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블레이더 킹 크라스
7차 예선이 시작됐을 때, 나는 크라스의 상태를 나르본느에게 알려 줬다.
“마력이 모여들고 있어요.”
크라스는 자이언트 맨티스에서 진화한 블레이더.
그 힘은 3차 진화종인 울트라를 가볍게 넘어서긴 했으나, 종의 격은 개미족의 3차 진화종과 같았다.
진정한 왕급으로 발돋움하기에는 부족했던 크라스.
“녀석, 드디어 진화인가?”
비워진 그릇을 채우기 위해 대기의 마력이 모여드는 건 진화의 징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전 개미족이라 잘 모르겠어요.”
“알겠어. 그럼 내가 지켜볼게.”
나르본느는 크라스가 무사히 진화할 수 있도록 지켜 주기로 했다.
그렇게 숲에 들어서자마자 외곽 구석에 안식처를 만든 나르본느.
지네왕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음을 거미 지배를 통해 알게 됐다.
“이런. 갈파고스 녀석과 난 상성이 좋지 않은데…….”
평소였다면 격돌을 피했을 테지만, 진화의 징조를 보이는 크라스가 깊은 잠에 든 상황.
“시간을 벌어야겠어.”
나르본느가 대응에 나섰다.
* * *
지네왕은 거미줄 함정이 보이기 시작하자, 팔을 채찍처럼 휘둘러 나무들을 쓰러뜨렸다.
이는 거미줄을 치움과 동시에 나르본느의 입체 기동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나르본느가 그 틈을 노려 기습을 감행했다.
사각인 등을 노렸는데, 접근하기도 전에 지네왕의 팔에 막혔다.
“쳇.”
나르본느는 과거의 전투를 떠올렸다.
‘놈과의 전투에선 수읽기는 무의미해.’
지네왕의 늘어나는 팔은 의식이라도 있는지 가끔 알아서 움직이며 적을 요격했다.
“크크크, 오랜만이다 거미왕!”
“그렇네.”
떨떠름한 표정의 나르본느가 뒷걸음치며 그를 유인하려 했으나, 지네왕은 그녀를 쫓지 않았다.
‘이 녀석!’
지네왕은 나르본느가 맘먹고 도주하면 잡을 수 없으니, 그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크라스부터 제거하려 했다.
“도망칠 거면 어서 가라. 사마귀 녀석은 잘 먹겠다.”
“하… 누가 간다는 거야?”
유인에 실패한 나르본느는 전략을 수정하며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하와 영감이 우리만 느낄 수 있는 독을 묻혀 뒀지.”
“역시…….”
나르본느는 지네왕의 사정거리 밖에서 시간을 끌어 보려 했으나, 지네왕이 길어지는 팔로 바닥을 밀어내며 돌진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나르본느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런!”
나르본느를 가두듯 사방에서 몰아치는 지네왕의 팔.
그녀의 공격력으론 지네왕의 강력한 팔을 밀어내지 못했다.
‘이대론 놈에게 잡힌다!’
이를 악문 나르본느가 지네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과거 암흑신전의 동료들에게서 받은 명검 한 쌍이 휘둘러졌다.
촥!
상당한 절삭력을 자랑하는 물건이었지만, 지네왕의 외골격을 뚫기에는 부족했다.
“크크크, 간지럽다!”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나르본느를 향해 사방을 점한 지네왕의 팔이 조여 왔다.
“큭.”
나르본느는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잡혔다.
“크크크! 끝이다! 거미왕!
지네왕이 나르본느를 힘껏 조이자 나르본느가 피를 토했다.
“컥!”
* * *
나르본느 쪽의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다.
‘이 속도로는 늦어.’
더 빠른 속도.
‘이동 기술이 필요해!’
금강 모드의 나는 감각이 둔해지고 느려진다.
그래서 이동 중에는 항상 공허 모드였다.
‘폭렬기의 충격 에너지를 이동에 써야 해!’
폭렬기를 쓰기 위해선 대지 속성의 마력이 필요하여 금강 모드가 필요하다.
금강 모드로 전환한 나는 그동안 창끝으로만 펼치던 폭렬기를 발바닥에 집중하여 터트렸다.
쾅!
그렇게 나는 발을 교차해 가며 폭렬기를 터트려 앞으로 나아갔다.
‘됐어!’
그동안 구상하고 있던 이 기술을 폭렬기동이라 칭하기로 했다.
폭렬기동은 돌진 속도를 다섯 배 이상 올려 줬지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여 이동 중 전황을 살피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아직 숙련도가 떨어져서 방향 제어가 힘들었다.
비유하자면 타이어가 마모된 차량으로 시속 200킬로를 밟아 질주하는 감각.
즉, 핸들이 먹통이 된다.
몇 차례 나무에 부딪히거나 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바닥을 구르며 돌 모서리에 찍히기도 했고,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찔리기도 했다.
상처는 금세 회복됐지만,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다.
‘큭.’
늦으면 나르본느와 크라스를 영원히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폭렬기동을 써야 했다.
어느 정도 이동 후 개미 지배를 활성화하여 상황을 살폈다.
나르본느가 당하며 급하게 이동할 이유가 사라졌다.
‘흠.’
나는 잠시간 나무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그러곤 지네왕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여 움직였다.
“복수는 해 주마, 나르본느.”
* * *
나르본느가 속박당하며 지네왕의 승리는 확정됐다.
“왜 저번처럼 도망가지 않았지? 사마귀 따위에게 정이라도 들었나?”
지네왕의 의문에 나르본느가 웃었다.
“그냥, 도박이었어.”
“도박?”
“그리고 도박은 성공했지.”
지네왕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부상으로 누워 있어야 할 크라스가 걸어 나왔다.
“크크크, 이게 그 도박의 결과라면 참 소박한 걸?”
“얕보지 않는 게 좋아. 저 녀석은 저래 보여도 삼대 충족 중의 하나니까.”
“크크크, 삼대 충족? 언제 적 이야기냐?”
지네왕은 팔에 힘을 가해 나르본느를 으스러뜨린 후 옆으로 내던졌다.
그러곤 걸어 나온 크라스와 마주했다.
“사마귀 주제에 회복이 빠르군. 그런데 이게 어쨌다는 거냐?”
“쿨럭.”
만신창이의 나르본느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멍청한 놈… 삼대 충족도 모르다니… 삼대 충족은…….”
나르본느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기절했다.
지네왕의 면전에서 탈피를 마친 크라스.
“기다려 주지 않아도 됐지만, 일단 고맙다고 해 두지.”
크라스의 초록 피부가 살색이 됐고, 부분적으로 얇은 외골격이 자리했다.
지극히 인간 같은 외형에 등에는 사마귀 앞발 두 쌍이 달렸고, 양 허리에 사마귀 낫처럼 생긴 도검 두 자루가 붙어 있었다.
날개가 퇴화한 대신 사마귀 앞발 한 쌍이 더 늘어난 격.
즉, 그가 검을 뽑으면 육도류가 되는 것이다.
“블레이더 킹, 크라스다.”
“알고 있다. 사마귀.”
지네왕은 진화한 크라스를 유심히 관찰하며 생각했다.
‘날카로워 보이나 외골격은 형편없군, 내 상대는 아니야.’
지네왕은 자신의 상성 우위를 의심치 않았다.
“크크크, 사마귀. 넌 날 이길 수 없다.”
“왜지?”
“이 외골격을 보고도 모르겠나?”
크라스는 양손에 그러쥔 검과 사마귀 앞발 두 쌍을 점검하곤 말했다.
“모르겠군.”
“멍청한 놈이군. 네 공격은 내게 무의미하단 말이다!”
크라스는 과거 다크가 해 준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뭐든 뚫는 검과 뭐든 막는 갑옷. 어느 쪽이 더 강할 것 같나?”
지네왕은 담담하게 접근해 오는 크라스의 행태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자신의 강함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진 지네왕이 크라스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크크크, 당연히 내 갑옷이 더 강하지!”
휩쓸리면 강세종이라도 뼈를 추릴 수 없는 지네왕의 맹공.
그에 맞서 크라스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사마귀 앞발 두 쌍을 휘둘렀다.
카카카캉!
자신의 공격을 이만큼 버틴 자를 처음 겪는 지네왕은 잠시 당황했고, 이어서 감탄했다.
“대단해! 내 공격을 상쇄하다니!”
지네왕은 크라스가 자신의 일격을 상쇄하기 위해 세 번 이상의 검격을 쏟아내고 있음을 인지했다.
“크크크, 하지만 네놈의 무리한 움직임. 왕급의 육신이라 해도 오래 버틸 수 없을 테지!”
확실히 크라스의 몸은 빠르게 가열됐고, 푸른빛을 띠던 마강기 역시 마찰열로 인해 붉게 타올랐다.
이어진 크라스의 행동에 지네왕은 다시금 놀랐다.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도 놀라운데, 허리의 도검을 뽑아 들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기 때문이다.
“크크크.”
지네왕은 눈치챘다.
크라스 녀석이 단기전을 원한다는 걸.
‘자멸하기 전에 한 방 먹이고 싶은가 보군.’
지네왕은 더욱 강렬히 몰아쳐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럼에도 크라스는 여섯 칼날로 초당 수십의 검격을 쏟아내 지네왕의 공격을 쳐 내며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갔다.
사마귀 앞발이 닿을 거리에 도달한 크라스를 보며 감탄한 지네왕이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나의 공격을 뚫고 이곳까지 도달한 놈은 네가 처음이다. 그러니 인정하지. 넌, 왕의 자격이 있다.”
“내 손에 죽을 놈이 주는 자격 따윈 필요 없다.”
“크크크. 그래, 왕이라 불릴 몬스터에게 누군가 쥐여 주는 자격 따윈 필요 없지. 그럼 살아서 증명해 봐라! 네놈이 진정으로 왕의 칭호에 어울릴 존재임을!”
지네왕의 전신이 붉은 강기로 덮였고, 그의 팔이 허공에서 똬리를 틀더니 크라스를 가두었다.
“천망압살!”
체구가 작은 곤충족에겐 벗어날 수 없는 필중 조이기.
크라스는 그에 맞서 초음속의 연속 찌르기를 시전했다.
고속의 찌르기가 여섯 점을 향해 정확히 꽂히며 강렬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쾅!
굉음과 함께 빈틈없던 지네왕의 천망압살이 열렸다.
열린 틈을 이용해 크라스의 찌르기가 지네왕의 가슴을 때렸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공방.
지네왕이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내 천망압살을 깨트린 비기… 이름은 있나?”
“그런 건 없다.”
“아쉽군.”
지네왕의 외골격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갑옷이 검에 뚫렸군…….”
지네왕이 뒷걸음치며 거리를 벌렸고,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크크크, 검왕 크라스! 본선에서 네놈을 기다리겠다.”
크라스는 물러나는 지네왕을 쫓지 않았다.
“다음에는 확실히 죽여주마. 지네왕 갈파고스.”
사실은 쫓을 수가 없었다.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의 속도를 내서 몸이 망가진 것도 있지만, 전신이 으깨진 나르본느의 응급조치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
나르본느에게 다가간 크라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응급조치 같은 건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 * *
겉으로 보기에는 팔과 가슴, 외골격이 갈라진 정도의 상처였지만, 실상 지네왕의 상처는 매우 깊었다.
“쿨럭…….”
크라스가 있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지네왕은 적당한 나무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크크크, 내가 당할 줄이야.”
몇 달 쉬면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이라 적당한 장소를 찾아 숨어들었다.
“회복한 후에 거슬리는 녀석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것도 재밌겠어.”
그의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숲의 청소부들이 지네왕이 쉬도록 내버려 두질 않았기 때문이다.
“개미 새끼들이!!”
모여든 개미들을 치우면 다시 모여들어 지네왕의 몸을 타려 했고, 장소를 여러 차례 바꿔도 또다시 몰려와 지네왕을 괴롭혔다.
지네왕은 누군가 개미를 조종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소리쳤다.
“나와라! 죽여주겠다!”
한참 동안 소리쳐도 나오지 않는 상대.
주변을 경계하며 나무에 기대 주저앉은 그에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든 지네왕이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건 짙은 흑색의 창끝이었다.
푹!
* * *
크라스가 나선 순간.
나는 그가 어느 정도 버텨 줄 거라 생각했다.
‘놈은 블레이더 시절부터 왕급들과 호각을 다투던 녀석이야.’
그런 녀석이 진화까지 했으니, 내가 도착할 시간은 충분히 벌어줄 터.
나는 지네왕의 퇴로를 고려하여 이동 경로를 수정했다.
그렇게 이동하던 중 승패가 갈렸다.
양패구상.
둘 다 언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막타의 기회가 찾아왔으나, 지네왕이 어떤 비장의 수를 감춰 두고 있을지 몰라 신중히 접근했다.
개미들을 조종해 지네왕을 괴롭힌 나는 놈에게 비장의 수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녀석의 미간을 꿰뚫어 버렸다.
곤충족 중에는 생명력이 질긴 놈들이 많기에, 뇌를 두어 번 휘저어 주고 가슴의 마석을 빼낸 후 신체를 다져 버렸다.
“이 정도면 바퀴 녀석이라도 죽을 거야.”
마안으로 생명력이 확실히 꺼졌음을 확인한 나는 놈의 마석을 확인했다.
“이것도 특상급이잖아!”
오그르트 수준의 마력량.
지네왕 녀석,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놈이었던 것이다.
흡수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 일단 사교위에 넣어 두고, 나르본느와 크라스를 찾았다.
크라스는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나르본느를 지키고 있었다.
“왔군. 그럼 뒤를 부탁한다.”
나를 본 크라스는 안심한 표정으로 쓰러졌다.
당장에 최상급 포션을 뱉어 주고 싶었으나, 사교위에 들어간 두 마석으로 인해 오염된 포션은 독극물이나 마찬가지라 꺼내 쓸 수가 없었다.
접착액과 주변의 나뭇가지를 활용해 둘의 신체를 고정했고, 출혈도 막았다.
응급조치를 끝낸 나는 두 녀석을 디아가 있는 곳에 데려갔고, 숲 밖을 지키던 시험관들에게 치료를 맡겼다.
다시 전장으로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며 상황을 살펴 보니, 모기왕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미노타우로스 참석자와 시험관을 학살하고 있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