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176화 (175/189)

176화. 대관식

쿠드라 후작은 들어 올린 발을 내딛지 못한 채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 한 걸음에는 깊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 무력으로 가르탈과 디아를 감당할 수 있겠어?’

고민 끝에 그는 들어 올린 발을 회수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세자 저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예식에 어긋나도 한참이나 어긋난 그의 행동에 귀족들이 당황했다.

분명 쿠드라가 먼저 전리품을 바치며 예를 표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오갔는데, 그가 약속을 깬 것이었다.

웅성웅성.

장내의 귀족들이 동요하자 멀찍이서 구경 중인 평민들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뭐 하자는 거지?’

뭔갈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쿠드라가 내 쪽을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논에게 말했다.

“제가 없는 동안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신 월스 쿠드라가 있는 한 그 누구도 왕국의 땅을 넘보지 못할 테니!”

이 장소에 있는 모두가 느꼈다.

지금 쿠드라를 비롯한 그 측근들의 적의가 날 향해 있음을.

‘내전의 일등 공신인 날 견제하겠다?’

일촉즉발의 상황.

제논이 입꼬리를 올렸다.

“든든하구나, 쿠드라 후작. 그대의 허락 없인 그 누구도 왕국의 땅을 밟을 수 없을 테지. 설령 그게…….”

잠시 뜸을 들인 제논이 장내의 귀족들을 훑고선 말했다.

“제국이라도 말이야!”

제논의 입에서 제국이란 말이 나오자 귀족들이 당황했고, 쿠드라가 몸을 떨었다.

“지금 제국이라 했습니까?”

쿠드라의 물음에 제논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진심이십니까?”

“난 언제나 진심이었다.”

둘은 한참이나 시선을 나눴고, 제논이 침묵을 깼다.

“쿠드라 후작, 대관식까지다. 그때까지 날 믿어 줬으면 한다.”

뭔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제논을 바라보는 쿠드라 후작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쿠드라가 무릎을 굽혀 기사의 예를 표하자 그의 측근이 전리품이 든 상자를 앞으로 가져왔다.

“열어라.”

필라이의 지시로 왕실 기사 하나가 나서서 상자를 열어 보였다.

상자 속에는 꽃에 파묻힌 수급이 들어있었다.

“신 월스 쿠드라, 포카이 왕족의 수급을 바치옵니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장내의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었다.

쿠드라는 전쟁이란 이런 것이란 걸 알려 주듯, 제논을 응시하며 반응을 살폈다.

“최고의 전리품이구나.”

하지만, 제논은 쿠드라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답례품을 건넸다.

“열어 보라.”

제논이 건넨 건 세 개의 관짝.

칠왕자는 쿠드라도 익히 알고 있을 테지만, 나머지 두 시신은 모를 터였다.

“칠왕자를 돕던 자들이다.”

쿠드라의 부하가 인상을 구기며 관짝을 치우려던 때, 제논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나는 제국의 전직 로열 나이트인 크라지 윈스의 것이고, 또 하나는 헬리오스 교의 이단심문대 대장의 것이지…….”

“이런, 미…….”

“이게, 대체…….”

제논이 무엇을 준비했는지 몰랐던 귀족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저 시신을 공개 석상에서 내보인 것 자체가 제국과 헬리오스교를 향한 선전포고였기 때문이다.

군주의 기세를 꺾어 보려던 쿠드라는 제논의 광기 어린 표정을 보곤 당황을 금치 못했고, 개선식을 급히 끝내고자 했다.

“신 월스 쿠드라, 포카이 왕국과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왔나이다.”

아직 포카이 왕국 북부에는 저항 세력이 있으나 그 또한 시간문제이니 쿠드라는 미리 승전보를 알렸고, 예식에 맞게 행동함으로 개선식의 절차를 하나씩 소화해 갔다.

‘조급해졌어.’

제논은 그런 쿠드라의 심정을 알면서도 느긋하게 행동함으로써 많은 귀족을 불안케 했다.

“이로써 쿠드라 후작의 개선식을 마치겠다!”

쿠드라와 그 측근에 대한 치하가 끝나고, 개선식이 무사히 마무리됐다.

그날 저녁, 마을에선 축제가 왕국에선 파티가 열렸다.

내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 귀족들이 쿠드라에게 줄을 서며 파벌이 형성되자, 가르탈을 중심으로 반쿠드라 파벌이 만들어졌다.

가르탈이 왕당파를 자처하니, 쿠드라는 자연스럽게 귀족파라 불리게 됐는데…….

“개미족의 비축 물자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군요.”

“너희보단 훨씬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

가르탈과 인사를 주고받은 나 또한 왕당파에 소속되긴 했지만, 날 달가워하는 건 남부의 귀족들뿐.

대체로 날 꺼리는 게 느껴졌다.

동부의 세야누스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양쪽 파벌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파벌은 파벌이고, 고객은 고객이다.

내 충고를 무시한 귀족들이 문트리아게 접근하여 전쟁 물자를 거래하고자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들인 전쟁 물자에 막대한 마진을 붙여 쿠드라 후작에게 넘기려 했는데…….

쿠드라 후작 측에는 인재가 많다.

개선식이 진행되기 전, 쿠드라 후작 측에서 특급 노예들을 문트리아게 보여 주며 거래를 청해 왔다.

오러 혹은 마력을 다루는 노예들.

내게는 희소가치가 높은 보물이나 다름없지만, 쿠드라 입장에선 골칫거리였기에 헐값에 넘기고자 한 것이었다.

“노예는 원하는 만큼 준비해 줄 수 있소.”

“다른 전리품도 함께 취급해 드리죠.”

쿠드라 덕분에 개미 상단은 폭등한 물자로 폭락한 노예를 공급받을 수 있었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귀족들에게 판로도 없는 물자들을 대량으로 넘겨 폭리를 취했다.

쿠드라가 떠나고 물가가 안정되면 악성 재고를 잔뜩 품게 된 귀족들의 줄도산이 이어질 터.

개미족에게 우호적인 귀족에게는 동아줄을 내려 줄 것이고, 적대하는 귀족은 제대로 털어 버릴 생각이었다.

‘왕국의 완전 장악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   *   *

개선식 때, 쿠드라는 내전의 공신들과 함께 있는 다크와 나르본느를 보곤 놀람을 금치 못했다.

‘소문으론 들었지만, 저 외형… 지배자급 몬스터가 확실하군.’

애써 미소로 감정을 감춘 그는 제논의 수완에 감탄했으나, 감탄과 별개로 몬스터를 곁에 두려는 제논의 어리석음에 한숨을 삼켰다.

‘수백 년간 제국이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몬스터와 이종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것은 인간이 그들을 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정 조건을 갖춘 몬스터의 성장 속도는 인간에 비할 수 없다.

‘번성한 개미족은 왕국에 있어 거대한 재앙. 조속히 해결하지 못하면 대륙을 집어삼킬 재앙이 될 테지.’

개미족에 대한 경고에 제국을 거론한 제논을 보며 쿠드라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제논, 너 또한 선대와 다를 바 없구나.’

쿠드라는 제논의 그릇으론 자신은커녕 태반의 귀족을 품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백여 년간 이어져 온 클라우드 왕조도 오래 버티진 못하겠구나…….’

개선식이 끝나고 이어진 파티.

“후작님, 제논 저하를 말려야 합니다.”

“저하는 헬리오스 제국을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황권이 안정되면 제국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제국을 두려워한 귀족.

“대륙 제일교인 헬리오스교를 적대하다니요!”

“이단인 개미교를 받아들이면 모든 교단의 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과거 어둠의 여신인 디오나교를 받든 나라와 사냥의 여신인 루나교를 받든 나라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개미교를 이단으로 보는 귀족.

“일개 상인이 귀족들의 파티에 발을 들이다니… 이대론 명예를 저버린 아스만 놈들과 같아지는 꼴입니다.”

개미 상단이 커 가는 걸 불쾌하게 보는 귀족.

“후작님, 개미족의 번성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개미족을 우려하는 귀족 등이 쿠드라 후작에게 몰려들었다.

“그대들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안다. 나 또한 저하의 결정에 이의가 있는 바, 그대들이 나와 뜻을 함께 한다면 왕국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겠다.”

마일도스 후작과 카밀 후작이 없는 파티장.

쿠드라 후작의 독무대나 다름없었고, 그는 수많은 귀족을 포섭해 제논 이상의 세력을 형성했다.

시간이 흘러 제논의 대관식이 거행됐다.

대관식은 고위 성직자가 군주에게 왕관을 씌워 주며 그 정통성을 공인해 주는 행사였고, 대륙 제일 종교인 헬리오스교가 주관했는데…….

귀족들은 헬리오스교가 제논의 즉위를 허락했다는 것에 안도하며 대관식에 참석했으나, 행사를 주관하는 성직자를 보곤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대관식을 개미교 따위에게!”

“헬리오스교의 허락을 받지 못한 것인가!”

“저하! 이건 미친 짓이옵니다! 제정신을 차리시옵소서!”

당황한 백성과 격분한 귀족들의 중심에서 제논은 그 누구도 축복하지 않는 대관식의 절차를 밟았다.

“부탁하네.”

“예, 저하.”

둥지 심부의 신전을 지키던 데이지가 직접 나서서 왕관을 씌워 주는 역할을 맡았고, 왕관 또한 개미족 특제로 정교한 세공을 선보였다.

“저하께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합니까?

“맹세한다.”

“저하께선 왕국의 법과 관습을 지키며 공정하고 자비롭게 통치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한다.”

“저하께선 적들로부터 왕국을 지키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당신의 힘을 사용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한다.”

“개미신 키틀레야 님의 대리인으로서 당신이 클라우드 왕임을 인정합니다.”

데이지가 제논에게 왕관을 씌워 준 후 예식용 검을 전하려 하자, 백과 흑이 어우러진 신비한 빛의 기둥이 둘을 비췄다.

“이 빛은…….”

[그대가 클라우드의 왕임을 확인했노라.]

뇌리에 울린 음성에 당황한 제논과 달리 데이지는 흥분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키틀레야 님께서 내려 주신 기적입니다.”

빛은 개미족이 준비한 왕관과 예식용 검에 스며들었다.

민중은 신화에나 있을 법한 광경에 말을 잃었고, 행사를 망치기 위해 찾아온 각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은 신이 친히 축복을 내려 줬음을 알았다.

“개미신은 성전에조차 나오지 않는 하위 신일진데… 어찌 신기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빛의 기둥이 사라진 후,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는 제논을 본 민중들이 하나둘 엎드렸다.

그 광경을 둘러본 제논의 측근들이 눈물을 쏟으며 무릎을 굽혔으나, 귀족 중 예를 취한 건 절반 채 되지 않았고, 각국의 사신들도 예를 취하지 않았다.

“악신이 축복한 대관식이라니! 다슬리 왕국은 인정할 수 없소!”

작정하고 왔는지 기사들을 대동한 다슬리 측 사신들이 나서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제논은 포카이 왕국과 다슬리 왕국 너머에 있는 세 왕국의 사신에게 시선을 보냈다.

“우리도 다슬리 왕국과 같은 의견이요.”

“그런가…….”

제논의 시선이 아스만 측으로 옮겨갔다.

아스만 측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대들은 짐을 부정하기 위해 신마저 부정하는구나.”

헬리오스 교의 고위 성직자가 외쳤다.

“개미신은 악신의 하수인일 뿐, 신이라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와 결탁하다니! 정녕 신벌이 두렵지 않은가?”

“신벌? 푸하하하!”

제논의 광소에 모두가 당황했다.

눈가에 맺힌 물을 닦아 낸 제논이 울분을 토하듯 외쳤다.

“백 년이다! 백 년 동안 네놈들이 우리에게 앗아 간 것들을 생각해 봐라! 신벌? 그런 게 있었더냐?”

대륙 동쪽에 자리한 여섯 개의 왕국.

클라우드, 포카이, 다슬리, 코르덴, 아카드, 골디아…….

여섯 왕국은 제국과 대륙 제일 종교인 헬리오스교에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버텨왔다.

“내 백성이 굶는 것도, 노예로 팔려가는 것도, 몬스터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도, 내전조차! 모두 신들의 뜻이더냐?”

그 누구도 입에 담지 못한 말을 제논이 입에 담았다.

“모두 네놈들이 꾸민 짓을, 이번에도 신벌이라 포장할 생각이냐!”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너희들의 인정 따윈 필요 없다. 짐이 원하는 건 단 하나, 쿠드라 후작… 그대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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