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토너먼트
가끔 발생하는 옐로우 로커스트 떼.
하나하나가 그리 강한 녀석은 아니라지만, 집단을 형성하여 이동하는 놈들은 황색 폭풍으로 불리며 언제 어느 때에 만나도 재앙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 놈들이 발생했을 때는 나르본느를 비롯한 왕급 몬스터들이 나서서 수를 줄여 줬고, 갑각왕이 갑각충들을 이끌고 나서서 격퇴했다.
당시 갑각충들은 큰 피해를 보았고, 개미족은 고품질 영양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의 축복 기간.
지능 높은 왕급 몬스터들이 자리를 비우며 로커스트들은 아무런 견제 없이 평소 이상의 속도로 수를 불릴 수 있었고, 10만이 넘게 불어난 그들 사이에선 상위종인 하드 로커스트가 대량으로 발생한 상황이었다.
“결비만 아니었어도…….”
페르는 대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이번 해의 공주들은 로커스트들의 먹이로 전락한다.
‘어떻게 준비한 건데…….’
이번 행사를 위해 쏟아부은 자원과 노동력을 떠올린 페르는 눈을 찔끔 감았다 뜨곤 포메온의 등에 올라타며 외쳤다.
“총동원령을 발동해! 하위 군체 애들도 모두 나오라 해!”
페르의 말을 들은 포병대와 살아남은 소드 앤트들이 흉흉한 기세를 일으켰고, 각지에 흩어져 공주 개미들을 보호하던 개미 부대들이 남쪽으로 진격하여 일만이 넘는 군세를 만들었다.
하늘을 노랗게 물들인 로커스트와 지상을 검게 물들인 개미족의 격돌.
포스의 광범위 버프와 포메온의 영역 선포까지 더해져 개체의 무력으론 개미족이 압도했으나, 공중 몬스터인 놈들은 개미족을 무시한 채 북진하여 결비 중인 공주와 수개미를 포식했다.
‘아…….’
로커스트를 막지 못한 개미족이 절망할 때, 네론이 남쪽에서 자이언트 네우라 무리를 이끌고 왔다.
“마음껏 먹어 치워라!”
약 300마리의 네우라가 로커스트들을 학살했으나,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그 영향은 미미했고, 물량에 휩쓸린 네우라들이 하나둘 추락했다.
“더는 힘들 것 같군.”
지친 네론이 후퇴를 고려할 때, 오크나무 숲을 침범당해 화가 잔뜩 난 갑각충들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둥지를 습격당한 말벌족 무리도 군단을 형성하여 가세해왔다.
‘저건… 다크가 살려 둔 말벌족들이잖아?’
말벌족의 도움을 받게 된 페르는 다크의 안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오늘이었던 건가? 머리가 좋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개미족이 궁기병과 포병으로 갑각충, 말벌족, 네우라들을 지원하여 로커스트 무리를 줄여 갔다.
전투와 결혼 비행은 수일간 이어졌다.
로커스트들은 아카시아 숲 너머의 황무지로 쫓겨났다.
피해는 컸지만 숲에는 대량의 부산물이 쌓였고, 천 마리의 공주가 살아남아 무사히 빅 퀸으로 진화했다.
진화한 그들 중 800마리는 페포케 군체가 준비해 둔 둥지에 입성했고, 나머지 200마리는 신천지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아… 하아…….”
페로몬 능력을 극한으로 사용하며 로커스트와 직접 싸우기까지 한 페르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죽는 줄 알았잖아.”
그를 호위하던 제르다코와 포메온도 몸 성한 곳이 없었다.
포스 또한 다크 비스트에게 당한 상처를 회복하기도 전에 전장의 선봉에 서게 되서 깊은 내상을 입었다.
피투성이의 블러리와 포룸.
갈라진 외골격의 메가피르와 게르피아.
핵심 전력들이 하나둘 페르에게 모여 서로의 생사를 확인했다.
페르가 숨을 헐떡이며 주먹을 들자, 모여든 개미들이 주먹, 혹은 앞발을 치켜들어 소리 없이 승리를 선언했다.
* * *
무투회 참석 명단을 받아 본 미노스와 우마십장.
우노가 트롤레에 밀려 떨어진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개미족의 워커가 7위로 진출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고, 곤충족인 갑각왕이 1위라는 것도…….
침울한 공기를 환기하듯 우마십장 중 하나가 말했다.
“그래도… 놈들은 들러리에 불과해.”
그의 말에 동의하듯 또 다른 우마십장이 말했다.
“애초에 무투회는 강세종들이 무력을 겨루는 행사다. 약세종에겐 관전석이 어울리지.”
선민사상에 빠져 있는 우마십장들을 내려다보며 미노스는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지혜의 종족으로 불리던 우리도 예전 같지가 않군.’
미노스는 무투회 준비를 지시하며 회의를 마쳤다.
대전에 홀로 남은 그는 변수로 가득했던 예선을 떠올리곤 우고를 불렀다.
미노스는 우고에게 대진표를 보여 주며 물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느냐?”
우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무투회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상대가 누구라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담담하면서도 밝게 빛나는 우고.
미노스는 그런 우고를 통해 미노타우로스의 미래를 봤다.
‘그래, 우고라면 나의 뒤를 이어 일족을 책임질 수 있을 거야.’
* * *
무투회 관전을 위해 다양한 몬스터가 크노소스 궁전을 찾아왔다.
‘예선에서 탈락한 몬스터도 있군.’
숙소 부족으로 일행끼리는 같은 공간에 머물러야 했고, 버플, 스콜, 키르는 우리 일행이 아니었지만, 미노타우로스들의 사정으로 같은 공간을 쓰게 됐다.
각 몬스터에겐 제물로 바쳐진 인간이 시중을 들어 줬다.
“배고픈데 먹어 버릴까?”
며칠을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인간을 처리하는 건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없었다.
“나르본느, 이거 좀 먹어 봐요.”
마력과로 만들어진 영양 엑기스를 맛본 나르븐느는 더는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부분 몬스터는 미노타우로스가 붙여 준 인간을 꿀꺽해 버리는 바람에 연락책을 잃고, 식수와 식량 보급도 끊겼으며 길을 안내해 줄 내비도 잃게 됐다.
궁전에선 몬스터끼리의 다툼이 빈번하여 우린 외출을 삼가기로 했는데, 버플은 요리조리 날아다니며 다양한 몬스터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그가 제공하는 정보는 주로 예선전에서 활약한 약세종에 대한 내용이었고, 간혹 종족간 갈등을 부추기는 내용이 섞여 있었다.
‘저 녀석…….’
교묘하게 감췄지만, 마력의 파장만큼은 숨길 수 없다.
놈의 실실 웃는 미소 뒤로 숲의 평화를 깨려는 광기가 엿보였다.
“네놈, 그게 전력은 아니었겠지?”
“나의 전력을 보고도 살아 있는 몬스터는 없다.”
스콜은 헤라클레스를 주시하며 시간을 보냈고, 가끔 도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럼, 내가 최초가 될 것 같군.”
“네놈 수준으론 무리일 거다.”
키르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 가끔 숙소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간 키르는 자신을 보며 벌벌 떠는 존재들을 보며 의아했다.
“내가 약한 게 아닐 지도 모르겠군.”
다시금 숙소로 돌아온 그는 헤라클레스, 나르본느, 스콜, 크라스에게 치여 구석에 찌그러졌다.
“역시 난 약한 건가?”
버플은 그런 키르를 안타까워하며 킬러 킹이 가진 잠재력을 알려 줬다.
“종족마다 지휘, 무력, 생산 같이 특화된 부분이 달라요. 저 같은 경우는 독과 지휘에 능해서 무력이 약한 편이고… 말벌족의 경우 무력에 특화된 종이죠.”
버플은 말벌족의 잠재력이 삼대 충족 이상이라 말해 줬다.
“삼대 충족?”
“하늘의 네우라, 방벽의 갑각충, 사냥의 맨티스… 이렇게 셋을 삼대 충족이라 해요.”
“거미와 개미는 속하지 않나 보군.”
“개미족과 거미족은 조금 특수한 편이니까 삼대 충족보다 더 까다로워요. 그리고 말벌족도 마찬가지죠. 특히 킬러 킹은…….”
버플은 한동안 키르를 졸졸 따라다니며 많은 걸 알려 줬다.
‘흠.’
버플 덕에 날이 갈수록 성숙해지는 키르.
개미족 군체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볼 때, 저 녀석만 굴복시키면 정찰 개미들만으로 메울 수 없던 공군 전력을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영입 시도라도 해 볼까?’
말벌족이 원할 법한 대가를 고민하던 어느 날, 키르가 내게 물었다.
“너는 워커가 아닌가?”
“맞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버플이 안 알려 줬어?”
“버플도 개미족의 워커는 약하다고 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거니까.”
“예외? 모르겠군.”
내가 창을 다듬거나 휘두를 때면 키르가 눈에 불을 켜고 나의 창술을 눈에 새겼다.
내가 아는 건 기초 창술 정도여서 보여도 무방한 동작들인데…….
‘뭐, 기초라도 극한으로 연마하면 상급 창술이 필요 없긴 해.’
놈이 품고 있는 적의를 줄여 보고자 창술을 조금 가르쳐줘 봤다.
“잘 봐둬. 찌를 때는 이렇게, 막는 동작으론 이런 게 있어.”
소재가 좋아서 그런지 그의 학습력은 뛰어났고, 창술을 배운 그의 성장은 폭발적이었다.
“넌 왜 날 죽이지 않는 거지?”
“음…….”
이유는 간단하다.
개미족에겐 말벌족에게 특효인 연막이 있다.
그래서 말벌족은 우리에게 있어 언제든 맛볼 수 있는 도시락 같은 존재였다.
‘맛 좋은 도시락을 아껴 두는 심정이랄까?’
그래서 처리를 미루고 있었는데, 키르에겐 말벌족과 개미족의 유사성을 들어 친척 관계라고 이야기해 줬다.
“그런가?”
긴가민가해 하는 키르.
“난 태어난 순간부터 개미족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
킬러 킹의 탄생 배경을 듣게 됐다.
놈이 품은 적의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개미족에게서 일족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군.’
이용할 수 없다면 지워 버리는 게 좋을 듯하여 놈에게 물어봤다.
“지금 네 힘으로는 나조차 상대할 순 없어, 그런데도 개미족과 맞설 거냐?”
키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멍청하지 않다. 그러니 힘을 키울 거다.”
나와 키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버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끼어들었다.
“다크 님, 키르 님은 아직 어리기도 하고…….”
버플이 키르에게 기대하는 게 있듯이, 나 또한 그를 써먹고 싶었다.
“네가 날 넘어서는 순간은 오지 않아. 그럼에도 넘어섰다고 느낀 날이 오면 도전해라!”
내게는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힘이 더 많으니, 분명 놈이 착각하는 순간이 올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때, 내게 패하면… 나의 충실한 부하가 돼라.”
나의 제안에 놈이 승낙했다.
이걸로, 키르는 나의 예비 노예… 가 아니라 예비 부하가 됐다.
앞으로 부하가 될 놈이니, 여러 가지 가르쳐줬다.
많이 가르쳐 둬야 그날이 앞당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후.
대기의 마력이 요동쳤다.
시중을 들던 인간이 삼신전과 함께 궁전 중앙에 위치한 투기장이 열렸음을 알려 줬다.
일행이 숙소를 나섰고, 나르본느가 들뜬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날 불렀다.
“다크, 가자!”
투기장 관중석 한 쪽을 차지하게 된 일행.
어째서인지 버플, 키르, 스콜도 함께였고, 근처에 라미아 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 안 보이던 바퀴왕도 보였다.
결투장에 올라온 미노타우로스가 대진표를 발표했고, 이를 들은 일행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8강전에서 우고와 트롤레를 붙이다니, 힘을 비축하겠다는 속셈이군.’
편파적이긴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나의 8강 상대는 우도였고, 4강에선 스콜과 헤라클레스 중 하나와 붙게 되니, 헤라클레스가 이기면 둘 중 하나가 기권해주면 될 듯했다.
“우마십장 후보, 괴력의 우도!”
콰아아앙!
우도가 등장하며 경기장 바닥을 세차게 후려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와아아아!”
우도는 미노타우로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데몬 앤트 다크!”
“발라 버려!”
우도가 불릴 때와 달리 날 응원해 주는 몬스터는 나르본느 뿐이었다.
관중석에서 한참이나 뛰어야 결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 대기실도 없는 건가?’
우도와 달리 볼품없는 등장에 몬스터들의 비웃음을 샀다.
강세종을 위해 만들어진 결투장이라 축구장 두 개를 합친 것만큼 컸다.
‘덩치만큼이나 스케일이 다르군.’
바닥도 단단한 금속이라 쉽사리 깨질 것 같지 않으니.
‘전력을 다할 수 있겠어.’
우도와 마주하며 서로 인사를 나눴고, 주변을 둘러보니, 우도 수준의 마력을 품은 미노타우로스가 여덟 마리가 보였다.
‘저게 우마십장이란 놈들이군.’
그리고 한쪽에는 우고에 비견되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가 미노타우로스들의 왕, 미노스인 것 같았다.
즉, 우고의 마력이 미노스와 동등한 수준이라는 것이고, 그에 맞먹는 오그무트와 클롭 또한 미노타우로스 킹에 뒤지지 않는 힘을 갖추고 있으니.
‘여기서 우승하면, 숲의 최강이 되는 거군.’
주변을 둘러보던 내게 우도가 말했다.
“이번에는 저번 같은 행운은 없을 거다.”
“행운?”
예선전 때 흥분한 놈이 던진 도끼를 두 번이나 같은 곳을 쳐서 돌려준 적이 있다.
“8강전 첫 결투를 시작하라!”
관중석 한 편에 있는 미노스의 외침으로 결투가 시작됐고, 우도가 날 향해 도끼를 내려쳤다.
힘을 모을 시간은 충분치 않았지만, 나의 창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예전에 쳤던 그곳에 도달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