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돈 복사, 무한 확장 (4)
이곳 세계의 마법이란 뭘까?
기회가 될 때마다 마법서를 구입하여 읽어 봤다.
이곳의 마법이란 자연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이다.
‘주로 마력 배열로 발생하는 현상을 다루었어.’
자연과학, 혹은 물리학과 흡사한 부분이 있고, 제대로 배우려면 수학을 비롯한 이과 계열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순수 이과 학문이라 할 수도 없었다.
고대 문자를 시작으로 룬 문자도 익혀야 했고,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선 그림과 세공 같은 것도 잘해야 한다.
즉, 마법사란 높은 수준의 학자이며 연구자라 할 수 있는데…….
왕실에나 마법사가 몇 있지, 왕국의 귀족들도 마법사를 고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저… 개미님?”
내가 포획한 여인은 식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흑마법사.
원소 마법사가 레어한 인재라면 식물 마법을 주로 익힌 그녀는 유니크한 인재라 할 수 있다.
부정 마력인 흑마력과 긍정 마력인 백마력.
두 마력은 일반적인 마력보다 위력적이고, 같은 마법을 펼치더라도 흑마법사와 성직자의 마법이 더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마법사의 상위 호환 격인 존재야.’
그녀에게서 적대감을 느낄 수 없어, 죽이기보단 써먹기로 했다.
‘흑마법사의 정보를 얻고 마법사를 육성하게 하면 되겠어.’
“네놈, 흑탑 소속이냐?”
내가 대륙 공용어를 쓰니 눈을 크게 뜬 그녀가 안도하며 말했다.
“흑탑을 알고 있군요. 그럼 저희가 인간의 편이 아니라는 것도 아시겠죠.”
적의 적은 같은 편이라 했던가?
그녀는 우리의 주적이 인간이라 생각했는지,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며 목숨을 구걸해 왔다.
봉마의 사슬에 감겨 있어 마안으로 감정 상태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표정만 봐도 그녀가 초조해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미안하지만, 난 인간을 죽이기보단 이용할 생각이야.”
“그럼, 절 왜…….”
“너도 인간이니까.”
나의 대답에 그녀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저도 인간이니, 이용 가치가 있다는 말이군요.”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
“넌 인간이 아닌가?”
“인간이죠. 그렇지만 인간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요.”
“그렇군.”
흑마법사는 인간임에도 몬스터 취급을 받아 온 듯했다.
“너는 고급 인재니, 죽이기엔 아까워. 어때? 우리랑 함께 일해 보는 건.”
“그건…….”
망설이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차 한 그녀가 눈을 찔끔 감으며 몸을 웅크렸고, 나는 무욕의 팔찌에 마력을 주입하여 수납된 금화와 보석을 쏟아 내 보여 줬다.
촤라락.
눈을 뜬 그녀가 쏟아지는 금화와 보석을 보곤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우린 돈이 많아. 조금 많은 게 아니라 아주 많지. 내 밑으로 들어와라. 밥은 굶기지 않겠다.”
내 역량도 보였으니, 개미들에게 테이블을 가져와 놓게 했고, 고용 계약서를 작성해 내밀었다.
노동법이 없는 곳이라 계약서의 내용은 불합리한 항목들로 가득 채웠다.
‘뇌수까지 뽑아 먹고 개조해서 재계약까지 하려면 계약 기간은 10년 정도가 적당하겠어, 근무 시간은 따로 정해 두지 말자. 성과가 없거나 꺼림칙하면 언제든 제거할 수 있도록 특약 조항을 작게 써야지.’
보수와 기타 지원은 개미족 임의로 정하며, 성과가 부족하거나 배신의 징조가 보이면 계약은 언제든 해지할 수 있도록 했다.
“저, 계약 해지에 관한 내용이 왜 이리 많죠?”
“너만 잘하면 계약은 유지될 거다.”
“…해지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여기 적힌 안전 보장 항목을 지킬 이유가 사라지는 거지.”
“…….”
계약서를 가장한 목줄.
하지만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어때? 네 목숨값으론 적당한 것 같은데.”
이곳 마법사들은 마력의 축복을 잃지 않기 위해 거짓된 말과 행동을 꺼려 계약과 관련해선 깐깐한 존재들이다.
그녀는 두 번 세 번 계약서를 살피곤 말했다.
“절 연구원으로 쓸 생각이군요? 제 연구는 식물과 관련돼 있어요.”
“그래서?”
“원하시는 연구 방향을 알려 주세요.”
“지하 식물 농장의 생산량을 늘리는 연구와 약초와 약품에 관한 것도 맡기고 싶다.”
연구 방향에 대해 수긍한 그녀가 사인하기 전에 앞으로 지내게 될 곳을 보여 달라고 했다.
“따라와라.”
난 그녀를 메디가 있는 곳에 데려갔다.
화학실을 방불케 하는 메디의 연구실을 본 그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해요. 제 연구실 이상으로 잘 갖춰져 있어요.”
“메디, 한동안 네가 맡아 줬으면 해.”
“다친 곳도 없어 보이는데, 해부용인가요?”
뭐든 뜯어 보려는 메디의 반짝이는 시선에 그녀가 불안해했다.
“아니, 해부용이 아니라 함께할 동료다.”
“그렇군요.”
실망한 메디를 두곤 가지고 있던 마법서를 꺼냈다.
“이건 고급 마도서잖아. 대부분 원소계라지만, 어떻게 이런 걸…….”
“마법서 수집이 취미라서 말이야. 보이는 대로 사들이게 했지.”
나와 메디의 존재마저 잊고서 마법서를 탐독하는 그녀.
한참이 지나서야 미안해하며 계약서에 사인하기로 했다.
“계약하죠.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요.”
계약서를 나누는 것만으론 믿음이 부족했는지, 그녀는 피의 계약을 권했다.
“마법을 통한 제약으로 서로에 대한 배신을 방지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는 거지?”
“잠시만요.”
그녀는 두 장의 계약서에 난잡한 마법진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됐어요. 여기에 피를 떨어트리시면 돼요.”
서로의 피를 두 장의 계약서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종이 주변을 맴돌던 마력이 나와 그녀의 몸에 스며들었다.
“마력이 공증했으니, 계약을 준수한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걱정마라. 계약만 준수해 준다면 나도 네 안전을 보장해 줄 테니까.”
“개미님도 걱정 마세요. 계약 사항은 충분히 숙지했으니.”
계약을 마쳤으니, 사슬을 풀어 줬다.
“제 이름은 히나, 6서클 흑마법사로 남대륙에선 저만한 마법사를 구하기 힘들 거에요.”
제국이 있는 중앙 대륙.
제국의 남동쪽, 일곱 개의 왕국이 있는 곳을 남대륙이라 했다.
남대륙에서 중앙 대륙으로 넘어가려면 사막 왕국 아스만을 거쳐야 한다.
메디에게 히나를 맡긴 나는 한동안 그녀가 잘 적응하는지 지켜봤다.
히나는 흑마법사라 그런지 몬스터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적응이 빨랐고, 윤활제를 비롯한 다양한 약물 제조법을 공유해 주며 밥값을 톡톡히 했다.
“흑마력 없이 윤활제를 만들 수 있을까?”
“다른 마력을 반응시키려면 마법진을 새로 짜야 해요.”
“그럼 네 도움 없이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
“그건…….”
주춤하는 히나에게 계약서를 꺼내 보여 줬다.
“여기, 지식 공유 항목 아래 특약 조항.”
[을의 마법적 지식을 개미족이 활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지금 네 자세가 최선으로 보이진 않는데, 이런 경우 계약 위반이라 생각해도 될까?”
“잠깐만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을 뿐이에요.”
히나의 특기는 성장 촉진 마법과 생명 전이 마법이다.
성장 촉진 마법은 인간의 노화를 앞당겨 수명을 단축시키는 저주로 만들어졌으나, 히나는 식물이나 미생물의 성장을 촉진하여 다양한 약물을 만들어 냈다.
‘발효 식품에 쓰면 생산량을 늘릴 수 있겠어.’
토양에 유익한 미생물을 증식시키거나, 유산균 증식에 쓰일 수 있으며, 다루기에 따라선 바이러스의 증식을 가속할 수도 있다.
생명 전이 마법은 동식물의 생명력을 빼앗는 마법이었지만, 히나는 이를 활용해 강력한 식물을 키워 냈다.
히나의 마법이 더해지며 촉진제와 종자 개량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녀의 일은 연구만이 아니다.
마력에 민감한 아이들을 돌보며 마법도 가르쳐야 했고, 클라우드 왕국에서 활동하는 흑마법사에 관한 정보를 공유해 줘야 했다.
흑마법은 리스크가 큰 마법이어서 그녀는 원소계 마법을 가르쳤다.
가끔 정보를 감추려는 모습을 보이면 계약서를 꺼내 보여 줬다.
“여기 보이지? 정보와 지식 공유의 의무.”
그럴 때마다 히나는 피의 계약까지 써 가며 계약한 것을 후회했다.
내가 없을 때, 함께 일하던 메디가 히나에게 물었다.
“후회하는 거야?”
“아니…….”
히나는 쫓기는 삶보단 내게 굴려지는 삶이 더 낫다고 말했다.
“다크 님에게 일감을 늘려 달라고 부탁해 볼게.”
메디의 배려에 히나는 경악했다.
“지금도 하루에 4시간밖에 못 자고 있어.”
“이런… 심심했겠어. 내가 일을 더 받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마!”
“…….”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통하지 않는 둘.
통하진 않아도 메디와 히나의 시너지는 내가 놀랄 정도로 탁월했다.
* * *
다크가 흑탑의 정보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클라우드 왕국은 포카이 왕국과의 전쟁과 흑마법사 사냥으로 시끌벅적했다.
그러던 중 왕이 서거하며 마일도스 후작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7왕자파가 왕궁을 들이쳤다.
“뚫어!”
“막아!”
클라우드 왕국 최강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왕실 근위병과 왕실 친위대가 내성을 틀어막고 수성에 들어갔으나, 내부에서 배신자가 속출하며 문이 열렸다.
“내가 가겠다!”
지휘를 맡고 있던 가일론 백작이 나섰다.
“내 허락 없이 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는 가일론, 그가 철벽이 되어 내성의 문을 틀어막았다.
촤악!
일검일살.
그 어떤 존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가일론의 신위에 반란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초조해진 그들 사이에서 검은 로브의 노인, 흑마법사 히스가 나오더니 가일론에게 접근했다.
병사들이 물러나며 가일론과 대치하게 된 히스.
“마법사인가?”
마법사가 검사를 상대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전장의 모두가 히스의 자살 행각에 황당해했으나, 히스는 여유 가득한 표정으로 가일론을 도발했다.
“오시게. 한 수 가르쳐 주지.”
쾅!
땅을 박찬 가일론이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둘렀다.
강철도 반으로 가르는 검이 히스가 꺼낸 검에 막혔다.
“이상하군. 마법사가 아니었나?”
쾅! 쾅!
가일론과 히스의 격돌로 생겨난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고, 합을 나누던 가일론은 노인의 움직임이 검사의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마검인가?”
“호, 눈썰미가 좋군.”
히스는 가일론을 밀어붙이며 말했다.
“동남동녀 1,000명을 흡수시킨 파멸의 검이지! 윈드 커터!”
검을 막느라 정신없던 가일론을 향해 마법을 펼친 히스.
날카로운 바람에 발목이 날아가 휘청인 가일론은 히스의 검에 목이 떨어졌다.
가일론의 죽음이 알려지며, 내성이 뚫렸다.
“왕자와 공주를 모두 죽여라!”
왕궁이 7왕자파에 장악되며 수도에는 무장 병력이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개미교도들은 지하 기지로 대피해 몸을 사렸다.
왕세자가 제거됐다면 7왕자의 세상이 왔겠지만, 제논이 왕궁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처가인 벨레삭 백작령을 향해 말을 달렸다.
서부에서 야만족 학살로 명성을 날리던 가르탈 백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제논을 쫓았다.
“가르탈 백작! 왜 그대가!”
제논을 호위하던 상급 기사 필라이의 물음에 가르탈은 마상에서 검을 휘두르며 답했다.
“반역자 제논을 죽여라!”
이대론 가르탈 백작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필라이.
그는 호위대 절반을 이끌고 카르탈 백작과 일전을 치렀다.
마상에서 필라이와 호각을 겨루던 가르탈이 물었다.
“제국이 흔들리는 지금, 클라우드 왕국이 어찌 될 거라 보느냐?”
필라이가 입을 꾹 다물며 가르탈의 공격을 쳐 냈다.
“사방에서 왕국을 뜯어먹기 위해… 아니, 사방에 있는 왕국을 뜯어먹기 위한 전란의 시대가 도래할 거다! 클라우드 왕국에는 시간이 없다!”
“그래서 중립을 깨고 7왕자 편에 선 것이냐?”
“중립? 칠왕자 편? 난 예나 지금이나 왕국의 검이다!”
제논은 필라이의 희생으로 가르탈을 따돌렸지만, 또 다른 추적자가 따라붙자 남은 호위대 절반이 추적자를 막기 위해 말을 돌렸다.
“세자 저하, 보중하시옵소서.”
“살아남으셔서 부국강병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형처럼 따르던 친위대 기사들의 죽음을 외면한 제논은 말을 바꿔 가며 끝없이 달렸다.
“세자 저하!”
“벨레삭 백작인가…….”
제논이 벨레삭에게 구조됐을 무렵에는 중급 기사인 메르손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