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쥐와의 전쟁 (12)
“1,00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100골드! 1,100골드 없으십니까?”
13번 숫자판을 든 노인 외에 파멸의 검을 원하는 자는 없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카탈로그에 나와 있었다.
소유자의 수명을 마력으로 변환해 주는 검이라, 실전용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컸으니 말이다.
‘발동 조건도 까다로워.’
수백 년 동안 쓰인 적 없는 낡은 골동품이었고, 겉으로 봐선 내구도도 의심스럽다.
숨겨진 기능이 있다고 해도 분노의 도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개미족이다.
감정을 원동력 삼는 무구는 대체로 인간 전용 무기지, 개미족에겐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봉마의 사슬이 세트로 묶여 있다면 숫자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묶은 대상의 마력을 봉인하는 사슬…….’
마력에 의존하는 종족에게 치명적인 속박 아이템.
마력 없이도 상당히 강한 개미족과는 상성이 좋은 아이템이었다.
내가 숫자판을 들어 입찰 의지를 내비치자, 13번이 숫자판을 맹렬히 흔들며 날 노려봤다.
마치 이건 내 것이니 건들지 말라는 눈빛이었으나, 나 또한 숫자판을 흔들어 보이며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란 의미로 턱을 치켜세웠다.
“1,200, 1,300…….”
백 단위로 가격이 오르던 파멸의 검은 어느 순간 500단위로 치솟기 시작했고, 이윽고 1,000단위로 바뀌며 순식간에 3천 골드를 넘어섰다.
대다수 참석자는 나와 13번을 번갈아 보며 황당해했다.
베르딘과 루리아도 거액이 오가는 경매에 긴장한 듯했는데, 메르디아는 노인의 반응을 생중계해 주며 날 응원했다.
“13번이 떨고 있어요. 정말 이걸 원했나 봐요. 화나셨다.”
콰앙!
13번이 유리벽을 치며 격분했다.
유리벽은 마법으로 강화 처리가 돼 있었는지, 깨지지 않았고, 엄한 손만 다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4,000골드 낙찰입니다!”
주최자가 준 정보대로라면 적정가는 1,000골드.
13번 때문에 3천 골드나 더 쓰게 됐지만, 아직 칩은 많았다.
마도구 경매가 끝나자, 참석자 대다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기대하시던 제국 물품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해 줄 물건들은 카탈로그에도 나와 있지 않다.
주최자에게서 받은 적정가 목록에도 나와 있지 않아 기대했는데…….
“현 황제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수련용 검, 1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황제가 어릴 적 쓰다 버린 수련용 검이었다.
‘쓰레기군.’
주최자의 양심이 의심되는 입찰가로 시작됐고, 참석자들 사이에선 반응이 뜨거웠다.
명마 한 필 가격인 300골드에 쓰레기가 낙찰됐다.
인지도 정점을 찍은 슈퍼스타의 장난감이 수십억 대의 스포츠카와 같은 가격에 낙찰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내가 모르는 가치라도 있는 건가?’
이어서 나온 물품들을 보곤 나는 확신했다.
“황후의 데뷔탕트 드레스! 1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세레나 교의 추기경이 즐겨 입던 내의, 1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수천 골드를 호가하는 물건은 없었지만, 제국 고위층이 쓰다 버린 중고품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뒤로 가니, 모 공녀의 속옷부터 대마법사가 만든 성인 용품까지 나왔다.
뭔가 특별한 게 나올 거라 기대했던 나는 경매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숫자판을 들 일은 없었다.
‘이곳 인간들의 소비 심리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이곳 인간들이 고위층을 선망하며 생겨난 그릇된 욕망이 분출된 듯한데…….
마지막은 조금 아쉬웠지만, 괜찮은 노예 다수와 봉마의 사슬을 얻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신체를 2년 전으로 되돌려 준다는 엘프의 묘약.
노력의 결실까지 지워 버리는 물건이라 사용에 주의해야 했다.
‘쓸 곳이 없단 말이지.’
현 개미족의 제약 능력으로 웬만한 병은 치료할 수 있다.
마일도스 후작이 원하여 지르고 본 물건이라, 쓸 곳을 찾기까진 시간이 걸릴 듯했다.
‘연구용으로 쓰기에는 비싸게 샀어.’
입찰한 물건을 자랑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다.
그곳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입찰한 쓰레기를 자랑했고, 쓰레기를 입찰하지 못한 자를 비웃었다.
‘한심하네.’
악단의 남성들이 착 달라붙은 옷을 입고서 현악기와 관악기로 잔잔한 곡을 연주했고, 구석 테이블엔 뷔페식으로 즐길 수 있는 음식이 배치됐다.
“모두 제국에서 유행하는 요리들입니다.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다양한 요리가 있음에도 대동소이한 느낌.
‘대체로 기름진 고기류들이야.’
메르디아와 일행은 돼지 통구이에 꽂혔고, 내 입맛에는 개미 영양으로 만든 디저트와 꿀을 곁들인 팬케이크가 맞았다.
다만, 영양 등급이 낮아 포만감 이상의 특별함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나의 정체를 캐묻기 위해 접근하는 자들이 있어 조용한 난간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더듬이를 통해 파티장의 상황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내인들이 날 찾는 것 같아 메르디아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저쪽 손님께서 만남을 청하시는데…….”
아스만의 왕자가 조금 전 입찰한 개미표 장신구 중 하나를 보내왔다.
“용건은?”
“친분을 다지고 싶다고…….”
보내준 선물값으로 잠깐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인식 저해 가면 때문에 상대는 나의 성별조차 알 수 없다.
“장신구와 보석을 좋아하시더군요.”
“조금 전 경매에선 미안하게 됐군, 선물할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왕자는 자신이 장신구를 싹쓸이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하며 포도주를 건넸다.
참석자들은 포도주를 한 잔씩 마셨는데, 개미족은 알코올에 약하다.
데몬 앤트인 내게는 그런 약점이 없으나, 본능적으로 술을 경계하게 됐다.
“제가 술이 약해서.”
“그럼 음료수로 바꿔 주겠네.”
하인에게 말해 술잔을 음료로 바꾼 왕자가 날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제국에서도 보기 드문 물건이야. 자네 때문에 지출이 컸지만, 재밌었네.”
“저도 재밌었습니다.”
“하하, 재밌군, 그대는 어디 쪽 사람인가?”
출신지는 적당히 제국이라 둘러댔다.
“그래, 제국이었지.”
아스만의 왕자는 호탕한 인물로 일견 생각 없는 도련님처럼 보였지만, 그가 품고 있는 마력에선 깊은 지혜가 느껴졌다.
“노예 경매에 적극적이더군.”
아스만의 왕자는 주변을 둘러보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쓸 곳이 많은가 보지?”
마치 내가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의미심장한 말투.
“자네도 알겠지만, 대부분 최상급 노예는 아스만을 거치지.”
제국과 왕국들 사이에 있는 사막 왕국 아스만.
교역의 중심지이면서 향락의 도시기도 한 도시 국가.
“던전이 많아 용병과 마법사도 많은 곳이지.”
왕자의 말로는 최상급 노예가 필요하다면 아스만에 가 보라고 했다.
“자네가 원하는 게 아스만에 있을 거네.”
“기회가 되면 가 보죠.”
왕자와 이야기하던 중 아스만의 상인, 마일도스 후작, 그리고 노인이 다가왔다.
“저희가 껴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해라. 그러라고 있는 피로연이지 않은가.”
그들은 왕자에게 예우를 지켰으나, 내겐 그렇지 않았다.
“개미표 무구를 거래하고 싶어요!”
용건을 말해오는 아스만의 상인.
“엘프의 묘약을 어디다 쓰려는 건가? 3천 골드와 헬리오스교의 최상급 포션 다섯 개를 줄 테니, 엘프의 묘약을 양도해 주게…….”
엘프의 묘약을 청하는 마일도스 후작.
“왜 하필 파멸의 검이지? 그대가 가져가도 쓸모없지 않은가?”
내게 화를 내는 로브의 노인.
아스만 왕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는 건 어떤가?”
왕자의 오지랖으로 협상의 장이 마련됐다.
별실에서 왕자와 상인은 가면을 벗어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다.
“아스만의 삼 왕자, 나시르 드 아스만이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어스 상단에서 클라우드 왕국과의 무역을 맡고 있는 루카입니다.”
“상단주의 막내딸인가? 상재가 출중하다곤 들었네.”
루카에 대해선 다들 알고 있었는지 놀라는 인간이 없었다.
“사정상 이곳에서 절 밝히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시르 왕자님.”
“죄송합니다. 왕자님.”
“강요는 하지 않겠네.”
마일도스와 로브의 노인은 가면을 벗지 않았고, 왕자가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저도 벗을 생각 없습니다.”
“아쉽군. 내가 공증할 테니, 서로 원하는 바를 말해 보도록.”
나시르의 중재로 협상이 시작됐다.
루카는 개미표 무구를 원했다.
“저도 이윤을 남겨야 하니, 이 가격으로 넘겨주시면 추후 보답하겠습니다.”
입찰한 가격보다 살짝 높은 가격.
‘수수료까지 계산한 금액이군.’
가격을 살짝 상향 조정하는 대신 물량을 늘려 주기로 했다.
큰돈이 오가는 거래에 로브의 노인과 마일도스 후작은 살짝 놀란 눈치였고, 그들의 태도가 정중해졌다.
“엘프의 묘약을 주게. 원하는 건 뭐든 주지.”
마일도스 후작은 내게 선 제시를 요청했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하군.’
너무 과한 걸 요구했다간 또 쓰러질 것 같아, 2만 골드에 해당하는 물품을 받기로 했다.
경매에서 얻은 물건을 3배가로 파는 날 보며 루카의 눈이 반짝였다.
“대단하시군요. 귀족보단 상인이 어울리겠어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사슬을 제외한 파멸의 검도 3배가를 불러봤는데, 노인은 검의 가치를 깎아내리며 거래가를 낮추려 했다.
“필요 없으면, 안 사시면 됩니다.”
배짱 장사를 했더니, 노인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마일도스 후작과 노인에게선 꿍꿍이가 느껴졌지만, 아스만의 왕세자가 자리한 곳에서 이루어진 협상이라 쉽사리 어길 순 없을 터였다.
* * *
큰 대가를 치러 가며 파멸의 검을 양도받은 흑탑의 삼 장로 히스.
그는 제자에게 검을 들게 했다.
이동 중, 검을 떨어트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챙그랑!
낡은 검이 부러졌고, 제자가 사색이 되어 히스를 올려다봤다.
죽는다고 생각한 제자와 달리 히스는 담담했다.
“날이야 갈면 되는 물건이니 괜찮다.”
“네?”
제자의 반문에 히스가 설명했다.
“파멸의 힘은 손잡이에 새겨져 있다. 뛰어난 대장장이를 구해 미스릴 날을 끼우도록 하라.”
삼 장로 히스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근위대 대장 가일론 백작을 상대할 카드를 손에 넣었군.”
* * *
경매가 끝나고,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진 우린 벨레삭 백작령의 약속된 접선 장소에서 입찰한 노예와 물건을 받았다.
놈들과 접선할 방법을 알게 된 나는 추후 그들에게 맥주를 판매할 생각이었는데, 당장 급한 건 묘인족을 활용해 둥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다크 님, 묘인들의 상태가…….”
베르딘이 인상을 찌푸렸다.
받은 묘인은 총 50명.
모두 어린아이들이었고, 상태가 좋지 못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거기다 아이들은 묘족을 다루는 방법을 몰랐다.
묘족 출신 사도인 타르가 쥐들과의 전쟁에서 앞장서고 있으나, 둥지의 하위 군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어, 자원이 말라 버린 실정.
긴급 상황에 비장의 한 수라 여긴 묘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들이라니.
‘어떡하지?’
방법을 짜내던 중, 의료 개미들에게 치료를 받은 묘인이 하나둘 묘족에게 간택 당해 집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라?’
서적에선 묘인이 묘족을 다루는 전투 종족이라 나와 있으나, 지금 보니 지구의 고양이가 인간에게 기생하듯 이곳의 묘족은 의사소통이 잘 되는 묘인과 계약하여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하인처럼 부리던 것이었다.
‘그렇군. 묘인은 고양이 집사에 특화된 일족이었어.’
묘인 하나가 여러 마리의 묘족에게 간택 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묘족 여럿을 케어하게 된 묘인을 둥지에 투입하자, 묘족들이 일대의 쥐들을 쓸어버렸다.
묘족의 감각은 쥐를 찾아내는데 특화돼 있었고, 그들의 울음은 쥐를 꼼짝 못 하게 했다.
묘족이 잡은 쥐는 묘인이 손질하여 함께 나눠 먹었다.
자급자족까지 가능한 그들은 쥐와의 전쟁에서 톡톡한 성과를 보이며 쥐들에게 점령당한 둥지 일부를 되찾아 줬다.
‘형세가 좋아지고 있어.’
나는 암시장에서 배운 방법대로 암흑가와 접선해 묘인을 주문했다.
사들인 묘인이 충분한 수의 묘족을 거느리게 되며 둥지에 투입해 전공을 쌓게 했다.
형세는 나아지고 있지만, 방어 체계가 만들어지고 있을 뿐, 불어난 쥐가 한순간에 사라질 순 없다.
개미교도로 교육 중인 인간들까지 모두 투입해 하위 군체를 복구하던 중, 각지로 뻗어가던 개미 상점들이 하나둘 지역 상단에 의해 강탈당했다.
“아무래도 암시장이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지?”
문트리아의 보고에 의하면, 귀족들이 암시장에서 입은 손실을 상인들을 통해 메우려 했고, 개미 상단 때문에 자금이 마른 상인들은 이참에 영주의 힘을 빌려 상권을 받아 낸 것이었다.
“피해는?”
“병사들이 습격해 오기 전 직원들은 대피했어요.”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투자금을 날리고 자금줄이 끊기는 바람에 진행하던 사업들이 하나둘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자금이 마르기 시작했어.’
둥지 상황도 그리 좋다 할 수 없는데, 상단까지 휘청이다니.
‘일단 자금부터 확보해야겠어.’
인쇄와 방직 기술이 무르익었고, 투입할 인간도 넘친다.
당장에 무언가를 팔아서 돈을 확충할 순 없지만, 21세기를 살았던 나는 이곳에서 쓸 수 있는 돈 치트를 알고 있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