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암살 (2)
내 일격을 맞고도 당당하게 드러내는 저 오만함.
놈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 디아의 일격을 피한 움직임과 내 공격을 막아 낸 걸 보아, 한두 합으로 끝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우리의 존재가 들킨 이상, 작전의 성공 여부는 시간 싸움이 됐다.
‘칠왕자가 도주하기 전에 처리해야 해!’
우리 중 한 명이 남아 놈을 막는 사이, 나머지 인원이 칠왕자를 처리하는 게 합리적.
디아와 암흑마창이 날뛸 수 있는 공간은 안 나오고, 타르와 나르본느는 정면 승부가 약하다.
‘적병을 뚫기 위해서라도 돌파력이 강한 디아는 보내야 해.’
나르본느의 탐색 능력과 타르의 기습 능력을 고려하면…….
‘내가 남아야겠군.’
일행을 먼저 보내기로 한 나는 창을 고쳐 잡았다.
“먼저 가! 여긴 내가 맡을게.”
“괜찮겠어? 저 녀석… 나만큼이나 빨랐어.”
나르본느가 걱정해 줬지만, 나는 일찍이 블레이더 킹인 크라스의 고속 참격을 겪어 봤다.
‘외골격과 급속 재생으로 버틸 수 있어.’
디아와 제논이 달려가며 말했다.
“방심하지 말고 버티기만 해라! 금방 끝내고 오겠다!”
“조심하십시오. 다크 님!”
“걱정이 과해.”
제국의 마스터가 그렇게 대단한가?
‘강해 봐야 인간인데…….’
인간이었기에 알고 있다.
인간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너무도 많다는 걸.
“한 놈만 보내 준다고 했을 텐데!”
놈이 땅을 박찼다.
“급하기는.”
나 또한 놈을 향해 돌진하며 창을 내찔렀다.
덩치는 놈이 컸지만, 힘은 내가 훨씬 강하다.
부딪히면 부서지는 쪽은 놈일 될 터였는데.
놈이 비릿하게 웃으며 검으로 창의 궤도를 틀었다.
‘어라?’
창끝이 목표를 놓친 순간 놈이 옆구리를 베며 지나갔다.
이대로 놈을 놓치면 등을 보인 일행이 위험해진다.
“나르본느!”
“알았어!”
후위에서 제논의 안전을 신경 쓰고 있던 나르본느가 거미줄을 잔뜩 뿌려 벽을 만들었다.
거미줄 벽은 쉽사리 찢겼지만, 그가 벽을 찢는 동안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제국창법 7식!’
창을 휘둘러 놈을 밀어붙였다.
놈은 나의 공격을 곧잘 흘리며 반격해 왔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그의 공격에 살점이 날아갔겠지만…….
카강!
나는 외골격으로 적절히 방어해 내며 시간을 끌었다.
일행이 멀어지자 놈이 거리를 벌렸다.
“셋이나 놓치다니…….”
분명 먼저 간 건 넷이었다.
“왜 셋이지?”
놈이 머리를 툭툭 치며 답했다.
“익스퍼트 수준은 기억할 가치가 없으니까.”
‘제논을 제외한 셋이었군.’
“그럼 놀아 보자, 개미족!”
팟! 캉!
우린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소극적으로 합을 나눠 봤다.
일종의 탐색전.
‘이 녀석…….’
속도만 빠른 줄 알았는데, 내 창법이 뚝뚝 끊어지는 게 무기술에서 놈이 나보다 앞서는 듯했다.
밀리는 건 나였으나, 놈이 굳은 얼굴로 물어 왔다.
“방어식을 이으며 공세를 만들어 내는 그 창술… 흑기사가 가르쳐 준 것이냐?”
대답해 줄 이유가 없어 창을 휘둘러 답을 대신했다.
캉! 차창! 캉!
“확실히 알겠어! 병사들이나 익히는 제국창법 칠식이구나!”
내 전력을 파악했다는 듯 놈의 공격이 점차 과감해졌고, 검에 푸른색 오러를 둘렀다.
‘공격이 날카로워졌어!’
외골격으로 받아 내긴 부담스러운 살상력.
그래도 급속 재생이 있어 버틸 순 있었다.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놈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시간을 끌려는 건가?’
말벌창이나 미스릴 창을 꺼내면 공허의 마강기로 놈의 오러를 깎아 낼 수 있지만, 밑천을 내보이는 건 결정적인 순간이어야 한다.
‘장기전은 환영하는 바야!’
하늘색 오러 블레이드와 암흑마창의 충돌로 지하 공간에 불꽃 스파크와 푸른 오러가 흩날렸다.
나는 재생력을 제어해 가며 함정을 팠다.
‘와라!’
놈에게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할 생각이었는데.
“빈틈이 많군. 칠식을 제대로 익히진 못한 건가?”
놈은 살을 내줄 생각이 없는지, 야금야금 나의 외골격을 부쉈다.
‘붙어 보니 알겠어.’
놈은 사내답지 못한 치졸한 새끼다.
심지어 전투 중에도 실실 쪼개며 말을 걸어 왔다.
“왕국 놈들은 너 같은 상위종을 사냥해 본 적이 없을 테니 모르겠지. 크크.”
제국의 기사들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뭐가 그리 우습지?”
“개미족의 힘은 위협적이다.”
놈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그 힘도 전력 상태를 5분 이상 지속할 수 없을 텐데.”
놈이 노리고 있던 개미족의 약점.
그건 개미기공으로 어느 정도 극복한 약점이었고, 애초에 난 특이 개체라 해당 사항이 없었다.
“5분이라, 날 너무 얕보는군.”
내가 공허의 마강기를 썼다면 놈은 속전속결을 택할 수밖에 없고, 내 창법이 힘을 못 쓰는 상황에서 놈이 전력을 다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크크, 그럼 이 몸이 직접 시험해 주마!”
“오만하구나!”
장기전을 원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
대결 양상은 계획대로 잘 풀렸다.
놈의 오러 발현으로부터 5분이 흘렀다.
“허… 헉…….”
깨진 외골격, 거친 숨소리로 놈에게 승리의 확신을 심어 줬다.
“이제 네 동료가 있는 곳으로 보내 주마!”
놈이 가속했다.
“괴로워 보이는군, 이제 끝내 주마!”
놈이 또 한 번 가속했다.
“날 상대로 이만큼 버틴 개미족은 네 녀석이 처음이다.”
놈은 1분마다 진부한 대사를 뱉으며 전력을 조금씩 끌어올렸고, 나는 그에 맞춰 재생 능력을 발휘해 회복 속도를 높였다.
시간이 흘러 놈의 오러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제야 놈도 뭔가 잘못됐음을 눈치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와 그의 상황이 차츰 바뀌었다.
방어구가 하나둘 깨져 나가며 피를 흘리기 시작한 제국의 마스터.
체력을 다했는지 숨을 몰아쉬게 됐고, 그동안 힘을 못 쓰던 내 창법이 놈의 검로를 끊어 내기 시작했다.
검로가 끊길 때마다 경악하던 그가 물었다.
“제국에서도 상급에 해당하는 가문의 검술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멍청한 질문.
아니, 당연한 질문인가?
격돌 초기, 놈은 내 창법을 아는 반면 난 그의 검술을 몰랐다.
그러니 무기술에서 밀리며 힘을 못 썼다.
하지만, 놈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이곳은 지하의 좁은 통로.
개미족의 더듬이 감각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공간.
인간인 놈은 개미족이 바라보는 세계를 모른다.
‘5분이면 충분했어.’
단 5분 만에 그의 검법이 익숙해졌고, 지금에 이르러선…….
‘움직임이 훤히 보이는군.’
이렇게 단순한 검법이…….
“정말 상급 검법이냐?”
“감히, 날 우롱하는 것이냐!”
그의 검법에선 오러를 다루는 화려한 기술들이 다수 보였지만, 내가 배운 기초 창법과 결이 같았다.
‘디아의 말이 맞았어.’
놈의 검법을 보곤 깨달았다.
내게 상급 무기술은 필요치 않다.
“으아아악!”
힘에서 앞서던 내가 무기술에서도 압도한 순간 게임은 끝났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놈이 마지막 힘을 짜내듯 맹공을 퍼부었다.
‘꽤 빠르군. 크라스보다 좀 더 빠른 수준인가?’
기술이 받쳐 주지 못한 검격은 창격에 막혀 목표를 잃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오러를 다 써버린 놈이 헉헉대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렇군. 네놈은 벽검을 익힌 것이야.”
“벽검?”
“시치미 떼지 마라! 하룬 님의 검법이 아니었다면 내가 개미족 따위에게 패할 리가 없다!”
놈이 뭔가 오해한 듯하여 이별 선물로 그의 패인을 알려 줬다.
“넌,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내 더듬이를 노렸어야 했어.”
오만했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 생각했다.
‘확인해 볼 생각도 않고 말이야.’
퍽!
놈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놈은 죽는 순간까지 의문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룬의 벽검이라… 유명한 검술인가 보네, 나중에 디아에게 물어봐야겠어.’
동료들도 암살을 마치고 돌아올 때라 생각했는데, 지상 쪽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마스터가 한 명 더 있는 건가?’
개미 지배로 위쪽 상황을 확인해 봤다.
나르본느와 제논은 병사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디아와 타르가 대전에서 칠왕자와 귀족들을 두고, 기사와 성직자 무리에 막힌 상황이었다.
‘뭐야? 밀리고 있잖아!’
나르본느는 제논을 지키느라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지만, 자칭 무적의 디아가 밀리다니…….
충격 에너지를 흡수해 강해지는 디아를 상대로 성직자들은 속박 마법과 흑마력을 태워 버리는 마법을 쏟아부었고, 각종 버프 마법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디아를 밀어내며 성직자와 칠왕자를 보호했다.
타르의 분신이 후위를 습격하려 했으나, 성직자의 화력에 녹아 버리는 상황.
이대론 별 성과 없이 디아가 레이드 당할 판이다.
승산이 없다고 느낀 타르가 도주로를 물색했지만, 몰려온 기사들에 의해 포위당했고, 성직자 수 명이 빛의 벽을 세워 퇴로를 막아 버렸다.
암살 실패로 동료들이 위기에 빠졌다.
‘이거 참…….’
계획 하나로 움직일 정도로 내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플랜A였던 암살 계획이 틀어졌지만, 내겐 플랜B 몰살과 플랜C 파멸이 있었다.
‘성직자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
동료들이 고전하는 이유는 성직자와 상성이 좋지 않기 때문.
내가 성직자만 쓸어 주면 내성의 병력으론 우릴 막을 수 없다.
‘플랜C까진 필요 없겠지.’
기척을 죽이고서 이동을 개시했다.
개미족의 손과 발에는 미세한 털이 있어 벽을 잘 탈 수 있다.
천장에 붙어 이동했고, 통로에 남은 병사에게 몰래 접근했다.
‘휴.’
어리숙한 병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전으로 본 피해를 복구하려면 막대한 인력이 필요해.’
불필요한 살생은 하나라도 줄이고자 최대한 힘을 빼고 창을 휘둘렀다.
퍽!
머리통이 박살 난 병사는 즉사했다.
‘좀 더 힘을 뺐어야 했어.’
그렇게 수십 명의 머리통을 부수곤 깨달았다.
육중한 암흑마창으론 두개골이 부서지지 않게 가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개미족이 돌아다니고 있다!”
“찾아!”
“저기다!”
흔적을 지워 가며 이동했지만, 결국 들키고 말았다.
“안타깝네.”
그들이 통로를 빠져나가 나에 대해 알리면 곤란해진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라.’
나는 그들의 퇴로를 막아 가며 한 명씩 척살했다.
비밀 통로를 피로 물들인 나는 통로를 빠져나와 왕궁에 잠입했다.
통로 입구를 지키던 자들.
“침ㅇ……!”
신속히 움직여 그들의 뒤를 점했고, 지원 요청을 하기도 전에 손날로 목덜미를 가격했다.
영화에서 보면 곧잘 기절시켰는데, 내가 하면 모두 목뼈가 부서지며 즉사를 면치 못했다.
‘영화처럼은 안 되는걸.’
나르본느 쪽은 아직 여유가 있어 보여, 디아와 타르부터 돕기로 했다.
‘이쪽이군.’
천장에 붙어 이동하며 가끔 지나가는 병사와 기사의 머리를 마창으로 가격했다.
* * *
태양신 헬리오스교의 무력 부대 중 하나인 이단심문대.
대원 하나하나가 신관급 신성력을 지녔고, 20인의 심문관을 이끄는 대장은 마스터급 기사에 버금가는 대신관급 성직자였다.
명목상 흑탑의 흔적을 찾아 왕국까지 오게 된 이단심문대 대장 케모.
실상 흑탑의 장로들과 손을 잡고 클라우드 왕국을 먹으려 했는데…….
무능한 왕국의 귀족들로 인해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흑탑 녀석들은 모두 죽은 건가? 이대론 내전이 장기화하겠군.”
왕국 점령에 실패한 케모는 씁쓸해했으나, 제국 입장에선 왕국의 약화는 잘된 일이었다.
이단심문대가 파견된 곳은 클라우드 왕국만이 아니다.
각 왕국에 파견되어 왕위 계승에 관여했다.
포카이 왕국 쪽은 쿠드라 후작에게 쓸리며 실패.
무역의 다슬리, 전사의 코르덴, 마법의 아카드, 자유의 골디아, 향락의 아스만…….
각국에서 이단심문대가 활약 중이었고, 성과가 제일 높은 심문대 대장에겐 교에 열두 자리뿐인 대신관 자리가 약속됐다.
헬리오스교의 대신관은 한 나라의 왕보다 대단한 존재로 여겨졌으니.
경쟁에서 밀린 케모였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반란이 진입되면… 왕국민을 쥐어짜서라도 성과를 내야 해!’
꺾이지 않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디아와 타르의 습격에 케모는 희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암흑신전의 사도라니! 그것도 둘이나!”
제국은 암흑신전의 사도를 신의 사도로 규정하고 있으나, 왕국에선 사도를 보호하는 정책이 없었다.
고로…….
죽여도 무죄.
“전하, 이것이야말로 헬리오스님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짐에게 암살자가 온 게 그렇게 기뻐?”
“그냥 암살자가 아닙니다!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는 악신의 수족들이죠! 저들을 죽이면 클라우드 왕조에 큰 축복이 있을 겁니다!”
“그럼, 깨끗이 처리해 봐!”
“걱정 마시옵소서. 저희 이단심문대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희열 가득한 케모가 기사들을 지원하며 흑기사 레이드를 시작했고, 소년은 그 모습을 공허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시간이 흘러 흑기사가 무릎을 꿇었고, 피투성이가 된 칠미묘가 거친 숨을 뱉으며 불안에 떨었다.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군요.”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던 케모가 의문성을 터트렸다.
“저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개미족이 천장에 매달린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