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메틴과 세르티아
동부 해안가를 관리하던 대영주 세야누스 백작.
그에겐 말썽꾸러기인 맏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세르티아.
“하… 부인을 닮아 모난 곳이 없었는데, 왜 이리 철이 없는 건지…….”
세르티아는 어릴 때부터 아레스교에 출퇴근 도장을 찍었고, 성전사들에게 뭘 주입받았는지 전사의 삶을 걷기로 선언했다.
“백병무투를 연습할 때부터 손발을 부러뜨려 둬야 했어!”
대영주들은 성년이 된 귀족 영애들을 위해 데뷔탕트를 열어 줬는데, 정작 세르티아는 데뷔탕트 날 가출하여 세야누스의 속을 썩였다.
“세르티아 아가씨께서…….”
“뭐라고!”
세르티아가 신분을 숨긴 채 용병 길드에 등록했다는 걸 알게 된 세야누스는 며칠간 밤잠을 설쳤다.
“평민 따위와 말을 섞는 것도 수치인데, 뭐가 아쉽다고 물려받을 것도 마땅치 않은 삼남 이하의 쓰레기들과 어울리는 것이냐. 세르티아…….”
격분한 그였지만, 귀족들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 고귀한 세야누스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기에 조심히 접근해야 했다.
아무리 쉬쉬거려도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귀족들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귀족 사회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며 세르티아의 혼삿길이 막혔다.
눈을 좀 낮춰 늙은 가신의 두, 세 번째 부인으로 보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안 돼! 내 딸을 헐값에 넘길 순 없다!”
세야누스는 여러 차례 딸을 데려오려 했으나, 그녀의 완강한 거부에 손발을 들고 말았다.
“백작님,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모두가 믿었다.
세르티아가 평민 놀이에 질리면 백작가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세르티아는 돌아오지 않았고, 가족들과 귀족 사회에서 잊히게 됐다.
왕이 서거하며 칠왕자파의 사람들이 세야누스를 포섭하려 했지만, 동부 해안 몬스터의 개체 수 관리만으로도 벅찼던 그는 중립을 선언했다.
대영주라 해도 중립을 걷는 건 쉽지 않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귀족 사회에서 고립되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중립 귀족이기에, 세야누스의 귀는 항상 열려 있었다.
“칠왕자파가 왕궁을 점령했습니다!”
“제논 세자가 왕궁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벨레삭 백작이 소영주인 비에타의 손에 당했습니다!”
“부쉬트니가 세자를 구했습니다.”
“바르퀴르 자작성에서 농성 중입니다!”
궁지에 몰린 제논 세자.
“끝났군. 언제 한 번 중앙에 인사하러 가야겠어.”
세야누스가 산하 귀족들에게 명해 칠왕자에게 바칠 공물을 준비할 무렵, 잊고 지내던 딸이 찾아왔다.
가족 중 그녀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나,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어!”
“내가 검을 뽑기 전에 빨리 꺼지는 게 좋을 거야.”
“100골드다. 이거 가지고 나가라. 네 아버지가 널 보면 심란할 거다.”
“저게 집 나간 언니야? 저 상처들 좀 봐, 완전 괴물이잖아!”
“언니 때문에… 우리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아! 우리가 언니 때문에!”
아버지를 만나기까지 가족들의 비난과 모욕을 감수해야 했던 세르티아.
수년 만에 딸을 본 세야누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을린 피부와 전신의 흉터, 그리고 저택에 들어와 생긴 것으로 보이는 옅은 타박상과 화상.
기사인 세야누스는 자신의 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저택에 들어와 자신을 만나러 오기까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많이 상했구나…….”
“백작님도… 늙으셨어요.”
긴말은 오가지 않았다.
세르티아는 세야누스에게 한 남자를 만나 달라고 청했고,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렇게 세야누스가 만나게 된 남자는 최근 동부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는 개미 용병단의 단장 메틴.
“날 만나고자 한 용병이 저 녀석이냐? 그래, 등급은?”
“단장님은…….”
세르티아를 향한 물음에 메틴이 직접 답했다.
“지금은 골드입니다.”
“골드? 미스릴도 아닌 골드라고!”
세야누스는 그를 삼류 이하의 정치꾼이라 평가했다.
“그래, 용건은?”
“개미 용병단이 동부의 용병을 규합할 수 있도록 허해 주십시오.”
“해안 토벌 임무라도 받고 싶은가? 곤란하군. 그 건은 이미 바다뱀 용병단에게 맡겼는데.”
“아닙니다. 저희는 세자 저하를 지원하려 합니다.”
“뭐라고? 지금 세자를 지원한다고?”
용건을 들은 세야누스는 격분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청탁을 넣기 위해 감히 내 딸을!”
세야누스의 검이 메틴의 눈앞에서 멈췄고,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메틴이 단순한 골드급 용병이 아님을 깨달았다.
“멈추지 않을 수도 있었다.”
“두 팔을 내줄 각오로 왔습니다.”
세르티아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본 세야누스는 딸의 체면을 생각하여 메틴에게 무리한 조건을 내밀었다.
“동부 해안의 몬스터를 깔끔히 소탕하면 네 요구를 들어주마.”
“용병단 전력을 동원해도 되겠습니까?”
“세르티아만 데려가지 않으면 된다.”
세야누스 백작가가 직접 나서도 3년은 걸릴 임무.
세르티아가 불가능하다며 임무를 바꿔 달라고 애원하려 하자, 메틴이 그녀를 저지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른 시일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딸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 주게.”
돌아오라는 세야누스와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세르티아.
부녀의 대화는 평행선을 이뤘고,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헤어졌다.
“세르티아, 기분이 좋아 보이네?”
메틴이 물음에 세르티아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단장, 아버지는 여전히 날 딸로 생각하나 봐.”
“당연한 거 아니야?”
“응.”
세야누스는 집무실에서 떠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시녀들은 세야누스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오래도록 지켜봐 온 집사는 다르게 생각했다.
“여인의 몸으로 익스퍼트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집사가 한 말에 세야누스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지만, 귀족가의 여식이 익스퍼트라니. 그것도 20대 중반에 익스퍼트 중급이지 않은가? 사내도 아닌 딸이 말이야.”
“그러십니까…….”
“그 메틴이란 사내, 조사를 좀 해 보게!”
“조사는 일찍이 끝내 뒀습니다. 보고서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세야누스는 여인의 몸으로 경지를 이룬 딸이 자랑스러웠고, 기생충처럼 옆에 붙어 있던 메틴이 신경 쓰였다.
두 달 후.
비가 쏟아지던 날, 피투성이의 용병 하나가 내성 입구에서 소리쳤다.
“세야누스 백작님!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한 마디를 뱉고 쓰러진 용병.
병사들이 그런 용병을 치우려 할 때, 뒤편에 있던 세르티아가 뛰쳐나와 병사들을 막아섰다.
“손대지 마라!”
백작의 철저한 입단속에 그녀를 알아보는 병사가 없었다.
“오러 소드다!”
“미스릴급 용병이야!”
“대기조에게 지원 요청해!”
병사들이 몰려와 병진을 이루더니, 세르티아를 향해 창을 겨눴다.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세야누스.
병사들이 열어 준 길 끝엔 수십 개의 창에 꽂혔음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여전사가 있었다.
“세르티아…….”
세야누스를 마주한 그녀는 애원하듯 소리를 쥐어짰다.
“단장은… 약속을 지켰어…….”
“그 사내가… 네 목숨만큼 소중했더냐?”
검을 떨군 세르티아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떨리는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며 세르티아의 입이 움직였다.
익스퍼트 최상급 경지였던 세야누스는 딸의 입 모양만으로 그녀가 하고자 한 말을 알아들었다.
‘목숨보다 더…….’
털썩.
세야누스는 딸과 메틴을 살리기 위해 영내의 성직자를 소집했다.
“죄송합니다. 저희의 신성 마법으론…….”
아레스교의 성전사들은 둘을 치료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성기사들은?”
“다들, 수도의 신전에 불려간 터라…….”
“고위 신관이 없단 말이냐. 그럼 포션은?”
“그것도 수도 쪽에서 긁어 간 바람에…….”
때마침 치료에 특화된 가이아교의 사제와 세레나교의 사제들이 왔다.
“흠…….”
그들은 메틴과 세르티아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 쪽은 미약하지만, 개미교의 신성력이 느껴지는군요.”
두 교단의 신관들은 메틴의 치료를 단칼에 거부했다.
“내 딸은? 내 딸은 살릴 수 있겠나?”
“아레스교의 성전사분들이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곤 있습니다만… 고위 신관이 없습니다.”
“지금, 내 딸을 치료할 수 없단 소리냐!”
“죄송합니다. 시기가 좋지 못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영내에 고위 성직자가 모두 빠져나간 상황.
세야누스가 허탈해하며 죽어 가는 딸을 바라볼 때, 병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개미교의 신관이 사제들을 이끌고 왔는데…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세야누스가 가이아교의 사제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개미교의 치유 능력은?”
그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보잘것없는 이단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그런가…….”
실망한 세야누스가 자포자기할 때, 가이아교와 세레나교의 사제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한 번 만나 보시지요.”
“저희가 모르는 치료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세르티아의 죽음으로 발생할 백작의 분노를 개미교에게 떠넘기려 했다.
개미교에는 여섯 신관이 있고, 모두 미인이었다.
“개미교의 신관, 비안느입니다.”
“세리카입니다.”
밝고 쾌활한 비안느와 차분하면서도 이지적인 세리카.
두 신관이 사제 스무 명을 데려왔고, 메틴과 세르티아의 치료를 맡고자 했다.
하지만 너무도 젊고 무게감이 없는 두 신관의 외모에 백작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어 선뜻 세르티아의 치료를 맡기지 못했다.
“믿어 주십시오, 백작님!”
“세르티아를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다른 방법이 없었던 세야누스는 메틴과 세르티아의 치료를 개미교에게 맡겼다.
이어진 치료에 당황한 건 백작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약물과 외과 수술이 동반한 개미교 특유의 치료 행위.
장내의 모두가 신성력이 쓰이지 않은 치료에 의문을 품었고, 이단이란 단어가 뇌리에 각인됐다.
“끝났습니다.”
“이게 정녕 치료란 말인가?”
치료를 마친 개미교의 신관과 사제들에게 주어진 건, 보상이 아닌 감금행이었다.
“하루에 여덟 번. 세르티아의 상태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럼 완벽히 회복시켜 보이겠습니다.”
“…허하겠다.”
백작은 마지 못해 비안느의 요구를 들어줬다.
시간이 흘러 메틴과 세르티아가 건강을 되찾았다.
백작은 약속대로 개미 용병단이 동부 용병을 규합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줬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백작님.”
“난 권한을 줬을 뿐이다.”
백작은 용병들이 용병 규합이 쉽지 않음을 말해 주며 세르티아와의 관계를 물었다.
“든든한 동료입니다.”
“그렇군. 아직… 동료란 말이군.”
딸이 짝사랑하고 있단 사실이 분한 세야누스.
그는 메틴에게 기사 작위를 줄 테니, 세르티아를 부인으로 맞이하라 했다.
“백작님… 제게도 꿈이 있습니다.”
“…….”
“용병왕이라고 아십니까?”
“제국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지.”
“네… 그리고, 세르티아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메틴은 백작에게 고개 숙여 부탁했다.
여타 귀족 영애와 다른, 전사인 딸을 인정해 주라고…….
백작은 눈치 없는 메틴이 답답했지만, 그런 메틴이 밉게만 보이지 않았다.
메틴과 세르티아가 저택을 떠난 직후.
“풀어 주자니 불안하고, 가둬 두자니 명분이 없단 말이지…….”
백작이 개미교에 대한 처우를 고민할 때, 가둬 둔 신관과 사제들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데리고 있어도 골칫거리였다. 모른 척하라.”
시간이 흘러 동부 일대의 용병들이 세자 지원을 위해 백작령으로 모여들었다.
개미 용병단 산하로 5천이 넘는 병력이 모이자 귀족들은 메틴의 수완에 경악했다.
“메틴 경, 자네에게 남작위를 주지!”
“메틴 경, 내게 혼기가 찬 여식이 있네만.”
동부의 귀족들이 메틴이란 뜨거운 감자를 두고 다툴 때, 마일도스 후작의 사망 소식을 접한 백작은 행동에 나섰다.
“메틴, 아직도 기사가 될 생각은 없는가?”
“죄송합니다. 백작님.”
“이상을 가졌다면 당당해지게.”
백작은 메틴에게 1만의 병력을 지원해 주며 세자를 돕기로 약조했고, 카밀 후작군과 가르탈 백작군이 세자군에 흡수될 무렵에는 직접 참전하여 세자를 돕기로 선포했다.
* * *
최근 전장을 거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암흑마창을 쓰면 마강기를 실을 수 없어.’
그렇다고 암흑마창 이상으로 나와 상성이 좋은 무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 전장에선 기교가 필요 없었다.
‘브록의 마석을 섭취해 얻은 공간 도약 능력은 써 보지도 못했어.’
비장의 한 수라 할 수 있어 평소에 드러내진 않으려 했지만, 막상 필요할 때면 긴박한 전투 상황이어서 능력을 발현하지 못했다.
‘숙련도가 떨어진단 말이지.’
전투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왕성의 수비군이 무너지길 기다렸는데…….
살아남은 귀족들이 볼모로 잡아 둔 제논의 여동생을 왕위에 앉히며 결사 항전에 들어갔다.
소식을 들은 지휘부는 당황했지만, 제논만큼은 기뻐했다.
“제인이 살아있었어. 제인…….”
“저하, 제인 공주님이 살아계심은 기쁜 일입니다만, 이대로 항복을 받아 내지 못하면 수성전을 치러야 합니다.”
당사자의 여동생을 암살해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쳤고, 격분한 제논은 회의를 파하게 됐다.
적들이 결사 항전을 결심한 이유.
그건 수비대가 5만인 반면, 이쪽 병력이 고작 3만이라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서인 듯했다.
“병력 규모에서 2만이나 차이나니, 만만하게 본단 말이지.”
별 대책 없이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중, 루리아가 서부와 북부에서 용병, 야만인, 오크들을 끌어모아 대군을 만들어 왔다.
그 수가 물경 3만.
거기다 동부의 세야누스 백작이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직접 이끌고 합류하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9만 대 5만.
거기다 이쪽에서는 이름난 명장이 수두룩했으니.
왕성에 백기가 치솟았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