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쥐와의 전쟁 (11)
묘인족에겐 인간에게 없는 뛰어난 감각와 고양이 걸음이 있다.
두 특성을 눈여겨본 흑탑의 삼 장로는 그들을 암살자로 육성하여 써먹을 계획이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다른 녀석에게 저희가 예약한 물건이 넘어갔습니다.”
“…지금 암흑가 놈들이 날 배신했다는 소리인가?”
“놈들이 최상급 노예로 보상하겠다고…….”
“흠, 최상급 노예면 나쁘지 않군.”
예약한 묘인족이 엄한 놈에게 넘어가며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최상급 노예는 묘인족보다 열 배는 비쌀 터였다.
‘묘인족이야 희소하긴 하지만, 찾는 놈들이 없으니…….’
“암흑가 놈들에게 제대로 된 최상품으로 보내라고 전해라.”
“네.”
흑탑의 삼 장로는 자신을 무시한 암흑가 전체를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하층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암흑가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되는 자들이 아니었다.
거기다 흑탑의 삼 장로가 암시장에 참여한 건 경매에 나올 파멸의 검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 묘인족에 관한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져온 칩이 많이 줄었군.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제자들을 추궁하여 도박과 뽑기로 상당량의 자금이 소진됐음을 알게 된 삼 장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는 관련된 제자의 심장을 터트렸다.
“이대론 파멸의 검을 손에 넣기 힘들지도 모른다.”
삼 장로는 부족한 칩을 구하기 위해 암흑가 놈들이 운영하는 전당포를 방문했다.
“네놈의 목숨값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물건이니 잘 보관하도록.”
“상급의 마도서와 최상급 스태프군요. 상당한 물건이란 건 알겠습니다.”
전당포에 맡긴 물건은 한 달 안에 이자를 비롯한 원금을 갚으면 되찾을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물건의 소유권이 넘어간다.
‘파멸의 검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저런 스태프와 마도서 쯤이야…….’
전당포에서 받은 칩으로도 부족함을 느낀 삼 장로는 마일도스 후작을 찾았다.
“경매에 나올 파멸의 검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제 쪽에 칩을 몰아주십시오.”
“흠… 나도 엘프의 묘약을 노리고 있어서 말이야.”
“엘프의 묘약이라면 후작님의 아드님에겐 효과가 없을 겁니다.”
“나도 아네. 내 아들을 치료하려면 정화의 왕관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칠왕자가 왕위를 잇는 순간까지 아들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일세. 그러니 엘프의 묘약은 내겐 꼭 필요한 물건이야.”
“후작님…….”
흑탑의 삼장로 히스는 분노를 억누르며 후작을 설득하려 했으나, 마일도스 후작은 끝내 칩을 내주지 않았다.
“후회하실 겁니다.”
“파멸의 검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가?”
“웬만한 영지보다 가치가 높다는 것만 알아 두십시오.”
“그런가…….”
히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마일도스가 그를 앉혔다.
“칩을 내줄 순 없지만, 도움을 주겠네.”
“도움이라면?”
마일도스는 경매에 참여할만한 재력가들을 암암리에 불러 모았다.
그러곤 각자 원하는 물건을 공유하여 서로 경쟁 없이 물건을 취득하기로 합의를 봤다.
합의하던 도중, 어스 상단의 큰딸 루카와 아스만의 왕세자 나시르가 다크에 대해 물었다.
“제 칩을 털어 간 놈도 여기에 있나요?”
“그가 왔다면 소개 좀 부탁하지.”
“아쉽지만, 그는 암시장 놈들과 연결돼 있을지 몰라 초청하진 않았습니다.”
마일도스 후작의 말에 나시르가 아쉬워했고, 루카는 걱정스러워했다.
“그가 가진 칩이 상당하던데, 대책은 있나요?”
“그가 얼마를 가지고 있든, 저희 모두를 상대할 순 없는 법이지요.”
“그렇긴 하죠.”
* * *
경매장에는 1,000골드 이상의 칩을 보유한 자들만이 초청됐다.
그렇게 초청된 참가자는 스무 명 정도.
특권층의 리그라 할 수 있겠다.
경매 참석자에겐 3층에 자리한 별실과 숫자판이 주어졌다.
나와 일행은 7번 방으로 안내됐고, 숫자판도 7번이다.
별실의 유리 벽 너머로 단상이 보였고, 다른 방들이 보였다.
참석자끼리 떨어져 있으니 서로 간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더듬이 감각으로도 그들의 상황을 읽을 수 없게 됐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겠어.’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원하는 물건이 같으면 치열한 경쟁이 될 듯한데…….
단상에 진행자가 올라와 입찰 방식을 설명해 줬다.
경쟁 입찰 방식으로 진행자가 부른 가격에 입찰할 의사가 있으면 주어진 숫자판을 들면 된다.
숫자판은 앞면과 뒷면의 색상이 달랐다.
푸른 면을 들면 입찰 의사가 있다는 걸 표명하는 것이고, 붉은 면을 들면 진행 속도를 높이라는 의미였다.
진행자가 설명을 마치자 경매 물품들이 단상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럼 특급 노예 경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강해 보이는 사내들이 사슬에 칭칭 감긴 채 단상에 끌려 나왔다.
“오러를 잃었다지만, 이들의 기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진행자가 선보인 자들은 전직 미스릴급 용병, 혹은 기사였던 인간으로, 투기장의 상품으로 쓰기 좋은 노예들이었다.
강해 봐야 오러를 다룰 수 없어 익스퍼트가 될 수 없는 자들.
무력만으로 특급 노예가 된 건 아니었다.
제국에서 명성을 크게 얻었던 용병,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자에게 배신당해 노예가 됐다든지, 누구나 알만한 귀족가의 서자로 가문의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예가 되길 자처했다든지, 주군의 여인을 사랑한 죄로 노예로 팔려오게 됐다든지, 미친 마법사의 실험실에서 생존한 아이라든지…….
그들의 혈통과 사연이 더해져 특급 노예가 된 자들이었다.
“1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1골드, 12골드…….”
외모도 출중한 자들이라 20골드까지는 다들 숫자판을 들었지만, 그 이상이 되니 하나둘 숫자판을 내리기 시작했다.
“다크 님, 계속 들까요?”
나를 대신해 숫자판을 들고 있던 메르디아.
“자금은 충분하니까, 계속 들어 봐.”
30골드가 넘어갈 때는 7번 숫자판을 지닌 나와 13번이 남아 경쟁했다.
50골드 넘어가니 메르디아의 손이 떨려왔고, 그도 숫자판을 쉽사리 들지 못했다.
“다크 님…….”
확실히 50골드면 상급 노예 50명은 살 수 있고, 최상급 노예 다섯은 살 수 있다.
‘경매만 아니었으면 20골드면 살 수 있었겠지.’
사연 좀 있다고 입찰하기에는 가성비가 현저히 떨어졌지만, 원하는 자가 있으면 뺏고 싶은 게 인지상정.
‘뭐든 뺏어 먹어야 제 맛인 거지.’
투기장용 노예 경매가 끝나니, 애완용 노예가 소개됐다.
출중한 외모, 혈통, 그리고 사연…….
애완용 노예는 투기용 노예의 2배 가격을 오갔지만, 숫자판을 드는 놈들이 있으니, 나도 메르디아를 시켜 들게 했다.
“73골드, 더는 없습니까?”
땅땅.
나는 경쟁자들을 떨쳐 내며 하나씩 낙찰받았고, 경매 진행자는 순조로운 벌이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슬슬 나의 독주에 참석자들의 눈이 돌아갈 것이라 여겼으나, 참석자들은 여유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지?’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베르딘이 말했다.
“아무래도 13번의 목적은 다크 님의 칩인 것 같습니다.”
“13번만이 아니에요. 모두 다크 님을 주시하고 있어요.”
노예 경매가 끝나고, 맹수 경매가 시작됐다.
강인한 맹수는 투기용으로, 새끼 맹수는 애완용이었다.
맹수는 쓸데가 없어 내가 숫자판을 들지 않으니, 낙찰 경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진행자는 입찰 경쟁이 일어나지 않아 당황했고, 경매 주최 측도 당황했는지 경매를 한 차례 중단시키며 예고에 없던 물건을 내보내 참석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새로운 물건에 경쟁이 붙다가도 서로 눈치껏 양보하는 것이…….
“더럽게 나오는군.”
날 담당하던 안내인이 잠시 밖에 불려 갔다 들어와선 내게 쪽지를 전했다.
내게 VIP 배지를 준 암흑가 수장이 도움을 요청해 온 것이다.
대가로 상품 노예 상당수를 양도해 주기로 하여 그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알겠다고 전해.”
내가 숫자판을 들어주며 바람잡이 역을 수행하자, 진행자는 구세주라도 만난 양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주최 측에서 보내온 정보를 토대로 입찰가를 적정 수준으로 올려 참가자들의 칩을 소모시켰다.
맹수 경매가 끝나고, 명마 경매가 시작됐다.
종마용, 과시용, 전투용으로 나뉘었고, 나는 주로 종마용 말을 나쁘지 않은 가격에 낙찰받았다.
무기 경매에선 메탈 워커가 만든 개미표 미스릴 무기가 다수 나왔다.
숫자판 17번을 든 여인이 열정적으로 숫자판을 들었다.
‘아스만의 상인인가?’
개미족의 작품이 헐값에 팔려나가지 않도록 메르디아가 숫자판을 열심히 흔들었다.
절반에 가까운 무구를 낙찰받는 바람에 수수료 손실이 발생했으나, 17번의 칩을 털어 숫자판을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 놈 보냈군.’
이어진 장신구 경매.
여기서도 개미표 상품이 다수 등장했다.
1번 번호판을 든 아스만의 왕자.
나는 장신구에 매입을 원하던 그와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승자는 왕자였으나, 바람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 나는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예술품 경매에선 도자기, 그림, 조각 같은 게 나왔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물건들은 제작자가 불명이어서 원하는 인간이 없었다.
예술품은 명망 높은 가문에서 인정했다는 증서 하나로 가치가 뻥튀기됐는데,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예술품은 필요하지 않은데 말이야.’
원하는 예술품은 없었지만 입찰가를 높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낙찰받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예술품이 모두 낙찰되니, 희귀 소재가 나왔다.
“울트라 솔져의 외골격, 1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스카이 워커의 더듬이, 1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3차 진화종의 신체 부위도 거래됐다.
준왕급 수준의 몬스터에게서 나올 최상급 마석도 나왔다.
특급 마석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지만, 마석은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 자산이기에 적당한 값에 낙찰받았다.
로브의 노인인 13번이 희귀한 식물의 소재를 낙찰받으려 해서, 노예 입찰 때의 복수를 겸해 낙찰가를 뻥튀기 해 줬다.
오전 경매가 끝나고, 홀에 모여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날 원수 보듯 노려봤고, 제대로 된 경매는 오후부터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들의 비아냥을 들어 보면, 내가 오전에 무리해서 오후 경매에선 힘을 못 쓸 것이라는 게 주 내용이었는데…….
아쉽게도 그들이 도박판에서 앓은 돈만큼 내 자본도 불어났기에, 이곳에서 내 상대가 될 만한 재력가는 없었다.
오후 경매가 시작되기 전, 별실에서 정산 시간을 가졌다.
무기와 장신구를 팔아 번 칩과 경매에 쓴 칩이 상쇄되며 살짝 초과된 낙찰 대금을 지급했다.
“자, 그럼 마법 물품에 대한 경매가 있겠습니다.”
신체를 2년 전으로 돌려준다는 엘프의 묘약.
엘프가 만든 게 아니라 멸종 위기 종인 엘프로 만들어진 귀한 물건이었다.
“10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 나서지 않던 3번 참가자가 숫자판을 들었다.
‘마일도스 후작이군.’
주최 측에서 알려준 적정가는 500골드였지만, 7왕자 편인 그는 나와 적대관계나 다름없었다.
나는 붉은 숫자판을 계속 흔들어 경매가를 2천 골드까지 튀겨 버렸다.
그가 흥분하여 내게 삿대질했으나, 그 감정이 전해지기에는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었다.
5천 골드까지 높이니 부들부들 떨었고, 7,200골드로 내가 낙찰받으니 후작이 쓰러졌다.
‘많이 가지고 싶었나 보군.’
후작이 실려 가며 잠시간 경매 중단됐다.
이어진 물건들도 내가 값을 뻥튀기하니 다들 날 미친놈 보듯 봤고, 부들거리며 숫자판을 들었다.
어느 순간 칩들이 말랐는지 숫자판을 드는 자가 없어, 가성비 좋게 마법 물품을 낙찰받게 됐다.
마지막 마법 물품으로 등장한 건 허름해 보이는 검 한 자루.
“욕망을 힘으로 바꿔주는 검, 이 검만 쥔다면 누구나 소드마스터!”
파멸룡 아프니카라 불린 드래곤이 만들었으며,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보관하던 물건이었지만, 그 가문이 망하면서 경매품이 된 것이었다.
참석자들의 뜨거운 반응과 함께 13번이 숫자판을 맹렬히 흔들었다.
‘저건!’
볼품없어 보이는 검과 달리 그걸 감싸고 있는 사슬은 절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봉마의 사슬이잖아!’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