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관계를 맺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무투회에서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진운만으로 우승을 차지하다니, 그것도 제왕 탄생의 징조가 보인 무투회에서 강세종도 아닌 곤충족이…….
그동안 받은 충격과 또 다른 의미의 충격을 받은 미노스.
그는 허탈해하며 울 듯한 심판의 시선을 회피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우마십장들도 넋 나간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이대로 정적이 길어지면 우고의 상태 확인이 늦어질 거라고 인지한 미노스가 현실을 받아들였다.
“심판, 결과를 발표하게.”
잠시 망설이던 심판도 쓰러진 우고를 보곤 외쳤다.
“승자는 개미족의 다크!”
환호는 없었고, 장내에선 정적만이 흘렀다.
* * *
모기왕의 마석을 흡수한 나는 상대가 품고 있는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우고의 몸속에선 제어되지 못한 마력이 날뛰고 있었지만, 생명력 자체는 강성하니 당장에 죽을 것 같진 않았다.
‘다행이야.’
심판은 이를 갈며 내게 말했다.
“운으로 우승까지 할 줄이야…….”
준결승에 이어 결승까지 부전승이라니.
내게도 예상 밖의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 전투에서 힘을 보였어야 했어.’
힘을 어느 정도 보여야 앞으로 귀찮은 일이 적을 것이고, 미노타우로스와의 교섭에서도 동등해질 수 있는데.
‘이걸 어쩌나…….’
“무투회에서 우승했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네놈은 단지 운빨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인 가짜임을 명심해라.”
나 역시 복잡해진 상황에서 심판이 자꾸 시비를 걸어오자 좋은 말이 나올 수 없었다.
“넌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산거냐?”
“그게 무슨 말이냐?”
“네놈의 불운 덕에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거 아니겠어?”
“…….”
“그러니 착하게 좀 살자.”
몬스터에게 선악의 기준 따윈 없다.
미노타우로스는 숲에서 다양한 종족과 관계를 맺고 있어 그들을 좋게 보는 종족도 다수 있으나, 개미족의 입장에선 영역 확장을 방해하는 놈들은 전부 나쁜 놈에 불과했다.
“미노타우로스에게 착하게 살라니, 이건 태어나 처음 듣는 소리군.”
심판이 날 한 대 치려다 주먹을 내리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못 칠 거면서 위협 좀 하지 마. 그러다 일찍 죽는 수가 있어.”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놈과의 신경전을 적당히 마무리 지은 나는 무투회 보상을 떠올렸다.
무투회 본선 진출자는 그 해의 삼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우승자에겐 세 개의 출입증을 준다고 했지.’
우승자가 받은 출입증은 유효기간이 없으며 양도도 가능하여 강세종들과의 거래에 쓰였다.
‘우승 보상을 받고 나면 교섭의 영역이군.’
출입증으로 미노타우로스들에게 무엇을 받아 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미노스가 관전석에서 내려와 우고를 확인했다.
“이건… 마력 역류 현상이다! 지금 당장 라미아들에게 도움을 청해라!”
우마십장 하나가 뛰어가 라미아들을 데려왔다.
릴리스가 우고의 맥을 짚어 보곤 머리카락을 바늘처럼 사용해 몸 이곳저곳에 박아 넣었다.
“어떤가? 치료할 수 있겠나?”
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다루는 기술로 마력의 흐름을 억제해 두긴 했지만, 마나의 길을 회복하려면 충분한 마력을 품은 약초가 필요해요.”
거대종에게 충분한 마력을 공급하려면 대량의 최상급 마력초가 필요하다.
“지금 마력초를 가져와도 농축액을 만들려면 시간이…….”
“라미아의 말이 맞습니다.”
의료 담당 미노타우로스에게 확인을 받은 미노스는 허탈해하며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런 미노스가 날 보곤 격분했다.
“뭐가 우스운 것이냐?”
무엇을 뜯어낼지 고민하던 중,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게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아무리 우승자라지만, 죽어가는 전사를 모욕하다니!”
미노스가 도끼를 들자, 우마십장 하나가 뜯어 말렸다.
“미노타우로스의 왕이신 미노스님이 참석자를 건드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마십장이 미노스를 말리자, 심판을 서던 놈이 미노스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쓰러진 미노스가 뭐 하는 짓이냐는 눈으로 주먹을 휘두른 녀석을 보자, 그와 시선을 마주한 심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미쳐 버린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벌어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듣자니 심판이 미친 척하며 날 죽이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럼 너는…….”
“괜찮습니다, 미노스님. 죽어 가는 우고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 정도는!”
딱히 모욕하려던 의도는 없었지만…….
심판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해 난감해졌다.
‘오해를 풀어야겠다.’
나는 미노스에게 다가가 제조해 둔 영양을 손 위에 뱉어 냈다.
“우엑.”
내가 웃은 건 작전대로 풀리진 않았지만, 오히려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인데.
‘마력초를 농축한 영양으론 부족할지 모르니, 씨앗도 몇 개 꺼내야겠어.’
나는 씨앗도 몇 개 뱉어 냈고, 그걸 미노스에게 보여 줬다.
“뭐로 보이냐?”
내가 환히 웃으며 묻자 미노스는 당혹해했고, 옆에 있던 릴리스가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이 향기… 상당한 마력을 품은 농축액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언제 왔는지, 나를 호위하듯 미노타우로스들과 대치한 키클롭스들.
그들의 대표인 클롭이 씨앗을 보곤 말했다.
“씨앗도 상당한 마력을 품고 있군. 지금 당장 두 개를 섞어 먹인다면 우고를 살릴 수도 있다.”
클롭의 말을 들은 미노스가 홀린 듯 손을 뻗자 나는 그에 맞춰 손을 거뒀다.
당황한 미노스가 내게 부탁했다.
“그걸 주게.”
내가 딴청을 피우자 분노한 미노타우로스들이 하나둘 도끼를 들었고, 결투장에 올라온 키클롭스들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뭐 하는 거지? 지금 우승자를 죽이겠다는 건가?”
뒤늦게 결투장에 모습을 드러낸 오그무트도 키클롭스와 합류하며 한마디 했다.
“동작 그만. 지금 무투회를 망칠 생각이야?”
오그무트의 뒤로 오거들이 병풍처럼 섰고, 라미아들도 어째서인지 내 편에 섰다.
“사정은 알겠지만… 진정하세요, 미노스님.”
내가 날 지켜려는 몬스터들의 움직임에 의아함을 품자, 오그무트가 다가와 말했다.
“네놈이 죽으면 우승자 없는 무투회가 되고 만다. 그럼 우승자부터 들어가야 하는 삼신전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게 되지.”
클롭도 한마디 했다.
“삼신전에 용건이 있다. 가능하면 출입증 거래도 했으면 하고 말이야.”
릴리스도 웃으며 말했다.
“저도 출입증 거래를 원해요.”
장내의 몬스터 모두가 내 편을 든 상황이었고, 놈들은 우고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만큼 우고가 중요하단 말이군.’
즉, 칼자루는 내 손에 들어온 상황.
“그래서? 지금 싸우자는 거야? 그럼 너희들은 오늘 멸망할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붙으면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는 몬스터는 몇 없다.
그러니, 갑의 입장에서 최대한 뜯어낼 수 있는 걸 뜯어낼 생각이었다.
‘제발 급발진만 하지 마라!’
전투를 준비하는 척, 뒤로 빠질 준비를 마친 나는 내심 긴장하며 미노스의 선택을 기다렸다.
‘어떻게 할 거냐? 우고를 살리고 싶은 거라면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미노스의 선택은 내 예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미노스가 도끼를 내려 두며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부탁한다.”
장내의 미노타우로스들이 우고를 살리기 위해 이를 악물며 무릎을 꿇자, 대치한 몬스터들은 놀라워했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더 많은 걸 뜯어낼 수 있게 됐어.’
나는 고심하는 척하며 물었다.
“그냥 달라는 건 아니겠지?”
“원하는 게 있나?”
나는 그동안 날 모욕한 심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녀석이 날 죽이려 했는데, 내가 뭘 믿고 너희를 도와줄 수 있겠어?”
해석하자면 너희들이 내게 뭘 줄 수 있는지 물은 것이다.
속된 말로는 선제시 바람.
‘못 알아들은 건가?’
이놈들이 상인이 아닌 몬스터란 걸 깜박 잊고 있었다.
심판 녀석이 머리를 땅에 세차게 박으며 사죄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네놈의 말이 전부 맞았어. 이번 잘못은 내가 책임질 수 있게 해다오.”
“네가?”
놈은 갑자기 도끼를 주웠고, 나는 자동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내가 뒤로 물러나자 놈은 도끼로 자신의 팔을 내리쳤다.
‘어,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런 걸 원한 게 아닌데?’
누구 하나가 말리지 않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미노타우로스들은 심판을 외면했고, 몬스터들은 튀는 피를 맛보며 흥미로워했다.
“이걸로 용서해다오.”
그렇게 수차례의 도끼질로 뜯어낸 팔이 내 앞에 내밀어졌다.
잘 잘랐다면 가죽이라도 쓸 만했을 텐데…….
나르본느와 크라스가 군침을 흘리긴 했지만, 평범한 특급 영양으로 희귀한 마력화의 농축 엑기스를 교환하는 건 좀…….
‘손해 보는 장사란 말이지.’
“하.”
내가 한숨을 쉬자, 놈은 자신의 뿔을 잡았다.
이대로 놈들의 제시를 기다렸다간 심판이 뿔까지 뽑아 줄 것 같아 다급히 말렸다.
“그만해. 내가 원하는 건 네놈의 신체 부위 따위가 아니니까.”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음을 인지한 심판.
허탈해하는 그를 무시한 나는 미노스에게 독대를 청했다.
마음이 급했던 미노타우로스들은 몬스터들을 데리고 급히 물러갔다.
결투장에 남은 건 헐떡이는 우고와 릴리스, 그리고 나와 미노스 뿐.
“일단 영역 내의 갑각충, 꿀벌족, 개미족의 토벌을 멈춰.”
일족을 비롯한 우호 종족의 안전을 대가로 내걸었다.
이는 무리한 요구이기도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오거 숲 너머를 개미족의 영역으로 인정해.”
무리한 요구 뒤에 따르는 진짜 요구.
미노타우로스들과의 불가침 조약.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영역을 인정해 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냥과 관련된 건 약속해 줄 수 없다.”
예상대로 불가침조약은 쉽게 성사됐다.
원하는 걸 쉽게 얻어 기분이 좋을만도 했으나,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우고의 생명력을 느끼고 있던 나는 그의 생명력이 급속히 사그라들고 있음을 느꼈다.
‘시간이 없다!’
이대로 우고가 죽으면, 미노타우로스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른다.
아니, 대략 짐작은 간다.
사생결단.
‘안 되겠어. 숨통부터 붙여 둬야 해!’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미노스가 엎어지더니 내 다리를 붙잡았다.
“제발 부탁한다. 내 뿔을 주겠다. 아니 심장이라도 꺼내 줄 테니 우고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거 필요 없어.”
나는 허탈해하는 미노스를 무시한 채 우고에게 다가가 씨앗 가루를 듬뿍 섞은 영양액을 먹였다.
놀란 듯한 릴리스가 내게 물었다.
“처음부터 도울 생각이었나요?”
“그럼, 안 도울 줄 알았어?”
“의외네요. 곤충족, 특히나 개미족은 배타적인 종족으로 유명한데.”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야.”
릴리스가 라미아들을 지휘하여 우고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치료술은 마력을 주입했을 때 날카로워지는 머리카락을 이용한 침 치료.
침으로 마력의 흐름을 유도하여 우고를 회복시키는 듯했다.
“저거, 개미족에게도 쓸 수 있나?”
“죄송하지만 저희의 치료술은 곤충족에게 통하진 않아요.”
“그렇군.”
우고 쪽은 릴리스가 맡고 있으니, 나는 나르본느를 데리고 심판을 찾았다.
“나르본느, 저 녀석 팔 좀 붙여 줘요.”
“아니, 왜?”
“그야…….”
불가침 조약을 맺더라도 한동안 영역을 맞대고 있을 상대에게 불필요한 악감정을 심어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붙인다고 되는 게 아닌 건 알지?”
“네 알아요. 나중에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나의 말에 나르본느가 눈을 빛내며 심판의 팔을 붙이기 시작했다.
거미줄로 신경까지 연결하는 작업.
현대 의술로도 불가능한 걸 나르본느가 해내고 있었는데…….
“우리가 널 오해한 것 같군. 미안하다.”
심판이 쑥스러워하며 사과했고, 미노스를 비롯한 우마십장들도 다가와 내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맹약을 잊지나 말라고.”
그렇게 나는 미노타우로스 놈들과 크게 틀어지지 않고 원하는 걸 손에 넣었고, 수중에 세 개의 삼신전 출입증이 들어왔다.
‘삼신전이라.’
내가 알 수 없는 하얀 금속으로 만들어진 출입증을 얻기 위해 키클롭스, 오거, 라미아, 하이 오크, 트롤 킹 등이 날 찾아왔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