾아보죠. 이 문은 더는 열리지 않아요.”
일행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몸을 돌렸지만, 나와 헤라클레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문의 그림과 전혀 관계없는 문제들이야.’
나와 헤라클레스는 애초에 문제를 진지하게 풀고 있지 않았다.
“할 만하겠군.”
“이 정도는 충분하죠.”
우리가 다가가자 문이 당황했다.
“뭐야? 왜 오는 거야? 너희는 탈락이니까 빨리 꺼지라고!”
베르제붑 던전의 마법 문도 힘으로 열었던 나다.
문을 본 순간 어느 정도 힘이 필요할지 견적을 마친 상태였다.
나와 헤라클레스가 각각 문짝 하나씩을 맡아 밀었다.
개미의 힘과 오거의 힘.
그리고 대지를 단단히 부여잡는 금강의 마력.
문짝이 삐걱거리며 밀리기 시작했다.
“지혜의 문이여. 나는 갑각충의 왕, 헤라클레스다. 네놈이 물러가란다고 물러날 정도로 왕의 걸음은 가볍지 않다!”
감정을 고양시킨 헤라클레스는 금빛으로 빛났고, 빛이 짙어질수록 힘이 증가했다.
그가 맡은 문도 조금씩 밀렸다.
나와 헤라클레스가 힘으로 문을 활짝 열어 버리자, 나방왕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나머지 일행들은 어깨를 펴곤 당당히 걸어왔다.
문의 오크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개미족과 갑각왕. 정답이다! 힘이 없으면 머리가 고생하는 법! 힘만 있다면 지혜 따윈 필요치 않다! 지나가도 좋다!”
나르본느가 입술을 삐죽이며 한마디 했다.
“뭔 소리래?”
3차 예선 시험 지혜의 문을 지나쳐 통과자들이 모이는 공터에 들어섰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