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패왕 제논
‘백기다!’
수도 외성의 남문이 활짝 열렸다.
함정일지 모르니, 제논은 사신부터 보내 봤다.
돌아온 사신이 말하길 성벽을 장악한 귀족들이 비밀리에 수도를 빠져나가며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고 했다.
“남은 귀족들은?”
“선처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도주한 귀족들의 행성지는 카밀 후작령 너머에 있는 다슬리 왕국.
“망명이라니!”
비브라 자작은 왕국을 망친 주범들이 도주했다는 소식에 분노를 표출했으나, 그들이 도주해 준 덕분에 무혈입성이 가능해졌다.
‘다행이야.’
현실적으로 9만의 병력으론 5만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수도의 외성을 장악할 수 없다.
놈들이 결사 항전에 들어갔다면 장기전이 됐을 것이고, 보급이 먼저 끊기는 쪽이 패배한다.
보급 싸움의 말로…….
이기든 지든 왕국은 파산했을 텐데, 치킨 게임에서 백기를 든 귀족들의 현명한 선택 덕에 왕국 파산의 미래를 피했다.
가르탈군과 개미족 부대가 먼저 입성하여 성문을 장악했고, 병사들의 무장을 해체했다.
이어서 병사들을 순차적으로 들여 외성과 내성을 장악한 후 전장에서 활약한 장수와 병사 1만 정도를 추려 개선식을 진행했다.
내전의 종결, 그리고 클라우드 왕조의 정통을 이은 세자의 귀환.
문을 통과한 병사들은 대중의 환대를 기대했으나, 급조된 개선식의 현실은 달랐다.
관리되지 않은 대로에는 오물이 가득했고, 드문드문 아사자가 보였다.
인간들의 비쩍 마른 몸과 퀭한 눈빛.
식량은 빼앗기고, 노역에 시달린 듯한 모습.
이곳 수비군의 행패가 심했는지, 우릴 본 인간들은 두려움에 떨며 몸을 숨기기 바빴다.
단 수개월 만에 변해 버린 수도의 분위기에 병사들은 당황한 눈치였고, 제논은 이를 악물었다.
“세자의 개선식에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무지렁이들 같으니라고!”
“저하, 은혜도 모르는 저들을 벌할 기회를 주소서!”
“제게 시간을 주신다면 저하의 권위를 높여 보이겠나이다!”
평민들의 불순한 태도에 화를 내는 귀족들이 다수.
“조용! 지금은 왕성 복귀가 우선이다.”
제논의 눈빛을 보아, 그들은 모두 찍혔다.
‘눈치가 없으면 가만히라도 있을 것이지.’
수도에 남은 지휘관급 인사는 모두 잡아들여 감옥에 가뒀다.
‘쭉정이들만 잡혀 오는군.’
제논의 비위나 맞추며 정작 위험할 땐 도망칠 준비부터 하던 간신들은 수도의 귀족을 모두 죽이고, 그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되면 왕실 직할령에 혼란이 찾아올 터.
제논 또한 생각이 있는지, 칠왕자파에 가담한 귀족들과 병사들의 처우를 미뤘다.
“저하! 배신자인 쿠드라 후작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전쟁광 쿠드라 후작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왕궁의 대전.
귀족들은 쿠드라를 제거해야 내전이 끝난다며 제논에게 병권을 요구했다.
그 중심에는 가르탈이 있었는데.
“이대로 쿠드라 후작을 내버려 두면 북에서 힘을 키워 왕권에 위협이 될 겁니다.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 그를 제거하여 왕권을 바로 세우시옵소서.”
“왕권이라…….”
14만이란 대군이 모인 지금이야말로 왕국 제일의 무장 세력인 쿠드라 후작을 제거할 절호의 찬스.
“어린 시절부터 쿠드라를 봐 와서 안다. 그는 왕국이 품을 수 없는 야심가였지.”
제논이 장내를 둘러본다.
그의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고, 가르탈 백작과 세야누스 백작을 지나 함께 전장을 헤쳐 온 비브라, 부쉬트니, 유리 같은 자작들을 훑고서,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한 루리아, 메틴, 문트리아를 눈에 새겼다.
“고맙다.”
인사와 함께 제논의 눈빛이 변했다.
“더는 내전을 끌고 싶지 않다! 당장 최소한의 수비병을 남기고 병력을 해산시켜라!”
병력 해산이란 말에 귀족들이 화들짝 놀랐고, 이어진 명령에 당황했다.
“쿠드라 후작을 비롯한 클라우드 왕국 전 귀족을 불러라! 전 귀족이 모인 자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겠다!”
배신자인 쿠드라 후작을 품겠다는 제논.
그게 끝이 아니었다.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논공행상을 거행할 것이다! 쿠드라 후작, 가르탈 백작, 개미족의 다크를 일등 공신으로 삼아 그들에게 공작 위를 하사할 것이고, 공을 세운 기사들에겐 작위와 영토를 하사할 테니 그에 따른 준비를 해라!”
배신자인 쿠드라, 내전 중간에야 이쪽에 붙은 가르탈, 몬스터인 나까지…….
1등 공신의 면면이 우습게 됐다.
쾅!
흥분한 가르탈이 대전의 바닥을 내리쳤다.
“신 헤이머스 가르탈! 자격이 없으니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마스터인 가르탈의 기세는 장내를 찍어 눌렀다.
이는 반협박에 가까운 철회 요구.
“장차 귀족파의 우두머리가 될 쿠드라 후작에게 공작이라뇨!”
“개미족에겐 약속한 걸 내줘야겠으나, 1등 공신으로 삼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쉬트니와 비브라 자작이 가르탈을 지원했고, 유리와 내가 방관하고 있으니 제논은 정치적으로 고립됐다.
가르탈은 이에 힘입어 더욱 강력히 주장했다.
“마일도스 후작과 카밀 후작조차 두려워했던 쿠드라 후작입니다. 선왕께서도 어찌하지 못해 골머리를 썩던 위인입니다. 그를 살려 뒀다간 언젠가 또 한 번의 내전을 치러야 할 겁니다!”
장내의 귀족들이 핵심 귀족들의 눈에 들기 위해 쿠드라 후작을 제거해야 한다며 읍소했다.
시끄러워진 대전 속, 제논은 홀로 고요 속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가르탈을 응시했고, 나는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제논의 마력을 보곤 상당히 놀랐다.
‘마력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어…….’
마안에 비친 제논의 기운이 빛을 머금었을 무렵, 그의 시선이 좌중을 압도했다.
순간, 핏발을 세워 가며 쿠드라의 처단을 외치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대전에서 가르탈과 제논의 시선이 부딪히며 서로의 뜻을 관철하겠다는 의지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대로 눈싸움의 승패를 기다려 줘야 하나?
살짝 지루함을 느낄 때, 제논이 입을 열었다.
“내가 쿠드라 후작을 품지 못하면, 자네를 품을 수 있을까?”
차분하면서도 강렬한 어조.
가르탈을 향하던 제논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쿠드라 후작을 품지 못한 내가 개미족의 벗으로 남을 수 있을까?”
벗이란 말에 나는 살짝 미소 지어 주며 답했다.
“신하조차 품지 못한다면 우리의 벗이 될 자격이 없지.”
제논은 웃어 주곤 장내를 훑었고, 여타 신하들과 동떨어진 복장을 한 문트리아, 루리아, 메틴 등을 보곤 말했다.
“쿠드라 후작을 제거하고 나면 다음은 개미교의 세력을 경계해야겠지. 그리고 가르탈 백작, 네 가문의 힘과 개미족의 힘 또한 왕실의 위협이 되니…….”
잠시 뜸을 들이던 제논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두 세력이 공멸하도록 판을 짜야겠구나.”
‘어라?’
제논의 표정에 살짝 놀랐다.
백성을 아끼고, 신하를 아꼈던…….
순진했던 제논이, 왕좌에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폭군의 기질을 보인 것이다.
‘어려도 왕이란 건가?’
“대신들은 들어라.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지만, 과인은 클라우드 왕조의 정통, 선왕이 서거한 지금 왕의 대리인임을 명심하라!”
제논이 신하들에게 깝죽거리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뭐, 허수아비처럼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왕보단 맘에 드네.’
고리타분한 명분이나 따지는 위선자보다 유능한 폭군이 낫다.
유능하지 못하면?
그래도 상관없다.
유능한 서포터를 잔뜩 붙여 주면 되니까.
그리고 엘리트 직장인 출신의 나는 매우 유능한 서포터라 할 수 있다.
“저하! 쿠드라 후작은 내전에서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저하의 부름에 응할 것이라 봅니까!”
마지막까지 질척거리는 가르탈 백작의 물음에 제논은 확신이 담긴 어조로 답했다.
“당연하다. 그는 그런 사내다.”
“…….”
제논이 대신들을 철저히 누르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병사 해산과 수도 정비와 관련된 세부적인 논의가 이어졌고, 실익을 조금이라도 챙기려던 귀족들은 폭주하는 제논에 치여 가진 것마저 토해 내게 생겼다.
나 또한 건진 게 많지 않았지만, 1등 공신이란 위치와 공작이란 작위를 약속받은 건 매우 큰 수확이었다.
‘작위랑 땅만 받고 꺼져 주려 했는데… 논공행상까지 발이 묶였어.’
순간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후작 놈과 귀족들에게 나와의 관계를 과시할 생각이군.’
나도 모르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조금 당혹스럽지만,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여기서 할 일도 있고 말이야.’
개미족 부대와 개미교를 움직여 수도 정비를 도우며 시신을 처리해 줬고, 인간들을 돕게 하여 개미족과 개미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줬다.
이 정도로 개미족에 대한 경계심을 지울 순 없었지만, 개미교의 포교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이 정도면 됐어.’
왕국이 내 입맛에 맞는 요리가 되기까지, 시간과 자금을 충분히 쏟아부을 생각이다.
* * *
“후작님, 제논 저하께서 부르십니다.”
포카이 왕국의 잔여 귀족을 소탕하던 쿠드라 후작은 왕성을 되찾은 제논의 행보에 폭소를 터트렸다.
“나를 품고자 하다니! 재밌구나!”
쿠드라 후작은 최전선에서 전투 중인 핵심 가신들을 불러 모았다.
수일 후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길에 나선 쿠드라 후작.
“가자!”
두 기사가 후작의 오른편에서 말을 몰았다.
둘은 포카이 왕국과의 전쟁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 마스터급 기사들이었다.
“세자가 왜 부른답니까? 한 판 붙자는 겁니까?”
“후작님 없이 대관식을 치른다는 건,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안 부를 수가 없었던 거지.”
거구의 마스터를 가르치는 듯한 비쩍 마른 마스터.
두 마스터는 후작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마스터들이었다.
후작의 왼편에는 마법 병단을 운영하는 대마법사급 마법사와 신성 부대를 운영하는 대신관급 신관이 말을 몰았다.
“세자가 어떤 분인지 매우 궁금하구먼.”
“여신 디오나 님께선 세자 옆에 붙어 있는 개미교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악신을 신봉하는 자들끼리 친하게 지내겠구먼.”
늙은 마법사의 농에 빡빡이 신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악의 길로 들어선 건 사냥의 신 루나 님이시지, 디오나 님이 아닐세! 지금 자넨 중립의 공명정대한 징벌자인 디오나 님을 모욕한 것이야!”
“공명정대한 암살의 신이라…….”
빡빡이 신관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네 이놈!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이 다하는 걸 기다려 주고 있었거늘, 당장 심판을 원하는 것이냐?”
“마탑의 징벌조차 날 비껴갔거늘… 신의 심판이라고 두려울까? 어디 해볼 수 있으면 해보시게! 신이 누구의 편을 들어 줄지 본좌도 궁금하구먼!”
“사이가 좋은 건 보기 좋으나, 내가 있을 때만큼은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군.”
쿠드라 후작의 말에 똥 씹은 표정이 된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뇌까렸다.
“요즘 내 눈이 침침해서 그러니, 전장에서 마법에 휩쓸리더라도 이해해 주게. 노헤어 자칼.”
“파이자르 폰 힐손, 디오나교의 신관은 축복만큼이나 저주에 능하다는 걸 기억해 둬야 할 거야.”
왕국 하나를 초토화한 쿠드라 후작군의 장수들과 전쟁광이라 불린 쿠드라 후작이 귀환길에 올랐다.
* * *
둥지에서 열일 중인 흑탑의 2장로 히나.
최근 그녀는 흑탑의 장로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러게 적당히 빠지라니까…….”
개미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넘겼음에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은 두 장로의 죽음.
다른 장로들은 두 장로의 죽음을 히나의 계획으로 봤고, 죽은 3장로와 8장로의 후임들은 히나가 자신들의 연구 자료를 노리고 있는 줄 알곤, 장로 회의 때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해 왔다.
“이걸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그녀에겐 고민할 틈이 없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흑마법사 양성과 식물 개량에… 둥지의 환경 강화. 거기다 개미족이 쓸 수 있는 마법 개발까지. 앗, 조금 어지러운데.”
마력수가 듬뿍 들어간 최상급 포션 한 병으로 체력을 보충한 히나는 해야 할 일을 위해 장소를 이동하던 중 두어 번 휘청거리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지나가던 빅 워커들이 히나를 둘러쌌다.
[인간 마법사.]
[길에서 잔다.]
[길막 노노 치우자!]
[숨을 안 쉬는데?]
[식량 창고로 옮기자!]
식량 창고로 옮겨지던 중, 히나를 알아본 상위종이 그녀를 치료실로 데려갔고, 의료 개미들이 붙어 심폐 소생술로 그녀를 살렸다.
“도저히 안 되겠어. 이놈들에게 부려지다간…….”
죽었다 깨어난 히나는 이대로 개미들에게 부려지다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움을 깨달았다.
“조율이… 일정 조율이 필요해!”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