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지배적 상생
회의 끝에 외성 수비군 2만을 남기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해산시키기로 했다.
‘곧 추수 시기기도 하니, 나쁘지 않은 판단이야.’
아무런 계획 없이 12만 병력을 해산시키면 내전 이상의 혼란을 초래할 테니, 그에 따른 계획이 필요하다.
새롭게 합류한 행정 관료 중 뛰어난 자들이 많아, 굳이 내가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부대를 쪼개 각지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라.”
소규모 부대를 각지에 보내 산적 토벌과 추수 지원 같은 일을 수행하게 한 후, 일부 병사를 지방군으로 이적시키고 나머지는 퇴직금과 함께 퇴임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귀족들 간에 서로 양질의 병사를 빼가기 위해 합의가 오갔고, 최종 결재자인 제논은 서류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제논은 가끔 나와 함께 평민들의 거주지를 둘러보며 개미족과의 우호 관계를 과시했다.
“왕실 창고는 쥐들이 득실거리는데… 저들은 한 줌의 곡물이 없어 죽어 가는군요.”
사적인 자리에선 내게 말을 높이는 제논이었고, 나는 그런 제논을 편하게 대해 줬다.
“여긴 그래도 나은 편이야. 빈민가는 훨씬 참혹해.”
“그렇군요.”
제논은 전쟁 물자로 축적해 둔 식량 일부를 풀어 평민들에게 나눠 주고자 했다.
“힘들게 모은 전쟁 물자이지 않습니까?”
“다슬리 왕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을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시는 게…….”
쿠드라 후작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될지, 이웃 왕국들의 불온한 움직임, 심지어는 각지에 출몰하는 산적들까지…….
귀족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가며 창고 개방을 반대했다.
‘거짓의 마력이 넘쳐나는군.’
실상 귀족들도 식량이 부족하여 왕실의 물자를 뜯어내려 했다.
“테헤라를 이대로 두면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질 게 자명하다.”
“쥐들이 먹어 치울 곡물이다. 그냥 나눠 주는 게 나아.”
“신 유리 바르퀴르, 가르탈 백작과 비브라 자작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충신 가르탈, 비브라, 유리 등이 나서서 간신들의 야욕을 꺾어 줬고, 나 또한 한마디 거들어 줬다.
“나눠 주는 건 개미족과 개미교도에게 맡겨 주십시오!”
“고맙네, 다크.”
제논을 지원하는 척 개미족의 평판작에 들어갔다.
개미족은 거리를 정비하며 대량의 시체를 확보할 수 있었고, 전쟁 고아, 버려진 노예, 경제 활동을 해 왔던 가장이 사라지며 떠도는 여인과 부상으로 밥벌이가 힘들어진 남자 등등… 궁지에 몰린 인간 다수를 확보했다.
개미교도 육성에는 상당량의 물적 자원과 교육 개미가 필요하다.
“세크리, 둥지 상황을 확인해 줘.”
세크리가 부하를 보내 둥지 상황을 확인했다.
최근 묘인족과 라미아가 쥐의 문제를 해결해 주며 개미족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아직 쥐들이 곳곳에 숨어 있긴 하지만, 묘족과 뱀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어요.”
쥐와의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이걸로 쇠퇴하던 둥지가 다시금 발전 궤도에 들어섰다.
“여왕들의 산란량은?”
“모두 양호해요!”
내전에서 얻은 대량의 영양원으로 여왕들의 산란량이 폭증했고, 흑마법사 히나가 둥지 환경 개선에 마법적 지식을 보태며 개미족의 성장이 한층 더 가속됐다.
“3차 진화종이 늘고 있고, 페르 님과 케어 님도 나날이 강해지고 있어요.”
몬스터인 개미족에게 인육은 성장을 촉진해 주는 영약과 같은 작용을 했고, 맛도 상당히 괜찮았다.
중독성이 없지 않아 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고, 마력수를 희석한 상급 영양으로 대체할 수 있어 의존도는 높지 않았다.
“다른 변화는 없었어?”
“주 영양이 바뀌어서 그런지, 저희 같은 개미가 부쩍 늘었어요.”
“인간형이 늘었다는 말이야?”
“네.”
과거 인간형 개미의 급증은 개미족에게 있어 골칫거리였다.
인간형 개미의 작업 능력과 전투력이 개미형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도구와 기술, 그리고 개미기공의 보급으로 인간형 개미들의 작업 능력과 전투력이 개선된 현재, 개미족 사회는 인간형 개미의 증가를 걱정하지 않게 됐다.
“덕분에 인간 교육에 동원할 개미가 풍족하다 못해 남아돌 정도예요.”
“잘됐네.”
고효율의 생산 시설이 원활히 작동되며 둥지에는 잉여 물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그중 손쉽게 생산할 수 있는 채소 계열은 넘치다 못해 썩어 날 정도였다.
전생을 떠올려 보면 인류의 발전은 자연의 파괴로 이어졌고, 대량의 쓰레기를 만들어 냈다.
나는 개미족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끔 신경 써 왔다.
“재활 시스템은?”
개미족에겐 쓰레기란 없고, 수질과 대기 오염에 대한 대처도 완벽했다.
“네. 지금은 잘 돌아가지만, 조만간 재활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요.”
버려지는 채소와 잡초들은 버섯 농장에 뿌려지거나 지렁이 밥으로 주어졌고, 지렁이는 토양 개선에 쓰이거나 개미족의 식량원이 되었다.
“다크 님이 말씀해 주신 향신료들도 생산되어 창고에 쌓이고 있어요.”
버섯과 곡물의 생산량도 상당하여, 식량 사정이 좋지 못한 고블린, 오크, 트롤 등을 지원했다.
“그들에겐 노동력과 몬스터 부산물을 받고 있어요.”
히나의 도움으로 옥수수와 흡사한 식물도 확보하여 가축 사료의 원료로 썼다.
종자 개량과 지하 재배법의 연구가 거듭되며 개미족의 생산 효율은 특이점을 넘어선 상태.
쥐에게 피해만 보지 않았어도 더 큰 발전을 이루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확장 공사는 계속 진행 중이고, 남는 땅엔 나무를 심어 과일과 목재 생산량을 늘리고 있어요.
지하 산림이 늘어남에 따라 꿀벌족도 늘었다.
보고 중 세크리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즘 개미들이 하급 꿀을 버리면서 꿀로 채워진 호수가 곳곳에…….”
둥지에서 늘어난 꿀벌족이 숲 전체로 퍼져 나가는 중이었고, 현재 개미족의 영향권에 있는 숲에선 꿀벌족이 넘쳐 나며 숲의 조경사가 되어 줬다.
“세크리, 꿀벌족 말고 다른 종족들의 상태는 어떻지?”
“음, 그러니까…….”
숲 곳곳에 고블린의 숙식 해결을 위한 던전을 만들어 제공했다.
오크가 강력한 무력으로 지상에서 침략자를 상대한다면, 고블린은 지하 공사와 채광에 투입됐다.
게으른 고블린은 후손을 남길 수 없다.
천성이 게을렀던 고블린이 대를 거칠수록 부지런해졌고, 똑똑해졌다.
‘홉 고블린도 많이 늘었어.’
고블린 던전이 늘어나며 간혹 데카이저와 키카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고블린 던전이 생겨났다.
그러한 던전은 마석과 고기 생산을 위한 고블린 양식장이 됐다.
최근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갑각충들은 개미족과 꿀벌족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하늘의 경비원이 되어 줬다.
갑각충이 늘수록 해마다 키워야 할 거대 굼벵이가 늘었다.
개미족은 우량한 암컷과 극소수의 수컷만을 성체로 키웠고, 그로 인해 갑각충이란 종족 자체의 피지컬이 상승하고 있었다.
“울트라 육성에 갑각충 영양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냈어요.”
갑각충이 강해질수록 개미족이 얻게 될 거대 굼벵이 영양의 품질이 상승하며 그들이 남길 부산물의 품질도 좋아진다.
네우라 킹인 네론과 블레이더 킹인 크라스는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다.
크라스는 겨울이 오기까지 버드나무 숲의 남쪽 경계선에서 침입해 오는 리자드맨을 상대로 수련을 쌓았고, 네론은 작업에 투입된 개미족 정찰병들을 대신하여 숲에 이변이 없는지 순찰해 줬다.
세크리가 왕급과 준왕급 몬스터에 대한 보고서를 펼쳤다.
“네론 님이 전해 준 정보에 의하면…….”
나방왕 버플은 버드나무 숲 동쪽 구역에서 살고 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자신의 구역 밖으로 나오지 않아 부딪힐 일이 없다.
말벌왕 키르는 말벌족 격리 구역에 들어가 칩거 중이다.
‘키르와는 약속한 게 있었지.’
패배한 쪽이 승자의 부하가 되기로 했으나, 놈은 도통 도전해 오질 않아 내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생각보다 신중한 녀석이야.’
바퀴왕 크로치는 버드나무 호수 인근에서 발견됐다.
이놈은 세력을 일구지 못한 겁쟁이였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트롤 킹도 잘살고 있고…….’
오거 숲 한편에 지내게 된 트롤 킹.
그로 인해 트롤의 개체 수가 증가하고 있다.
트롤과 오크가 늘면 미노타우로스와 개미족 사이엔 두꺼운 방파제가 형성된다.
‘나쁘지 않아.’
둥지 상황이 나쁘지 않으니, 이번 기회에 좀 더 많은 인간을 개미족의 영향력 아래에 두면 좋을 듯했다.
확장 공사의 책임자는 3장로인 언더리페다.
세크리를 둥지로 보내 왕국 전체를 아우르는 지하 고속도로를 요청했고, 수도 지하에 대규모 생산 시설을 갖추게 했다.
개미족이 본격적으로 잉여 물자를 풀기 시작하면 많은 인간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사회의 절반을 차지한 농민들이 할 일을 잃게 된다.
마치 스마트폰이 발명되며 기존 휴대폰 시장이 붕괴된 것 같은 창조적 파괴.
땅을 빼앗기고 막대한 빚에 허우적거릴 농민들은 하층민이 되거나 노예가 되어 왕국의 밥이나 축내는 골칫거리가 될 터.
‘자신들을 망하게 한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지.’
원망할 놈들은 내버려 두고, 원하는 이들에 한해서 일자리를 제공해 줄 생각이다.
“문트리아, 마시장과 축산업은 어떻게 됐어?”
“땅은 충분히 확보했고, 엔지 님과 디그파 님의 도움으로 시설도 갖췄습니다.”
사료, 토지, 시설은 개미족이 제공하고 인간을 고용해 운영하는 구조였다.
“규모를 계속 키워. 앞으로 모든 인간이 끼니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
“꼭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내가 그린 종족 간의 상생 구조는 철저한 분업과 협력으로 윈윈 구조를 만들고, 핵심 기술과 자금줄을 틀어쥔 개미족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는 것.
‘이걸로 인간들의 일자리 문제는 해결했고…….’
왕국 상황이 순조롭기만 한 건 아니다.
“죄송합니다, 다크 님. 노예 시장 장악에 실패했어요.”
도살자 마르코와 전귀 웨인을 대동한 프릴이 날 찾아와 사죄했다.
“암흑가와 함께 노예 시장도 장악한 거 아니었어?”
“그게… 쿠드라 후작이 포카이 왕국민을…….”
시장에서 독점적 위치에 서기 위해서라도 쿠드라 후작의 노예 유통을 막아야 했는데, 프릴이 날 찾아온 건 시장 독점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눈물을 잔뜩 머금은 프릴이 내게 말했다.
“노예 값이 폭락했어요.”
노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건 노예의 취급이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며, 많은 노예가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저로서는 쿠드라 후작을 막을 수가…….”
어쩌다 암흑가 수장이 된 프릴.
내겐 사회 초년생 같은 여린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이제 내전도 끝났으니, 돈이 돌기 시작할 거야.”
쿠드라 후작 문제는 나와 문트리아가 나서서 해결해 주기로 했고, 한동안 쿠드라 후작이 푸는 물량은 우리가 전량 매수하여 노예 값의 폭락을 막기로 했다.
노예를 잔뜩 품게 될 테니, 그들의 상품성을 끌어올릴 대안을 제시했다.
“비앙카와 협력해서 노예를 위한 교육기관을 만들어.”
전국에 고아원을 늘려 가고 있는 비앙카.
그녀에겐 앞으로 다양한 교육기관을 만들게 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흘러 농민들이 추수를 끝냈고, 제논의 대관식을 위해 각지의 귀족들과 상인이 몰려오며 수도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
쿠드라 후작 또한 대량의 전쟁 노예를 데리고서 수도로 오는 중이었고, 포카이 왕국, 다슬리 왕국, 아스만 왕국 쪽에서도 사신을 보내왔다.
그만큼 클라우드 왕국의 차기 왕인 제논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었는데…….
나와 제논이 협력하여 겨우 안정시킨 물가를 높이려는 세력이 나타났다.
아니, 모든 귀족과 상인이 쿠드라 후작과 거래를 위해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중이었고, 이로 인해 겨우 안정시킨 물가가 폭등하려는 조짐이 보인 것이다.
“다크 님, 이젠 평민들마저 사재기에 동참하고 있어요.”
전쟁광 쿠드라 후작의 존재로 전 국민이 전쟁 물자를 투자 상품으로 보게 된 상황.
마일도스 후작, 카밀 후작, 다나스 백작, 벨레삭 백작이 죽고, 남은 대영주는 쿠드라 후작, 가르탈 백작, 세야누스 백작뿐.
남부 영주들과 이들에겐 경고할 필요성이 느껴져서, 사신들을 위한 왕실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