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브록
통로 끝에 도달하니 칙칙한 공터가 나왔다.
조심스레 공터에 들어가자 벽에서 푸른 불빛이 켜졌고, 돌아가는 길이 무너지며 퇴로가 막혔다.
뒤가 막히니 자연스럽게 정면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고, 공터 끝 단상에는 미노타우로스의 축소판 같은 몬스터가 거대한 낫을 들고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꼰 채, 낫을 어깨에 걸친 반인반수의 몬스터.
대략적인 신장은 2미터 정도.
몸체는 미노타우로스들에 비해 작았지만, 가진 마력은 그동안 봐 온 몬스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이건 금갑돌파 상태의 헤라클레스 이상이야.’
헤라클레스는 그동안 내가 봐온 몬스터 중 두 번째로 강한 존재였고, 제일 강했던 건 무한증폭으로 마력을 계속 불리던 제왕급 몬스터, 베르제붑이었다.
놈은 그런 베르제붑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제왕급 몬스터로 여겨졌다.
나를 본 놈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네가 이번 무투회의 우승자인가?”
그가 내게 관심을 가진 순간, 압도적인 존재감이 나를 눌렀다.
‘큭.’
공허의 마력을 몸에 둘러 압박감을 지웠다.
‘이제 좀 살 것 같군.’
내가 경계 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몸을 웅크리며 부르르 떨었다.
“곤충족, 그것도 개미 따위가 우마신의 신전에 발을 들이다니…….”
분노를 애써 참는 듯한 놈의 모습에 긴장했으나, 놈이 폭소를 터트렸다.
“음머머머머머!”
마력이 듬뿍 실린 음파에 공간이 떨려 왔다.
웬만한 왕급 몬스터도 내상을 입었을 음파였지만, 공허의 마력을 몸에 두른 내겐 이런 종류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배꼽을 감싸며 한참이나 웃던 놈이 웃음을 지우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뭐, 개미가 오든 파리가 오든 내가 할 일은 하나지.”
놈이 단상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 몸은 우마신의 보구를 지키는 파수꾼 브록이다.”
상대가 이름을 밝혔으니, 나 또한 자신을 소개했다.
“데몬 앤트, 다크.”
놈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낫을 내리곤 말했다.
“네놈이 신전에 발을 들임으로써 우마신의 보구를 취할 자격이 주어졌다.”
자격만 주어졌을 뿐, 보구를 취하기 위해선 그가 내릴 시련을 통과해야 했다.
“먼저, 네놈이 고를 수 있는 보구에 대해 말해 주지.”
브록이 낫을 휘두르자, 멀찍이 떨어진 바닥에 흔적이 새겨졌다.
‘마기를 쏘지 않았어.’
“베고자 하는 곳을 베는 공간의 낫.”
브록의 손에 쥐어진 낫이 사라지더니 핏빛 균열로 가득한 도끼가 나타났다.
도끼를 쥔 그의 근육이 부풀며 증폭된 놈의 마력이 장내를 짓눌렀다.
촥!
그가 허공에 도끼를 휘두르자 공간이 비명을 지르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들이닥칠 바람에 맞서 금강모드로 바닥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힘과 마력을 증폭해 주는 분노의 도끼.”
브록의 손에서 도끼가 사라지더니 곡괭이 한 자루가 나타났다.
그가 곡괭이로 바닥을 찍자 폭음과 함께 지반이 흔들리며 일직선상에 흙기둥이 솟아올랐다.
“대지를 뒤엎는 지폭의 곡괭이.”
곡괭이가 사라지더니 놈의 왼손에 금속 팔찌가 채워졌다.
“만물을 하찮게 만들어 주는 무욕의 팔찌!”
팔찌가 사라지며 소를 연상시키는 금빛 갑주가 놈의 몸을 감쌌다.
“불굴의 의지가 깃든 우마의 갑옷!”
갑옷이 사라지고 공간의 낫이 다시금 그의 손에 들렸다.
“내게 상처를 입힌다면 이 중 하나를 주마.”
그가 보여 준 무구들은 하나하나가 대단한 것들.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다!’
그를 이기는 것도 아니고, 상처를 입히는 것 정도는 가능할 듯했다.
‘해 보면 알겠지.’
“언제 시작하면 되지?”
“이미 시작됐다.”
놈이 공간의 낫을 휘둘렀고, 공간의 뒤틀림이 발생했다.
나는 급히 몸을 날려 피했고, 미처 다 피하지 못했는지 전완 쪽 외골격에 흠집이 생겼다.
‘제일 단단한 부분인데…….’
별 저항 없이 잘려 나간 외골격을 보며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범위가 예상보다 커.’
거기다 흠집을 보아 놈의 공격은 방어력을 무시한다.
‘막을 수 없는 일격이야.’
위협적이긴 하나 피하지 못할 공격은 아니었다.
‘놈의 공격에는 시차가 존재했어.’
낫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베인 게 아니었다.
‘낫이 휘둘러진 직후, 공간의 뒤틀림이 발생했지.’
동시와 직후에는 큰 차이가 있었고, 뒤틀림의 방향과 궤적은 낫이 휘둘러진 궤적과 일치했다.
그러니 놈이 낫을 휘두른 순간, 타격 지점을 예측한다면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차례 낫을 휘둘렀음에도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단하군. 공간의 낫을 단번에 간파하다니.”
놈이 말을 하며 방심할 때, 나는 바닥을 박차 거리를 좁혔다.
“상처만 내면 내 승리가 맞나?!”
쾅!
“놀랍구나. 하지만, 그 정도론 내게 상처를 낼 수 없다!”
공간 베기를 경계한 나는 한차례 격돌 후 거리를 벌렸다.
몇 차례 더 부딪치고 나서야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의 공간 베기는 낫이 완전히 휘둘러진 뒤에야 발동한다!’
즉, 근접전으로 맞붙으면 놈의 공간 베기가 발동되는 걸 저지할 수 있다.
‘좋아, 이대로 밀어붙이면 기회가 생길 거야!’
낫에 대한 공략이 끝났다.
내가 본격적으로 밀어붙이려 할 때, 놈의 무기가 도끼로 바뀌었다.
‘이런!’
접근해 온 나를 향해 놈이 도끼를 휘둘렀다.
쾅!
힘 대 힘의 대결.
내가 금강모드로 전력을 끌어올리자 놈의 놀람이 전해졌다.
나름 자신한 부분이었지만, 삼 합 만에 양팔이 아작 나고 말았다.
‘힘에서 밀리다니!’
물러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아니, 놈이 물러나는 내게 돌진해 왔으면 일찍이 결판났을 승부였다.
‘놈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아.’
“삼 합이나 버티다니, 개미치곤 대단하군.”
여유 가득한 놈을 보며 격의 차이를 실감했다.
‘접근전은 불리해.’
애초에 내가 제왕급으로 보이는 놈에게 과감히 덤빌 수 있었던 건 놈이 날 죽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였다.
‘삼신전에서 죽었다는 몬스터는 없었으니까.’
강세종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 제왕급과의 대련이었을 줄이야.
나는 무투파가 아니어서 강자에 대한 흥미보단 손익을 따졌다.
‘보구만 아니었어도…….’
브록이 보구를 먼저 보여 주지 않았다면 일찍이 항복하고 나갔을 테지만, 판돈이 큰 만큼 차근차근 공략해 보기로 했다.
‘증폭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봐야겠어.’
도끼는 일시적으로 힘과 마력을 증폭해 주긴 하지만, 지속 시간이 짧고, 체력 소모가 큰 듯했다.
제왕급으로 보이는 브록조차 금세 자세가 흐트러졌으니까.
“분노의 도끼마저 버텨 내다니, 개미보단 바퀴벌레에 가까운 생명력이군.”
“칭찬으로 받지.”
지친 녀석이 무기를 곡괭이로 바꿨다.
“이것도 받아 봐라!”
브록이 지반을 흔들며 치솟는 흙기둥으로 날 공격했다.
‘공간의 낫과 큰 차이가 없어.’
타격점을 예측할 수 있었던 나는 솟구치는 흙기둥을 피해 다니며 놈의 마력이 소모되길 기다렸다.
‘급속 재생이 있는 한 나는 지치지 않아.’
마력이 고갈된다면 나도 별수 없으나, 내 마력통은 쉽사리 고갈되지 않는다.
시간은 내 편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지쳐가던 놈이 무기 대신 갑옷을 꺼내 입었다.
육중한 갑옷을 입어 확연히 느려진 놈.
기회다 싶어 접근하여 두들겨 팼다.
‘음?’
갑옷에 막혀 상처를 낼 순 없었지만, 충격은 갑옷 안으로도 전해질 터인데…….
그런데, 패면서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이 녀석!’
갑옷의 능력인지, 소모된 놈의 마력이 급속도로 회복됐다.
‘불굴의 갑옷, 그런 거였군.’
몇 분 후, 완전한 상태로 회복한 놈은 도끼를 꺼내 들고선 날 밀어냈고, 낫을 꺼내 원거리 공격을 가했다.
‘원점인가?’
브록은 무기를 바꿔 가며 날 괴롭혔고, 지칠 때마다 갑옷을 입어 소모된 체력을 회복했다.
“개미족의 회복력이 아니구나!”
급속 재생 덕에 놈의 공세를 버텨 낼 수 있었지만,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도저히 답이 없다고 느낄 때쯤, 놈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밌었다. 그럼 끝내지.”
놈의 무기가 팔찌로 바뀌었고, 마력의 뒤틀림과 함께 등 뒤에서 나타난 놈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잘 가라.”
놈의 마력이 나를 뒤덮자, 공허의 마력이 놈의 마력을 흡수해 버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왜 발동되지 않는 거지?”
창을 휘둘러 놈을 떨쳐 냈다.
“뭘 하려는 건 모르겠지만, 내게 안 통해.”
“그럴 리가…….”
놈이 같은 방식으로 내 뒤를 잡아 뭔가를 시도하려 했으나, 내게 통하지 않았다.
“전송이 통하지 않는다니, 난감하군.”
‘전송?’
아무래도 놈에겐 상대를 밖으로 강제 전송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마다 무장과 관계없이 가끔 펼쳐지는 순간이동.
‘연속해서 세 번 이상 쓰진 못하는군.’
순간이동은 세 번을 쓰고 나면 약 1분 정도의 쿨 타임이 발생했다.
“마력을 흡수하는 능력인가?”
놈이 난감해하며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난 네놈을 죽일 수 없다. 그러니, 승패 조건을 바꿔야겠군.”
놈이 말했다.
원래는 제약으로 인해 상대를 죽일 수 없어 전송으로 마무리 짓지만, 내게 전송이 통하지 않으니 항복할 때까지 어울려 주겠다고…….
“그럼, 다시 가겠다.”
무장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 놈이 압박해 왔으나, 장내에 가득한 마력을 흡수해 가며 급속 재생으로 버텼다.
어느 순간 우린 깨달았다.
이건, 누가 강한가의 승부가 아닌, 인내 싸움이 됐음을.
하지만, 이 인내 싸움은 나만이 일반적으로 고통 받으니 매우 불리했다.
‘찾아야 해. 놈이 제일 약한 순간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색한 결과, 각 무기마다 사용 가능한 횟수와 시간 제약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찾았다!’
놈이 제일 약한 순간.
그건 갑옷과 도끼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순간이었고, 낫을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놈에겐 위기를 회피할 수 있는 순간이동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이 있는 한 놈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불가능했는데…….
회피에 전념하던 나는 놈의 순간이동이 소진되는 타이밍과 낫을 든 타이밍이 겹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 간 이어진 격전.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지금이다!’
놈에게 돌진하여 창을 내찔렀다.
당연히 낫에 막힌 창.
내가 웃자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기한 것이냐?”
“아니, 처음으로 내 턴이 온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암흑마창을 감싸고 있던 봉마의 사슬을 풀었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라고!”
각성 능력까지 발동하여 만에 달하는 군체원의 마력을 빌려 와 마창에 밀어 넣었다.
“어림 없…….”
제왕급인 베르제붑을 압도했던 힘.
흑색의 마강기 수십 줄기가 브록을 덮쳤다.
순간이동이 떨어진 상황에서 전방위를 점령한 공격이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을 테니…….
‘내가 이겼다!’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했지만, 나의 턴은 끝나지 않았다.
“그만! 내가 졌다!”
놈이 항복해 왔지만,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
“뒈져!”
마창에서 쏟아져 나온 수십 줄기의 마강기가 브록을 두들겨 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이 의식을 잃었지만, 마창의 마강기는 내가 제어할 수 없을뿐더러 제어할 생각도 없었다.
각성 능력의 유지 시간이 다할 때까지 브록을 팼고, 마무리로 마석을 뽑아 버렸다.
‘흠.’
다져진 브록의 시체를 보며 복수의 허무함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손에 들어온 브록의 마석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제왕급 마석은 처음이네.’
격한 감정은 금세 사그라드는 몸이지만, 누구에게나 첫 경험은 설레는 법이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