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177화 (176/189)

177화. 날씨만은 화창했다

신의 축복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놀랍네.’

대륙의 교단들은 개미신을 인정하지 않았고, 제논의 폭주로 아스만을 제외한 다섯 왕국과 척을 지게 됐다.

‘이거 수습 가능한 건가?’

모두가 제논을 미친놈 보듯 했으나, 제논의 마력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매우 냉정한 상태야.’

제논이 쿠드라 후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쿠드라 후작, 난 온전한 왕국을 원한다.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확실히 쿠드라 후작만 품으면 왕국이 쪼개지진 않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제논이 패권국인 제국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는 것.

‘지금의 왕국은 대륙 공적이나 다름없어.’

내가 나서도 수습이 될 수 없는 상황.

‘어쩌려는 거지?’

제논이 왕국을 벼랑 끝에 내몰았으니 그 울타리에 있던 귀족들은 패닉에 빠졌고, 마스터인 쿠드라조차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조금 전 전하의 행동이 진정 왕국을 위한 것이옵니까!”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쿠드라의 외침이 제논을 강타했으나, 제논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맞서지 않으면 서서히 죽는다! 네놈도 알기에 포카이 왕국을 친 것이 아닌가?”

차분한 제논의 태도가 쿠드라를 더욱 자극했다.

‘제논…….’

그의 노림수가 뭔지는 모른다.

아니, 그에게 노림수 같은 건 없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개미족과 개미교를 버리십시오. 그들의 목숨으로 오늘의 무례를 해명하면…….”

“그래. 내가 그들을 배신하고, 놈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공물을 바치면 클라우드 왕국은 좀 더 연명할 수 있겠지.”

나는 가끔 제논의 서재에 들러 왕실 요리장의 역작인 디저트를 맛보며 그가 하는 일을 지켜봤다.

제논과 친분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행보였으나, 제논은 개미족인 날 친우로 생각하는지 많은 얘기를 해 줬었다.

‘수백 년간 제국과 헬리오스교의 적은 이종족과 몬스터였어… 지금 제국이 겪는 혼란은 마땅한 적이 없기 때문이야.’

현 황제는 황권 안정을 위해 군을 키우고 있었고, 그에 맞춰 귀족들도 군비 경쟁에 들어갔다.

‘제국 내부가 안정된 순간, 날카롭게 벼려진 그들의 칼날은 아스만을 넘어 우리를 향할 거야. 크라지 윈스와 헬리오스교의 이단심문대가 왕궁에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겠지…….’

그토록 바라던 만인지상의 위치에 앉은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왕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저 살고 싶었던 거지.’

칠왕자가 왕이 됐다면 다른 선택지가 있었겠지만, 제논이 왕 됐으니 늦든 빠르든 제국과 맞서야 할 운명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선…….’

뒷말은 듣지 못했다.

아니,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살기 위해선 제국과 동등한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얻으려면 동쪽 대륙을 통일해야 한다.

즉, 전쟁이 필요하단 건데…….

최근 폭군 같은 행보를 보이긴 하지만, 제논은 심성이 여렸다.

‘전쟁에서 죽는 건 귀족이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이지.’

제논은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타인을 전장으로 내몰아야 한다는 현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몇 명이 죽어야… 내가 살 수 있을까? 아니, 난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들.

당시의 나는 제논에게 말해 줬다.

‘내 눈에는 마력이 보여. 대상이 품고 있는 마력을 해석하면 무력, 생각, 상태, 잠재력 등도 알 수 있어.’

‘네 눈에는 난 어떻게 보이지?’

‘황금색?’

쿠드라 후작과 비슷하지만 다른…….

‘내가 본 인간 중 왕에 어울리는 건 너뿐이었어.’

그날 제논이 뭔가를 결심했고, 개미교에게 대관식을 맡겼다.

그리고 현재.

대치 중인 제논과 쿠드라의 의지가 장내의 마력에 색을 입혔다.

빛나는 두 종류의 마력이 서로를 밀어내던 중, 쿠드라가 외쳤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많은 귀족이 쿠드라 뒤에 서며 제논을 압박했다.

제논이 세력에서 밀리는 상황을 보며 신관과 사신들이 기뻐했다.

“저들을 버리신다면 신 월스 쿠드라, 전하께 온전한 왕국을 드리겠나이다!”

총구를 들이밀며 내미는 마지막 중재안.

‘역시, 이렇게 되는군.’

제논이 쿠드라를 품기 위해선 나와 개미교를 버려야 한다.

이 자리에서 쿠드라를 품지 못하면 왕국이 쪼개질 테니, 제논에겐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

‘내 걱정은 필요 없다 제논.’

제논과 시선을 교환하며 내 뜻을 전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고 한 발 물러나라. 이 자리에서 쿠드라를 제거하겠다!’

반란 분자를 한 번에 소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개미교가 대관식을 준비한 순간, 계획된 일이었다.

‘애초에 난, 너희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대관식이 치러진 광장.

이곳은 준비된 전장이다.

놈들의 바닥 밑은 뻥 뚫려 있어, 내 신호에 맞춰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나 귀족파를 집어삼킬 것이다.

추락을 버텨 내더라도 지하 세계에서 개미족의 정예 부대를 맞이해야 한다.

칠흑 속에서 3차 진화종에 맞설 수 있는 건 기감이 특출한 상급 이상의 기사 정도.

‘쿠드라와 측근들은 내가 처리해야겠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직접 나설 생각이었고, 귀족파 전원을 매장하여 제논에게 절대 왕권을 선사할 계획이었다.

‘자, 덤벼라!’

우리가 먼저 치면 학살의 장이 되니…….

‘그림이 좋지 못해.’

압도적 세력으로 왕을 핍박한 놈들에게 역광관 하는 상황을 원했고.

‘다들 준비해라!’

계획대로 원하던 상황이 만들어졌다.

‘완벽해!’

완벽할 줄 알았던 계획은 예상을 뛰어넘은 제논의 폭주로 틀어졌다.

“쿠드라… 넌 짐이 그들을 버릴 거라 생각하느냐?”

“왕국을 위해선 버리셔야 합니다!”

“하하하! 왕국을 위해서? 짐은 널 알고 있거늘, 넌 아직 짐을 모르는구나!”

“고작 몬스터와 이단을 위해 왕국을 혼란에 빠뜨릴 생각입니까?!”

“짐을 위해 싸워 준 자들이 네게는 고작인가.”

제논이 개미신에게 축복받은 검을 서서히 뽑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무력한 짐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선 왕국조차 내걸어야겠지.”

이상이 높았던 제논.

그에겐 이상을 실현할 힘과 세력이 부족했다.

그런 제논이었기에 작은 것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

‘제논 녀석. 설마…….’

그렇다.

그는 승부사였고, 올인 본능을 갖춘 위험한 놈이란 걸 간과했다.

“짐은 모든 걸 걸고서 날 위해 준 자들을 지키겠다! 그게 몬스터든, 이단이든, 노예든, 야만인이든…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짐은 모든 걸 걸고서 지키겠노라!”

“왕의 책무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누구도 무책임한 왕을 따르고 싶지 않을 겁니다. 보십시오! 무엇으로… 무엇으로 지킨단 말입니까!”

왕국의 최대 세력은 귀족파.

거기다 왕당파 내에서도 반수는 날 적대함으로 결속력이 약했다.

파벌을 떠나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서지 않는다.

그럴 터인데…….

상황은 나와 쿠드라의 예측을 뒤엎으며 나아갔다.

야만인 출신이던 리카르텐, 서자 출신의 유리, 받쳐 주는 세력이 없어 마일도스 후작의 호위에 만족해야 했던 마스터급 기사 라이포, 카밀 후작의 신임을 받기 위해 가족을 받쳐야 했던 카시안, 패배한 전투에서 살아남았단 이유로 무시 받던 부쉬트니, 변방 촌놈이라 무시 받던 수많은 귀족들…….

심지어는 이를 지켜보던 상인, 용병, 농민, 노예들까지.

그들의 가슴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리카르텐의 눈에서 흘러내린 한 줄기 물길을 보며 가르탈이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리카르텐.”

가르탈에게 감사를 표한 리카르텐이 눈물을 훔치곤 외쳤다.

“흰곰 부족의 리카르텐, 클라우드 왕국의 국왕 제논과 함께 싸울 것을 맹세한다!”

왕실의 예법과 동떨어진 투박한 맹세.

리카르텐에 이어 수많은 귀족이 나서며 귀족파와 제논 사이를 메웠고, 용병과 노예들이 가세하며 개미족인 나와 제논을 지키는 인의 장막이 만들어졌다.

“백작님, 이제 저희도 군주를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논 전하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너희들이 생각이 그렇다니, 가만있을 수 없구나!”

오랜 세월 동부의 패자로 중립을 지켜 오던 세야누스가 움직이자, 민중에 섞여 있던 자들이 튀어 올랐다.

“감히!”

인간을 발판 삼아 돌진하는 그들을 기사들이 끌어내리려 했으나, 그들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았다.

“암살자!”

“모두 최상급 익스퍼트다!”

쿠드라마저 놀란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존재를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다.

비밀 통로에서 봤던 자들, 왕국의 비밀 병기들이었다.

인막을 뚫고서 돌진해 온 그들은 가르탈과 디아가 막아서자. 왕실 문장이 새겨진 비수를 꺼내 보이며 예를 취했다.

“클라우드의 비수, 총원 33명… 제논 전하께 충성을 바칩니다.”

멀찍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음유시인이 시를 읊었다.

“누구도 축복하지 않은 그를 신만이 축복했다. 누구도 버리지 못한 그를 우리가 용서하니, 왕의 군대가 강림하여 그를 지키노라!”

신의를 지킨 제논.

나를 위해 나서 준 인간들.

고맙긴 하지만, 싱크홀을 발동할 수 없게 됐다.

이대로 두 세력이 충돌하면…….

‘최악이군.’

쿠드라가 물러서 주면 최악은 면할 수 있겠으나, 변수는 여전히 존재했다.

“이단의 폭정을 용서할 수 없다! 태양신 헬리오스님을 대신해 대신관인 내가 친히 벌하겠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님께서도 분노하셨습니다.”

“전사들이여! 눈앞에 재앙에 맞서라!”

헬리오스교, 가이아교, 아레스교의 고위 신관과 성기사들이 나타났고.

“대륙의 평화를 깨트린 클라우드 왕이여! 우릴 모욕한 죗값을 치러라!”

사신단의 병력까지 모여들며 사태가 커져만 갔다.

“진정해라! 아직 왕과의 대화가…….”

“클라우드 왕의 뜻은 충분히 알았으니, 쿠드라 후작은 왕국을 위한 결단을 내리시오!”

나와 쿠드라 후작의 제어에서 벗어난 현장은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을 듯했다.

“하…….”

준비한 것들이 물거품이 되면서 오는 허탈감.

그리고 지반의 진동과 함께 개미족의 페로몬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오늘 들어맞는 예측은 날씨 빼곤 하나도 없네.’

그녀들의 등장으로 충돌 직전이던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인간들이여~ 개미족의 진정한 여왕인 이 몸이 직접 왔노라!”

인근 건물 위에 선 페르의 외침.

그녀 곁에는 케어와 포스가 함께 있었다.

마스터 서큐 퀸으로 진화한 페르는 속옷 수준의 외골격만 있어 눈 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였고, 그나마 마스터 워커 퀸인 케어는 부족한 외골격을 대신할 장비들로 무장해 왔다.

[케어 님, 어떻게 오셨어요?]

[마스터 퀸이 되며 나의 감정안이 한 단계 성장했단다.]

감정을 통해 상대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게 된 케어.

[페르가 슬퍼할 미래를 보이더구나.]

케어는 페르를 통해 내게 큰 위기가 닥칠 것을 예측했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다.

세 여왕을 지키기 위해 페포케 군체 전원이 이곳에 왔다.

하늘과 벽, 지상을 채우기 시작한 검은 물결…….

이를 목도한 인간들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굳어 버렸다.

“다크, 네가 안 와서 여왕인 내가 직접 왔잖아!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고 넌 둥지에 돌아갈 준비나 해!”

케어가 장내 상황을 정리하여 페르에게 설명해 줬다.

“저쪽이 우리 편이고, 저쪽은… 우리 편이 될 자들이야.”

“그럼 죽이면 안 되겠네.”

쿠드라 측에 선 강자들이 주변인을 독려하며 개미족에게 대항하려 할 때, 페르가 능력을 발동했다.

“너희들 설마 우리와 싸우겠단 거야? 지금, 여기서? 여왕인 나와?”

“큭, 몸이 멋대로…….”

“이게 대체……?”

페르가 장내를 채운 페로몬을 변화시켜 기사급 이하의 인간을 모두 무릎 꿇린 것이다.

단 한 명, 아니 한 마리에 의해 수천의 무장이 무력화된 상황에 쿠드라 측은 넋을 잃었고, 제논 측은 전율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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