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쥐와의 전쟁 (4)
프릴과 릴리가 받은 임무는 베르딘과 협조하여 둥지에서 생산된 맥주를 술집에 납품하는 것.
“너희는 여기서 대기해.”
둘은 직속 수녀 스물넷을 개미 여관에 맡기곤 과거에 일했던 술집을 찾았다.
술집 손님들의 시선이 둘에게 집중됐다.
“마담, 저기 둘은 얼마지?”
“죄송합니다. 두 분은 저희 쪽 직원이 아니어서요.”
프릴과 릴리에게 다가간 엘리샤가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너희… 혹시, 프릴과 릴리니?”
“오랜만이에요, 엘리샤.”
“살아 있었구나.”
감동의 포옹이 오가고 엘리샤는 둘을 조용한 객실로 안내했다,
“맥주? 아니면 물?”
“물로 주세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엘리샤는 프릴과 릴리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잘 지냈어?”
엘리샤의 물음에 프릴과 릴리는 개미족에 관한 걸 숨긴 채 그동안 저택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고 말해 줬다.
“데이지와 마담은 어딨어요?”
프릴의 물음에 엘리샤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데이지는 영주성에서 일하는 행정관의 첩이 됐어.”
“괜찮은 사람인가요?”
프릴의 물음에 엘리샤는 고개를 저었다.
“받아 준 것만으론 고마운 거지.”
“그렇군요. 마담은요?”
“마담은…….”
프릴과 릴리가 떠나고 술집 마담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키워 가던 마담은 비어베어의 간부 아론에게 찍히고 말았다.
“마담의 신병은 마르코에게 넘어갔어.”
아론이 술집 관리를 맡은 간부라면, 마르코는 인신매매를 담당하고 있던 간부였다.
“그런…….”
프릴과 릴리가 슬퍼할 때, 객실에 두 여인이 들어왔다.
“돌아왔구나, 프릴.”
“프릴 선배. 저에요, 케서린.”
인사를 나눈 둘은 프릴과 릴리가 없는 동안 사라진 동료들의 소식을 전해 줬다.
“백인장의 첩이 됐다고 좋아하던 제니는 두 달 만에 노예로 팔려 갔어.”
“페르샤는 무리하다 병들어 죽었고, 모리아는 윤활제를 빼돌리다 걸려서 아론에게…….”
둘은 동료들의 비극을 들으며 슬픔을 감출 수 없었다.
“데이지는 아들을 낳은 것 때문에 정실 부인의 괴롭힘이…….”
프릴과 릴리가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쏟아 내자, 두 여인이 말을 멈췄다.
잠시 동안 프릴과 릴리를 안아준 두 여인은 차갑게 말했다.
“이제, 가… 아론 녀석이 눈치채기 전에…….”
“다신 오지 말아요. 선배.”
엘리샤와 옛 동료들에게 쫓겨나다시피 술집 뒷문으로 나오게 된 프릴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론 녀석 때문이야.”
“어쩔 수 없잖아. 여긴 원래 그런 곳이었어.”
암흑가의 수중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던 곳.
“놈들이 보호비만 적당히 뜯었어도…….”
프릴의 손이 치마 속 단검에 가자 릴리가 말렸다.
“프릴, 우리의 임무는 술집을 장악해 운영하는 거지, 복수가 아니야.”
릴리의 설득에도 프릴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밤을 지배하려면 놈들을 몰아내야 해.”
“그건 베르딘 님의 역할이지.”
“베르딘 님에게 부탁할 거야. 아론을 죽여 달라고.”
“그건 다크 님이 결정하실 일이야.”
한참이나 기 싸움을 벌이던 둘, 릴리가 패배를 선언했다.
“알겠어. 한 번 부탁해 보자.”
“괜찮겠어? 넌 상부와 엮이고 싶지 않아 했잖아.”
“엮이고 싶지 않지. 특히, 베르딘 님은 무섭게 생겼잖아. 그래도 사제인 우리를 죽이기야 하겠어.”
각오를 다지던 두 여인 뒤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 새벽, 술집 여덟 곳을 점령할 계획입니다. 그곳의 운영 관리를 맡겨도 되겠습니까?”
화들짝 놀란 프릴과 릴리가 뒤로 물러나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지?”
검은 코트를 입은 수상한 자가 개미 문양이 찍힌 신분 패를 보여주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정보국 소속 그림자, 13호입니다.”
“같은 편?”
“당신들이 배신하지 않고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같은 편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날 새벽, 개미 정보국의 그림자 부대가 술집 관리를 맡은 조직원을 제거해 나갔다.
술집 여인들이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림자들에 의해 술집이 장악된 상황.
암흑가의 분쟁으로 관리 조직이 바뀌었음을 직감한 마담들은 그림자에게 상납금을 바쳤으나, 그들은 상납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따라와라. 갈 곳이 있다.”
엘리샤를 비롯한 마담들을 한곳에 모은 그림자가 말했다.
“앞으로 너희들의 관리를 맡게 될 사람이다.”
다들 본보기가 되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고개를 숙일 때 엘리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림자가 데려온 여인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너희가…….”
“그렇게 됐어요, 엘리샤.”
* * *
농민들이 땅을 팔지 않는 건, 이곳 세상에서 농민은 나름 괜찮은 직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다크 님. 농민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괜찮아. 다들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좀 더 가격을 올린다면 판매할 자들이 생기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땅을 구할 방법은 많았다.
“잠시 유리 좀 보고 오자.”
“영주님을요?”
문트리아를 데리고 영주성을 방문했다.
과거 제르바 상단의 꼬임에 넘어가 날 압박하던 말단 기사 바리캉 폰 헤멜.
그는 4차 진화로 키가 훌쩍 크며 성숙해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개미 상단주가 무슨 일이지?”
“저의 주인께서 영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주인?”
그동안 공허의 힘으로 갈무리하고 있던 마안의 힘을 개방했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내 눈을 마주한 헤멜이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큭.”
눈을 피한 그가 무릎을 굽히며 기사식 인사를 올렸다.
“다크 님이셨군요. 전과 모습이 달라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헤멜과의 시작은 악연이었지만, 지금은 내게 우호적인 기사 중 하나였다.
“영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유리와 만나 인사를 나눴다.
“모습이 바뀌었군. 지금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
“보기 좋게 바꾼 건 아니야.”
진화했다고 말해 주니, 유리가 놀랐다.
“그럼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놀람도 잠시, 우린 왕국 정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제국에서 사절이 오지 않은지 오래됐다.”
제국과 왕국 사이에는 사막 왕국 아스만이 있다.
물리적 거리가 상당하여 사절이 오가려면 몇 년이 걸렸다.
“항상 있던 일 아니야?”
“10년 동안 사절이 오지 않은 건 클라우드 왕국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제국의 압박이 옅어지니, 왕국의 주전파가 힘을 얻었다.
“전쟁이 난다면… 상대는 포카이 왕국과 다슬리 왕국이겠지.”
두 왕국의 국경은 쿠드라 후작과 카밀 후작이 맡고 있었고, 쿠드라 후작은 제논의 편이기도 했다.
“남부의 귀족과는 관계없는 일이다만, 벨레삭 백작은 주전파라 할 수 있다.”
“아버지를 남 부르듯 하네.”
“서자에게 아버지는 없다.”
북부의 귀족은 전쟁 물자를 모으고 있었고, 왕실에선 전쟁 허가를 받기 위해 제국에 사절을 보냈다.
사절이 어떤 답을 얻어 오냐에 따라, 왕국 정세가 급변한다.
“사절이 답을 얻어 오려면 몇 년은 걸리겠지?”
“그렇지도 않다. 포카이와 다슬리 왕국 쪽에선 우리보다 먼저 움직였을 테니까.”
왕국 간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오랜 평화로 인해 클라우드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개미 약국의 신약 덕에 북부 영지는 전염병 타격을 받지 않았어.”
클라우드 왕국과 달리, 포카이와 다슬리 왕국은 전염병 피해를 극심히 보며 상당한 피해를 봤다.
“무장의 질도 이쪽이 월등하지.”
개미표 강철 무기도 왕국 전역으로 유통되고 있으니…….
‘이것 참.’
본의 아니게 왕국 전쟁을 부추기고 있던 셈이었다.
‘북부의 전쟁에선 내가 나설 일은 없겠지.’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문트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뭐, 전쟁은 돈이 되니까.’
전쟁 물자는 비싸지고, 고아와 노예가 폭증한다.
‘전마(戰馬) 사업도 시작해 둬야겠어.’
개미 상단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귀족들은 불안해할 것이고, 견제해 올 것이 틀림없다.
‘충돌은 불가피하겠지.’
다가올 기득권과의 전쟁을 대비해 다양한 방식으로 무력 집단을 키워 나가는 중이었다.
정세 이야기를 마무리한 나는 용건을 꺼냈다.
“직영지를 빌려줬으면 좋겠어.”
농지와 농노를 빌리려 하자 유리가 난감해했다.
“이렇게 나오기야?”
내가 인상을 구기자 유리가 쩔쩔매며 변명했다.
“벨레삭 백작이 북부에 곡물을 팔아 주기로 약속했다. 곡물 가치가 치솟을 텐데, 직영지를 빌려주는 건 내게도 타격이 커.”
“알았어. 예상 손실은 선금으로 메워 줄 테니까, 절반 정도 빌려줘.”
유리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너와는 말이 통해서 좋군.”
농지와 농노를 필요한 만큼 빌려 온 나는 작물 매입을 금지시켰다.
바르퀴르 영지에서 식량 유통을 독점하고 있던 내가 매입을 해 주지 않으면, 농민들이 직접 상점을 열어 팔아야 할 텐데…….
“못 팔게 해.”
“네?”
내년 추수 시기에 맞춰 곡물 가격을 낮추고 생필품값을 올려 그들을 말려 죽이라고 명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좀 더 설득해 보면…….”
“귀찮게 설득을 왜 해? 모두 빈 공터로 만들어 버려.”
농민들은 겨울을 보내기 위한 땔감이 필요하며, 옷과 이불을 만들기 위해 천도 필요하다.
잡화점의 압박으로 그들의 생산품의 가치가 떨어지고 생필품의 가치가 오르면 그들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농민은 자급자족할 수 있어 한동안 버틸 테지만, 그들이 버티는 만큼 잡화점의 손실도 커질 테니, 베르딘을 움직여 흉작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이곳 인간들은 겨울날 식량이 부족해지면 일차적으로 자식을 팔아 입을 줄였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막대한 사채를 떠안게 된다.
“바르퀴르 영지에 농민은 필요 없어, 모든 땅에서 가축과 전마를 키울 거니까.”
문트리아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했는지 걱정하면서도 돈 벌 생각에 들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둥지의 잉여 자원과 사료 생산량을 고려해 각 지역에 어떤 가축을 키울지 정해줬다.
영지 설계를 끝냈을 때쯤, 200마리가 넘는 묘족이 모였다.
그중 꼬리 두 개 달린 고양이가 40마리 정도.
‘이거 큰일인 걸.’
슬슬 둥지에 투입해 보려 했으나, 길들이기에 실패했다.
‘하녀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교육 개미도 실패할 줄이야.’
놈들은 고분고분 따르는 척하며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전혀 협조적이지 않았다.
‘이 녀석들, 개미족에게서 본능적인 적대감을 느끼고 있어.’
아무리 개미족의 시중 능력이 우월하다 해도 본능마저 지워 가며 길들일 순 없다.
‘방향을 잘못 잡았나?’
묘족을 쥐 사냥에 투입하는 걸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 베르딘이 정보를 물어 왔다.
“수도의 암시장에서 묘인족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묘인족?”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수인.
이들은 몬스터가 아닌 이종족으로 분류됐다.
헬리오스 제국이 대륙을 지배한 천년.
그동안 이종족들은 노예종으로 전락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묘인족은 인간보다 우월한 신체 스펙을 가진 종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묘인족은 묘족을 조종해 인간들의 도시를 침공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묘족을 다룰 수 있는 능력.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 스카우트해야 할 인재들이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