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147화 (146/189)

147화. 쥐와의 전쟁 (9)

어딘지 모를 어느 한 공간.

원형의 테이블에 통신 구슬 열두 개가 배치돼 있었다.

통신 구슬이 홀로그램을 띄우며 열두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라우드 왕국에서 암시장이 열린다지.”

“거긴 전쟁광인 삼 장로가 담당한 곳 아닌가?”

“삼 장로, 그쪽 소식 좀 말해 줘요.”

“별것 없다. 조만간 7왕자에 의해 왕국이 뒤집힐 것이며, 탐욕에 눈먼 자들이 흘린 피가 강이 되어 흐를 것이다!”

“호~ 노친네가 준비 좀 했나 봐?”

“삼 장로, 너무 경거망동하지 마라. 암시장에 제국 놈들이 참가했을지도 모른다.”

“제국이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여유가 없을 테니까요.”

“12장로인가? 제국에서 재미 좀 보고 있나 보지?”

“뭐, 저야 사부님이 물려주신 연구나 꾸준히 하고 있을 뿐이지요.”

“아직도 혈석을 연구하는 건가? 재물이 많이 필요할 텐데?”

“좋은 후원자를 만나서 그럭저럭 꾸려 가고 있습니다.”

7장로가 12장로의 연구를 흥미로워했다.

“성과가 있으면 공유해 줬으면 좋겠군.”

“저희가 그럴 정도의 사이였었나요?”

“공짜로 받겠다는 건 아니야. 이쪽에선 키메라에 관한 자료를 넘기지.”

“키메라라면 혈석과 좋은 조합이긴 하죠. 그런데 전 키메라보단 2장로의 연구가 더 궁금하군요.”

“저… 말인가요? 저는 그냥 식물을 좀…….”

“세계수의 연구를 이어받으신 분께서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전 아직…….”

“암흑가를 통해 유통되는 윤활제가 2장로의 작품이더군요.”

따분해 하던 8장로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게 2장로 작품이라고? 뭐야? 그럼 나 죽는 거야? 어떻게 죽는 거야?”

장로들이 당황하며 2장로를 바라볼 때, 12장로가 말했다.

“저도 혈석 제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연구해 봤지만, 제 수준으론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더군요. 아마 2장로께선 대륙을 뒤엎을 만한 뭔가를 설계했을 테죠. 가령 아무도 모르게 인간을 서서히 식물로 바꿔 버리는 윤활제를 유통하고 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12장로의 기괴한 망상이 흘러나오자 장내의 모두가 2장로를 두려워하며 경외했다.

“전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요.”

2장로가 변명하듯 말하자, 8장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12장로가 아쉬워했다.

“다행이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다니. 뭔가 진행할 때는 말 좀 해 주라고. 난 사부처럼 동료의 광기에 희생되고 싶지 않아.”

“전 지극히 정상인데…….”

2장로가 난감해하며 한 말에 1장로가 답했다.

“네 사부도 지극히 정상인 척하며 대륙의 식물을 지워 버리기 위한 연구를 했었지. 만약 당시에 장로들이 나서서 막지 않았다면 대륙은 일찍이 멸망했을 거야.”

“그건, 인공 세계수 육성 과정에서…….”

“젠장! 그때의 연구 자료만 있었어도!”

“사부님은 왜 2장로를 막은 거야!”

“2장로, 네 연구가 무엇이든 우린 막지 않겠다. 우릴 외면한 인간들에게 절망을 선사해다오.”

2장로는 할 말이 많았지만, 분위기상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참이나 정보를 주고받던 열두 명의 인영.

“삼 장로의 건투를 빌지.”

정보를 충분히 얻었다고 생각한 인영들이 하나둘 통신을 종료했다.

* * *

클라우드 왕국 수도의 어느 지하실.

통신을 마친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제국의 간계로 암흑신전과 일전을 벌인 그날로부터 50년… 클라우드 왕국을 시작으로 그동안 너희가 쌓아 온 모든 걸 내 손으로 파괴해 주마.”

충혈된 눈을 한 그는 50년 전, 사도와 충돌하여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흑탑의 후손이었다.

* * *

통신을 마친 젊은 여인이 깔끔하게 정리된 지하 연구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전부 날 미친년으로 보고 있어. 난 지극히 정상인데 말이야.”

한숨을 푹 쉰 여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지하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쟁광인 삼 장로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이곳도 위험해질 텐데… 여길 떠야 하나?”

떠나도 갈 곳이라곤 남부 대산림뿐.

“야만인들 사이에서 살아갈 자신은 없고, 제국으로 갔다가 흑마법사라는 게 들키면 바로 사형일 거야. 역시 돈을 모아서 사막 왕국 아스만으로 가는 게 좋겠어. 거기라면 무소속 흑마법사도 많을 테니까 숨어 지낼 수 있을 테지.”

여인은 연구소의 식물들을 가져와 윤활제를 만들며 이민 계획을 세웠다.

* * *

암시장이 열릴 때가 되자 베르딘이 가면과 팔찌를 구해 왔다.

“이걸 착용하셔야 암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가면은 인식 저해 마법이 걸려 있어 착용한 상대를 알아볼 수 없도록 하는 물건이었고, 팔찌는 마력을 봉인하는 물건이었다.

“이게 암시장 입장권을 대체하는 건가?”

“네. 일회용 마법 물품으로, 암시장이 폐장될 때까지만 유효한 물건입니다.”

일회용이라지만, 마법 물품은 매우 귀했다.

“두 개 합쳐 2골드입니다.”

굉장히 비싼 물건으로 암시장 개최자들은 입장권만 팔아도 떼돈을 벌 수 있었다.

구해 온 가면을 착용해 봤다.

새어 나온 공허의 마력으로 인해 고장 났다.

“1골드가…….”

고급 노예 1명 값이 날아갔다며 슬퍼하는 베르딘이었지만, 준비한 자금만 2만 골드가 넘는 내겐 큰돈이 아니었다.

“몇 개나 남았어?”

“이제 다섯 개 남았습니다.”

공허의 마력을 완전히 갈무리한 채 착용해 봤다.

‘쓸 수 있겠어.’

가면을 쓰니 마력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듬이 감각은 살아 있네.’

“어때? 인간처럼 보여?”

“음… 개미족이라는 사실은 알 수 없겠군요.”

가면과 팔찌를 착용한 베르딘을 봤다.

눈으론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지 잘 인식되지 않았지만, 더듬이 감각으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인간 전용이란 말이군.’

베르딘은 암시장이 폐장할 때까지 스스로 팔찌를 뺄 수 없다고 했다.

“너무 일찍 착용했네요.”

“그렇네.”

내 기준에서 두 물품은 내구력이 약해 조심히 다루어야 했다.

암시장에선 화폐로 특별한 칩이 쓰였기에 미리 칩을 대량으로 사들여야 했고, 물건을 팔고 싶다면 사전에 등록해야 했다.

나는 개미표 무구와 장신구 중 최상품들을 경매장에 등록했다.

더 팔 게 없나 고민할 때, 개미교도 중 첩자 교육을 마친 아이들이 하급 노예로 팔려 가길 자처한다는 보고서를 받게 됐다.

상급이 아닌 하급으로 팔리길 원하는 건, 하급 노예에 대한 관리가 허술하여 간첩 활동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다크 님, 각지에서 훈련된 아이 200명이 암시장의 상품으로 팔리길 원하고 있습니다.”

암시장에 등록하면 각지로 팔려 갈 테고, 정보국의 힘이 미치지 못한 곳으로 가게 되면 이쪽에서 도움을 줄 수 없다.

‘힘들게 키운 애들을 버리는 패로 쓰기에는 아까워.’

좀 더 오래도록 부려 먹을 생각으로 아이들의 판매를 불허했다.

“다크 님은 상냥하시군요.”

베르딘이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개미족이 너희와 같은 감정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마.”

“알고 있습니다.”

암시장 참가 준비가 진행되던 중, 첩자 교육을 마친 50명의 아이가 탈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어떻게 된 거지?”

베르딘이 아이들의 탈주를 방조한 인간들을 잡아 왔다.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들은 개미교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아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규모가 커져서 그런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군.’

마력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선 무욕의 팔찌를 쓸 수 없어, 그곳에서 쓰일 칩을 미리 가방 가득 채웠다.

나를 포함해 베르딘, 메르디아, 루리아가 암시장에 참석하기로 했고, 때가 되자 초청장이 날아왔다.

초청장엔 장소와 시간이 지정돼 있었다.

“비무장 상태로 가야할 듯합니다.”

“그러자.”

지정된 장소는 한군데가 아니었는지 무수히 많은 장소에서 암시장을 향해 가는 마차가 출발했고, 나와 일행은 눈을 가린 채 마차를 타야 했다.

눈은 가려도 세상을 더듬이로 보는 내겐 불편함이라곤 없었다.

반나절을 이동하여 테헤라 외곽의 어느 숲속, 던전으로 여겨지는 지하로 들어섰고, 깊숙이 이동하니 불빛으로 가득 찬 향락의 도시가 나왔다.

‘생각보다 크군.’

안내인이 안대를 풀어 주며 칩으로 가득한 가방을 돌려줬다.

험상궂은 사내와 음침한 마법사들이 운영하는 각종 상점이 거리를 채웠고, 유흥을 위한 상점들도 있었다.

“노예, 장물, 마법 물품, 무기, 곡물, 희귀 재료, 독극물, 마약, 술, 도박, 청부 살인, 정보, 여자… 칩만 있다면 원하는 걸 뭐든 구할 수 있는 암시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왕국의 거대 암흑가 여덟 곳이 연합하여 개최한 암시장.

없는 물건 빼곤 다 있으며, 의뢰를 넣으면 어떻게든 구해다 준다고 했다.

“처음이신가요?”

인식 저해가 걸려 있지 않은 가면을 착용한 여자들이 돌아다니며 안내인을 자처했고, 노예 시장을 찾던 우리 일행에게도 한 명이 붙었다.

“노예 시장은 오후부터 열릴 거예요. 그때까지 이곳을 소개해 드릴게요.”

안내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악의를 느낄 수 없어 지켜보기로 했다.

“암시장을 찾는 분들은 이곳부터 들르세요.”

안내인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도박장.

“제국에서 유행하는 카드 게임과 룰렛이 있어요.”

카드 게임은 포커와 비슷했고, 룰렛도 생소하진 않았다.

“처음이시다면 룰렛부터 해 보시는 건 어떤가요? 원하시는 숫자에 돈을 걸기만 하면 돼요.”

1~36번까지 있는 숫자판.

숫자 하나에 걸면 배당이 36배.

숫자와 숫자 사이에 칩을 걸면 배당이 18배.

4개의 숫자 사이에 칩을 걸면 배당이 9배.

1~12, 13~24, 25~36 중 하나에 걸면 배당이 3배.

홀수나 짝수에 걸면 배당이 2배.

얼핏 보면 확률 게임으로 보이지만…….

“칩은 몇 개까지 걸 수 있지?”

나의 물음에 딜러가 답했다.

“상한은 10골드입니다.”

홀수에 50실버를 시작으로 잃을 때마다 두 배의 칩을 배팅할 경우, 5회 안에 홀수가 한 번이라도 나오면 돈을 딸 수 있다.

필승법을 떠올렸으니, 남은 건 노가다뿐.

메르디아가 시작부터 짝수에 10골드짜리 칩을 걸었고, 베르딘은 1골드짜리로 대박을 노렸으며, 루리아는 우리가 배팅하는 걸 지켜봤다.

룰렛이 돌아가며 행운의 주인이 결정됐다.

짝수가 터지며 메르디아가 환호했다.

‘초심자의 행운이군.’

그 뒤로 메르디아는 짝수에만 걸었고, 나는 작전대로 차근차근 배팅금을 키워가며 홀수에 걸었다.

‘운만으로 하는 게 아니란 걸 알려 줘야겠어.’

그렇게 다섯 번 짝수가 터지며 메르디아는 50골드를 벌었고, 나는 13.5골드를 잃었다.

13.5 골드.

가져온 칩에 비하면 작은 손실이었지만, 자존심에 금이 가고 말았다.

‘다섯 번 연속으로 짝수라니!’

확률적으로 판마다 50%라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은 무조건 홀수다!’

룰렛에 짝수만 연속으로 다섯 번 떴다는 게 알려지며 많은 인간이 몰려와 홀수에 배팅했다.

모든 인간이 홀수를 바라는 상황.

딜러는 땀을 삐질삐질 흘려 가며 룰렛을 돌렸다.

“홀! 홀! 홀!”

인간들의 외침 속에 구슬은 또 한 번 짝수에 들어갔고, 그렇게 열세 번 연속 짝수가 터지며 도박장의 딜러, 안내인, 메르디아만이 환호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룰렛에 필승법 따윈 없음을 인지한 나는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판돈이 제일 높은 포커판을 찾았다.

‘포커라면…….’

가면의 인식 저해 마법 때문에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배팅 승부.

더듬이를 가진 나만이 상대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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