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개선식
여왕이 진화하면 상위종들은 달라진 여왕의 페로몬 각인을 위해 인사하러 간다.
‘시간이 애매하단 말이지.’
수도에서 둥지까지 지하 고속도로가 뚫려 있다지만, 베슬리를 타고 오가도 20일은 넘게 걸린다.
‘후작의 개선식엔 참석해야 하는데 말이야.’
[페르님, 둥지에 무슨 일이 있나요?]
내가 꼭 필요한 일이 없다면 인사는 미룰 생각이었다.
[그야…….]
진화해서 그런지 목소리에 여유가 한껏 묻어났지만, 맡투는 여전히 까칠한 페르.
[꼭 일이 있어야 널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나는 페르에게 이곳 상황을 설명해 주며 갈 수 없다고 말해줬다.
[너… 너! 정말 안 올 거야?]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화를 내는 그녀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묻어났다.
[당장 와! 인사하러 오라고! 여왕 명령이다!]
여왕과 장로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다.
평소 일개미와 장로들이 여왕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긴 하지만, 여왕의 명령에는 장로 회의 같은 강제력이 없다.
[죄송해요. 지금 가면 그동안 해 왔던 일이 수포가 돼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줘요.]
초장거리 염화는 마력 소모가 크다.
나야 괜찮지만, 갓 진화한 페르의 마력으론 오래도록 유지할 수 없다.
[정말 못 오는 거야?]
[네.]
페르가 실망하며 물었다.
[하… 알겠어. 그럼 언제 돌아올 건데?]
[날이 추워지기 전에는 끝내고 갈게요.]
[역시, 케어 말이 맞았어…….]
[네?]
진화한 건 페르만이 아니다.
케어도 4차 진화종이 됐지만, 그녀는 내가 바쁠 거란 걸 예상하여 염화를 보내지 않았다.
[됐어! 넌 일이나 하고 있어. 나머지는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염화가 끊겼다.
‘개미족답지 않게 감정적인 페르랑 대화하는 건 피곤하단 말이지.’
여왕들이 어째서 지금 이 시기에 진화했는지 생각해 보던 중, 페르가 다시금 대화를 걸었다.
[아 맞다. 전해 주는 걸 깜박했어. 케어가 대표 개미만 보내래.]
내가 바쁘다는 걸 예상한 케어는 나와 밀접한 개미를 통해 간접 인사를 받기로 한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을 전해 줬어야지.’
난 이곳 개미들의 대표로 세크리를 보내기로 했다.
세크리가 떠나기 전 나를 비롯한 부하들과 찐한 더듬이 인사를 나눠 여왕과 간접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고, 두 여왕의 진화 원인을 알아 오도록 했다.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세크리를 보낸 나는 쿠드라 후작의 개선식, 제논의 대관식, 그리고 논공행상을 고대하며 정적인 수련으로 시간을 보냈고, 수면 아래에선 문트리아, 루리아, 메틴, 프릴, 메르디아… 등의 개미교 교도들이 활발히 움직였다.
* * *
파티에서 의미심장한 충고를 들은 귀족들.
그들은 각각 돌아가 부하의 보고를 받았다.
“개미 상단이 아스만 쪽 상인들에게 물자를 넘기기로 했습니다.”
“뭐? 우리보곤 사들이지 말라면서 상인들에게 넘겼다고!”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은 가르탈이 격분했다.
“당장 부하들을 소집해라. 남은 물자라도 확보해야 해!”
“다른 귀족들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시세로는 살 수 없을 겁니다.”
“큭, 개미 년이!”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가르탈은 상인들을 만나 봐야겠다며 자리에 박차고 일어났다.
“가자, 리카르텐!”
가르탈의 옆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리카르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작님, 이상합니다.”
“뭐가 말인가?”
“그녀가 말했었죠. 개미족이 축적한 물량을 풀어 폭등한 물가를 안정시킬 거라고…….”
“그 말을 지킬 생각이었다면 상인 놈들에게 물자를 넘기지 않았겠지!”
리카르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백작님… 그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숲의 부족 중에는 인간의 존엄을 버리곤 몬스터의 가축이 되길 자처한 곳들이 많습니다.”
“알고 있다.”
“백작님은 모릅니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리카르텐이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가르탈을 응시했다.
두 사내의 시선이 교차하며, 가르탈은 리카르텐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치솟는 분노를 마주하게 됐다.
리카르텐은 숲에 버려진 왕국의 여인이 낳은 자식이었고, 생모는 그의 눈앞에서 산 제물로 바쳐져 부족을 수호하던 미노타우로스에게 먹혔다.
어미를 잃은 그는 가르탈에게 구해지기까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함께 산 제물로 키워졌던 것이다.
리카르텐의 과거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가르탈은 자신이 경솔했음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가르탈을 진정시킨 리카르텐은 자신의 감정을 내면 깊숙이 감추며 말을 이었다.
“다크 정도의 상위종은 숲에서 왕이라 불리는 지배자, 인간을 하등한 존재로 보기에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파티장의 충고는…….”
“들으셔야 합니다.”
“개미족이 비축한 물자가 상인들에게 넘긴 물자 이상으로 많다는 건가?”
“광물이야 넘치겠지만, 개미족에겐 식량이 없을 겁니다.”
“그럼?”
왕국민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숲의 주민들은 몬스터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대형 몬스터 중 농사를 지으며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생산량을 보이는 종족이 있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는데.
“미노타우로스와 키클롭스, 둘 중 한 종족이 개미족을 지원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개미족의 뒤엔…….”
“놈들이 있을 테죠.”
사태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고 느낀 가르탈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제논 저하께선 영토와 공작 위를 약속하셨다고 들었다.”
“바쳐진 땅의 주민들은 모두 제물일 겁니다.”
리카르텐에 의해 가르탈은 뭔가 큰 오해를 하게 됐으나, 다크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세야누스 쪽은 물자가 부족하진 않았으나, 이번 기회에 한탕 크게 벌어 보려 했다.
“이런 일로 기사들을 움직이기 뭐하니, 메틴 자네가 맡아 줄 수 있겠나? 이번 일을 잘 처리해 주면 그대에게 명예 기사직을 수여해 주마.”
세야누스는 문트리아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메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실상 사위로 점찍은 그의 입지를 다져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자신 있게 답한 메틴에게 세야누스는 일개 용병이 만질 수 없는 대금을 맡겼다.
이 소식이 동부 귀족들에게 전해지며 눈치 빠른 자들은 세야누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백작님께서 메틴의 뒷배가 되어 주려는 거군.”
“백작님이 개입했으니, 우리가 나서도 뭐라 할 귀족은 없겠지.”
동부의 귀족들 사이에서 메틴 코인이 부상했다.
돈은 돈대로 받으면서 물자 매입에 나서지 않는 메틴.
그런 메틴을 지켜보던 세르티아가 폭발했다.
“실망이야 대장.”
“뭐가?”
“난 대장이 진지하게 용병왕을 꿈꾸는 사람이라 생각했어.”
금화가 가득 담긴 상자를 신경질적으로 발로 찬 세르티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매입에 나설 생각은 없다.”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동료들을 희생시킬 작정이야?”
“때가 되면 귀족들에게 돌려줄 거야.”
“귀족들이 그걸 받고 만족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대장.”
메틴에게 다가간 세르티아가 단원임을 증명하던 개미 패를 거칠게 내려 뒀다.
“난 동료들의 안전을 우선하겠어. 예전의 대장처럼…….”
세르티아가 돌아서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충고할 게, 귀족을 우습게 보지 마.”
메틴은 떠나가는 그녀에게 외쳤다.
“용병단의 이름을 바꿀 거야.”
“이젠 나랑 관계없어.”
“조직 개편도 있을 거다.”
메틴이 개미 목걸이를 던졌고, 세르티아는 그걸 받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왜?”
“이건 한정판이니 잃어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어. 널 지켜 줄 거다.”
세르티아는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듯한 대장을 돌아보며 한숨을 푹 쉬었고, 실소를 머금고선 말했다.
“고마웠어, 대장. 그런데 디자인이 구려…….”
메틴의 곁을 떠난 건 세르티아만이 아니었다.
“대장, 이대론 동부의 귀족과 척을 지게 될 거야.”
“미안, 난 죽고 싶지 않아.”
“돈도 좋지만, 목숨이 더 귀해.”
“예전의 대장이었다면, 이깟 돈에 동료의 목숨을 내걸진 않았을 거야.”
그의 이상에 따르던 많은 용병이 떠나가며 개미 용병단이 쪼개졌다.
메틴의 곁엔 개미교에 소속된 용병과 돈에 눈이 먼 용병들이 남게 됐다.
다크의 지시로 용병단에서 독립한 루리아는 오크들을 숲으로 돌려보냈고, 야만인을 휘하에 들이며 가끔 메틴을 찾았다.
“동부 일은 잘 처리된 것 같네.”
“운이 좋았어. 야만인들은 어때?”
“다들 출신 부족이 달라서 쉽지 않아.”
교에서의 신분은 루리아가 높았지만, 둘은 함께 사선을 넘어온 동료라 사석에선 친구와 다름없었다.
“하소연하러 온 거야?”
“그것도 있지만, 교육 인원이 부족해.”
이야기꽃을 피우며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걸 얻어 냈다.
시간이 흘러 쿠드라 후작군이 수도에 들어서며 개선식이 치러졌다.
* * *
쿠드라 후작의 개선식은 제논의 개선식과 달리 성대하게 치러졌다.
예식용 장비로 무장한 쿠드라 후작군은 동전을 뿌리며 행진했고, 수도의 주민들은 그들을 환영하며 꽃을 뿌려 줬다.
행렬 중간중간에는 포카이 왕국에서 약탈해 온 금은보화와 아름다운 노예들이 있었고, 병사들은 이를 전시하듯 사람들에게 보였다.
‘많이도 잡아 왔네.’
많은 귀족이 신분을 숨긴 채 인파 속에서 쿠드라 후작군의 역량을 살폈다.
“가르탈군과 비견되는 정병이군요.”
“제국에서나 운영할 법한 마법병대라니.”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힐러 부대도 있어요.”
나 또한 기척을 숨기고서 그들의 행진을 지켜봤고, 포카이 왕국과의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실력자들을 볼 수 있었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두른 쿠드라.
2미터가 훌쩍 넘어 말에 탈 수조차 없는 거인 스톤.
퀭한 눈과 비쩍 마른 몸을 한 흑발의 사내 에이지.
그 외에도 대머리 신관과 노인 마법사가 나름 유명했는데, 그들도 강자의 마력을 포착했는지 인파 속에 숨어 있던 가르탈, 리카르텐, 디아 등을 찾아내 시선을 교환했다.
나와 나르본느는 골목 깊숙한 곳에 은신한 채 지켜봤기에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외관상 도저히 마스터로 보이지 않는 흑발의 에이지와 눈이 마주쳤다.
‘마력량도 그리 많지 않은 녀석인데?’
나는 전혀 강해 보이지 않는 그가 날 감지한 것에 놀랐고, 그 또한 비슷한 심정인 듯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쿠드라군은 수도를 한 바퀴 돌며 승전을 알렸고, 쿠드라를 비롯한 대표 장수들은 왕궁을 향해 이동했다.
왕궁에선 대기 중이던 왕실 기사들과 근위병이 그들을 맞이했고, 무장을 해제시킨 후 길을 터 줬다.
거리에 암행을 나섰던 귀족들은 모두 돌아와 예복을 입고서 행사를 위해 준비된 장소에서 쿠드라 후작이 오길 기다렸다.
이날은 왕궁이 개방되며 평민 들러리가 모여들었다.
각자 직급에 맞는 자리에 앉아 엄선된 전리품을 바치는 쿠드라 후작과 그 측근들을 제논이 치하하는 것으로 예식은 끝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전에 들어온 쿠드라 후작과 그 측근들은 왕실 기사가 제지할 때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멈추십시오!”
“호~ 필라이 자네가 가일론을 대신하는 건가?”
“그건…….”
기세에 밀린 왕실 기사들이 두어 발 물러나며 쿠드라가 나아가기 위해 발을 들어 올렸으나, 앞으로 내딛지 못했다.
마스터급, 혹은 준왕급은 되어야 느낄 수 있는 마력의 기류가 그의 몸을 옥죄었고, 발을 내딛는 순간 가르탈과 디아의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서기 때문이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