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쥐와의 전쟁 (6)
난전 속에서 첸이 케서린을 지켰고, 아론을 제압하여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릴리가 뒤로 빠지며 프릴이 여인들의 대표로 그를 마주했다.
“인사드립니다. 전 비어베어 정보 담당 첸입니다.”
첸이 무릎을 꿇었고, 아론은 강제로 꿀려졌다.
“용서해 줘! 살려만 주면 뭐든 다 할게!”
아론의 목숨 구걸을 냉정히 뿌리친 프릴이 말했다.
“용서? 네놈은 편하게 죽을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도살자 마르코와 살인귀 웨인이 장내를 정리하곤 프릴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노예 공급원 마르코, 보스로 모시고 싶다.”
“무력을 담당하던 웨인이다. 돈을 받고 고용된 몸, 계약 기간까진 너희를 위해 검을 휘두르겠다.”
프릴이 간부들의 인사를 받을 때, 릴리는 옆으로 다가온 13호에게 물었다.
“이런 건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잖아요.”
13호는 장내에 모인 60여명의 그림자를 둘러보며 말했다.
“릴리 님, 뭔가 착각을 하시는 것 같군요. 그림자는 상부의 지침을 받아 움직일 뿐, 제가 다룰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저도 놈들이 포섭된 줄 몰랐다는 이야기죠.”
“그런 것치곤 놀라지 않으시네요.”
13호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 말했다.
“저희가 받는 돈의 자릿수가 다른데, 질 수가 없는 싸움이지 않습니까?”
프릴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림자는 모두 당신 같은가요?”
“제가 어때서요?”
릴리는 13호를 황금만능주의의 수전노라 생각했지만, 실력은 기사 바로 아랫줄로 보였기에 후환이 두려워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모르면 됐어요.”
* * *
현재 지하 통로는 수도 외곽까지 뚫려 있다.
목적지는 수도였지만, 먼저 벨레삭 백작령에 들려 루리아와 존을 만났다.
“문트리아의 자금 지원으로 잡화점, 약국, 여관, 고아원을 늘려 가는 중이에요.”
약국의 주력 상품은 기초 화장품과 정력제.
“최근 프리미엄 라인을 출시하면서 부유층 고객이 늘었어요.”
문트리아에게 보석상 컨설팅을 해 줬더니, 약국을 비롯한 모든 점포에 큰 변화가 있었다.
“개미표 강철제 무구와 가죽 제품도 잘 팔리고 있습니다.”
이곳 저택 지하에도 치료와 교육을 위한 지하 기지가 마련돼 있다.
“경비병 수를 계속 늘리고 있고, 용병으로 활동하는 개미교 인원도 늘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네.”
둘은 자기들의 역할을 잘 소화해 주며 막대한 이익을 벌어다 주고 있었지만, 백작가의 망나니들에게 뜯기는 돈이 만만치 않은 듯했다.
“다크 님, 비에타 소영주와 관계를 맺어 두는 게 어떤가요? 그를 이용하면 걸리적거리는 망나니들을 제거할 수 있을 듯합니다.”
“비에타?”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다지고 있는 비에타를 지원하면 망나니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순 있지만, 유리와 악연이 있는 녀석이었다.
‘선민사상에 찌들어서 말도 잘 안 들을 것 같고 말이야.’
좋은 생각이 떠오른 나는 루리아에게 말했다.
“망나니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네?”
“좀 더 욕심을 품을 수 있도록 말이야.”
이이제이, 이독공독, 이열치열.
같은 것끼리 싸우도록 유도하라고 했다.
“아…….”
내 말뜻을 알아들은 루리아.
“알겠습니다.”
존에게는 이곳 마시장 장악을 준비하라 일러뒀다.
“다크 님, 이곳 정보국의 그림자를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베르딘은 벨레삭 영지에서 암약하는 무력 집단을 만나러 갔다.
다녀온 베르딘은 난감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아직 윤활제 생산자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술집을 운영하려면 윤활제는 필수.
둥지에서도 메디가 개발한 윤활제가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 생산한 것보단 피임 기능이 떨어졌다.
‘개미족의 제약술로도 대체할 수 없었단 말이지.’
왕국 전역의 술집 장악을 위해서라도 이곳 윤활제를 확보해 둬야 했는데…….
‘정보국의 눈을 피할 정도면 대단한 녀석이야.’
거기다 윤활제에서 보이는 검은색 마력은 흑마력이 분명하다.
‘흑탑 소속의 흑마법사일지 모르니, 꼭 만나봐야 해.’
나는 개미 지배로 도시를 샅샅이 뒤졌다.
학대받는 아이, 핍박받는 여인, 부모에게 팔려 나가는 소녀, 악덕 점주에게 임금을 떼인 청년, 약 살 돈이 없어 죽어 가는 여동생을 지켜보는 빈민가의 꼬마, 병이 들어 술집 밖으로 내동이 쳐진 여인…….
패악을 일삼는 탐욕스러운 인간들과 불쌍한 인생 군상들이 무수히 보였다.
정의감 넘치는 인간이라면 모두를 구할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했을 테지만, 나는 그리 감성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쓸 만한 자원이 넘치는군.’
불우한 환경의 인간일수록 데려왔을 때 적응력이 높기에 내게는 높은 가치를 지닌 인적자원이라 할 수 있었다.
‘죽기 직전인 아이들부터 거두자.’
데려오기만 하면 죽어도 자원이니, 그림자를 파견해 생명력이 간당간당한 인간부터 데려오게 했다.
나머지는 추후 작업해도 되지만, 잠재력이 높아 보이는 녀석들은 일단 챙겼다.
그림자들은 거액의 활동 지원금을 받기에, 웬만해선 평화적인 방법으로 데려왔다.
“저… 돌아갈 수 있을까요? 부모님이 절 기다릴 거예요.”
지하 교육장에는 부모에게 학대받다 팔려왔음에도 가족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교육 개미는 그런 아이들을 공감해 주진 못했다.
“고품질 인간이 되면 찾아가 봐라. 그때 네가 원한다면 그들도 둥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영광을 주마.”
그들이 커서 가족을 가축 취급하는 부모와 재회했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우리에게 고마움을 품을지언정 원망은 하지 않겠지.’
개미 지배로 도시를 둘러보던 중, 번화가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여인을 보게 됐다.
“먹고살기 힘드네.”
고객 대부분을 개미 잡화점에 빼앗겼는지, 그녀의 잡화점에는 파리만 날렸다.
‘찾았다!’
그녀에게 익숙한 마력이 보였고, 그건 분명 윤활제에서 느껴지던 마력과 같았다.
‘제논이 데리고 다니던 물의 마도사, 시리우스 수준의 마력을 품고 있어.’
나이는 20대 중반, 외모가 준수한 그녀를 한동안 지켜봤다.
가끔 단골이 와서 물건을 팔아 줬고, 남정네들이 들어와 찝쩍대기도 했다.
저녁이 되어 문을 닫을 때가 되자, 철벽을 치던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았던 병사 하나가 행패를 부렸다.
그녀가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했는데, 아무런 반항도 못 한 채 폭행당했다.
‘음? 내가 잘못 봤나? 아냐, 분명 마도사급인데…….’
마도사 수준이면 기사급도 찜 쪄 먹을 수 있을 텐데.
동료의 만류로 병사가 떠나가고, 멍투성이가 된 여인이 가게에 홀로 남았다.
그녀는 눈을 가린 채 한참이나 누워 있었다.
도저히 흑탑 소속의 흑마법사라 생각되지 않는 처량함.
내가 상대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의심했으나, 제대로 본 게 맞았다.
몸을 일으켜 가게 정리에 들어간 그녀는 흑마력을 이용해 물건을 나르기도 하고, 태우기도 했다.
가게 정리를 마친 그녀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에 개미가 없는지 더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들어갈 틈이 없네.’
개미를 보내 확인할 수 없으니 직접 움직여야겠으나, 흑마법사인 그녀를 만나보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베르딘, 윤활제 생산자를 찾았어.”
“정말인가요?”
“그녀에 대한 건 나중에 처리하고, 일단 수도에 가서 묘인족을 구해 오자.”
“알겠습니다.”
“루리아, 너도 준비해.”
“저도요?”
수도 인근 농가에서 자란 루리아도 데려가기로 했다.
루리아는 신관 직위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밑에 다수의 여사제가 있고, 사제 밑으론 열두 명의 직속 수녀가 있다.
수녀만 돼도 실버급 언저리의 무력을 지녔고, 여사제는 골드급에 근접한 무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즉, 실버급의 충성스러운 부하 50명을 둔 루리아.
그녀가 없더라도 유능한 부하들이 벨레삭 영지의 일을 잘 해결해 줄 터였다.
“이쪽 길로 가시면 돼요.”
수도 인근의 마을까지 지하 도로로 이동했다.
“위대한 기둥을 뵙습니다.”
도착한 외곽 마을은 개미교가 점령한 곳으로 위장할 필요조차 없는 곳이었고, 이런 마을이 왕국 곳곳에 있었다.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해 뒀고 마차도 준비돼 있으니, 언제든 말씀 주시면 수도 저택까지 모시겠습니다.”
개미 영양으로 차려진 식탁을 보며 살짝 놀랐다.
‘개미족의 식성을 잘 알고 있어.’
희미하지만 개미족의 우호 페로몬이 느껴지는 것이 모두 둥지에서 오랜 시간 지내던 인간들 같았다.
‘몸에 개미 모형이 달린 장신구를 하나씩 가지고 있군.’
개미교도는 개미 모형을 십자가처럼 품고 다녔고, 미약한 마력이 모형에 깃들어 있었다.
하루 정도 마을 인간의 시중을 받으며 이들의 일상을 관찰해 봤다.
새벽에 일어나 집안에 숨겨 둔 개미 목상에 기도를 올린 그들은, 잠시 일하는 척하다가 오후가 되자마자 온종일 훈련과 학습에 매달렸다.
개미 목상은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져, 나와 흡사한 것도 있었다.
이곳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군영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는데…….
“저들은 뭘 준비하는 거지?”
“전쟁을 준비하는 거예요?”
“전쟁? 누구랑?”
루리아는 은으로 세공된 개미 액세서리를 꺼내 보여 주며 말했다.
“다들 알고 있는 거죠. 클라우드 왕실과 헬리오스 제국이 있는 한… 저희는 이단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나와 루리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르딘이 지니고 있던 개미 장신구를 그러쥐며 말했다.
“양아치에 불과했던 제게도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있습니다.”
그가 말한 신념, 그건 내가 심어 둔 거짓된 믿음에 불과할 텐데.
루리아가 품고 있던 개미 모형을 보이며 내게 무릎을 꿇자, 마을에 있던 모든 인간이 개미 모형을 꺼내 보이며 내게 절해왔다.
“다크 님, 여기 있는 모두가 신실한 개미교도이며 신념을 위해 목숨조차 버릴 각오가 돼 있는 자들입니다.”
휘몰아치는 교도들의 마력이 나를 감쌌다.
‘신념이라니.’
이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개미족의 세뇌 교육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런 마력을 만들어 낼 수 없어.’
시작은 내가 심어 준 가짜였을지 몰라도, 그 가짜는 진짜가 되어 있었다.
좀 더 이곳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지만, 둥지가 걱정된 나는 그들이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마을을 떠났다.
뒤돌아본 마을 쪽에선 희미하지만, 거대한 개미 형상의 마력이 보였다.
‘어라?’
다시 보니 평범한 마력이었다.
‘잘못 본 건가…….’
* * *
클라우드 왕국의 수도 테헤라.
이곳엔 귀족 영애로 활동 중인 메르디아 폰 엠마가 관리하는 저택이 있다.
“위대하신 기둥을 뵙습니다.”
저택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충실한 개미교도.
나에 대해 알고 있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쪽에서의 사업은 어때?”
“보석상이 알려지면서 개미표 장신구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어요. 다른 점포들도 모두 흑자를 내고 있고요.”
테헤라는 크기도 크고 인간도 많으며 대영지의 상단이 모여드는 무역 도시기도 했다.
‘여기서 벌어들이는 돈이 상당하지.’
나는 메르디아가 이곳에 머물며 관계를 맺은 귀족과 부유층의 명단을 받았다.
“7왕자의 걸림돌이 될 만한 가문을 지원해 주고 있어요.”
돈을 많이 쓴 게 아닌지 안절부절못하던 메르디아.
“잘했어.”
가벼운 칭찬에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앗, 좋은 소식이 있어요.”
메르디아를 통해 비어베어의 몰락 소식을 듣게 됐다.
“프릴이 새로운 보스가 됐다고 해요.”
새롭게 생긴 조직의 이름은 고스트.
벌써 인근 영지의 암흑가에서 접촉해 왔다고 한다.
“맥주와 교육된 직원을 원한다고 하는데, 다크 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요.”
“맥주는 통상 가격에 유통하라고 전하고, 직원은…….”
뛰어난 외모와 테크닉을 갖춘 개미교도 중 지원자가 있으면 거래에 응하되, 돈은 받지 말고 상대측 직원 다섯과 트레이드 하라는 내용을 서신으로 보냈다.
‘조직을 구성하는 건 소속원이지.’
받게 된 직원은 둥지에 보내 개미교도가 되는 절차를 밟은 후 술집에 투입될 것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인근 술집에 우리 쪽 인간을 채워 차근차근 점령해 갈 계획이었다.
바르퀴르 자작령에 보낼 서신을 건네준 나는 가장 중요한 묘족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물어봤다.
“한 마리도… 확보하지 못했어요.”
메르디아가 눈을 찔끔 감으며 한 말에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의뢰를 안 넣은 거야?”
“그게 아니라…….”
용병들이 건드렸다가 피를 봤다고 한다.
‘용병이 고양이한테 당했다고?’
용병들의 전력을 확인해 봤다.
수도라 그런지 미스릴급 용병도 다수 활동하고 있어, 묘족을 상대로 피를 봤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한 마리에게 당한 거예요. 저희는 녀석을 악몽이라 불러요.”
악몽이란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수도의 용병들은 묘족 사냥을 꺼렸고, 개미 용병단과 그림자가 나섰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꼬리가 몇 개야?”
꼬리가 다섯 개쯤 된다면 기사급이 나서야 하니, 그럴 수 있는데.
메르디아는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하나에요.”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