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무장 가르탈
다슬리 왕궁의 출입문.
먼지투성이의 병사가 근위병을 붙잡고서 다급히 말했다.
“큰일입니다!”
“진정하게, 무슨 일인가?”
“남쪽에서… 남쪽에서……. 클라우드 왕국이!”
남부 상황을 전해 들은 근위병이 무기를 집어 던지곤 상사에게 뛰어가 보고를 올렸다.
“뭐라? 클라우드 놈들이 국경을 넘어!”
클라우드 왕국 침공 계획을 세우고 있던 왕과 귀족들이 모인 대전.
소식을 전해 들은 귀족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포카이 왕국을 점령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리 제국이 이쪽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지만, 선전포고도 없이 국경을 넘다니!”
당황도 잠시, 귀족들은 현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전하, 이건 클라우드 국왕이 실수한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클라우드 왕국 서쪽 영지는 내전으로 피폐해졌고, 쿠드라 후작에 의해 징병이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백성을 쥐어짜 만든 군대가 아니겠습니까?”
“사내의 씨가 말랐겠군.”
책사 역을 담당하고 있던 귀족이 설명을 보태며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싸워 줄 필요도 없습니다. 두 달입니다. 두 달이면 보급에 차질이 생겨 회군할 것이고, 그들은 감당 못 할 짓을 저지른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다슬리 국왕이 턱을 괴며 물었다.
“두 달이라… 그렇지만 상대는 일찍이 클라우드의 검이라 칭해지던 가르탈 백작이오. 우리가 막아 낼 수 있겠소?”
아직 쿠드라와 가르탈이 공작으로 승직했다는 게 전해지지 않았고, 설령 전해졌다고 해도 다슬리 입장에선 상대의 작위를 인정해 줄 이유가 없었다.
“병력은 준비돼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병력의 수로 결정되는 게 아님을 다슬리의 왕은 잘 알고 있었다.
“가르탈 백작은 내전 영웅이지 않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수도의 수비를 강화하는 건…….”
귀족 하나가 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전하! 확실히 마스터인 가르탈의 전력은 위협적이지만, 그 부분은 심려치 마시옵소서.”
남부의 귀족들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가슴을 치며 말을 이었다.
“현 남부의 변경백 제르하바 님께선 클라우드 왕국의 제일 기사였던 가일론 백작과 비등한 무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은 기사입니다.”
“클라우드의 가르탈 백작으론 제르하바 님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제르하바 님 산하에는 두 명의 마스터가 더 있으니, 절대 밀릴 수 없음을 신 돈빌리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나이다.”
다슬리 왕국 최강자가 지키는 남쪽 국경.
귀족들은 만에 하나라도 뚫릴 리 없다고 장담했다.
“저희도 지원을 위해 나설 테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귀족들은 변경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이 아니다.
무리한 전선 확대로 무너질 클라우드 왕국의 땅을 뜯어먹기 위해 나서려는 것이었다.
* * *
국경의 저지선을 뚫고 진격하던 가르탈은 자신을 막아선 대군을 마주했다.
“5만 정도인가? 구색은 맞췄군.”
직접 정찰을 다녀온 리카르텐이 가르탈에게 말했다.
“대회전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오만하구나.”
“적장이 제르하바 백작이다 보니 자신하는 거겠죠.”
“제르하바 백작? 확실히 무력 하나는 대단한 기사였지.”
“그럼… 대회전은 피해야겠군요.”
리카르텐의 말에 가르탈은 비릿하게 웃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 * *
클라우드 왕궁 대전엔 많은 귀족이 모여 가르탈의 소식을 기다렸다.
“자네, 발 좀 그만 떨지 그러나?”
“자네야말로 손톱 좀 그만 물어뜯게, 정신이 사나워서야 원.”
제논만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정무를 보고 있는 것이,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
“전하,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다슬리의 변경백은 젊은 나이에 가일론 백작과 견주던 마스터입니다.”
명예 백작이자 왕실의 제1 기사단장 직을 맡고 있던 필라이의 물음에 제논이 양피지를 내려 두며 답했다.
“나도 알고 있다. 제국과 아스만을 제외한 여섯 왕국의 최강자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자였지.”
마찬가지로 명예 백작이자 제2 기사단장 직을 맡은 라이포가 말을 보탰다.
“가르탈 백작의 기량으론 변경백인 그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리카르텐이 변수로 작용할 테지만, 제르하바의 부관 또한 그리 녹록한 자는 아니죠.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하나. 가르탈의 패전을 염두에 두셔야…….”
라이포의 충언에 간신들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무엄합니다, 라이포 백작! 감히 전하를 의심하다니!”
“지금 왕국의 상황을 모르십니까? 전하 앞에서 패전을 입에 담다니요!”
귀족들이 뒷배가 약한 라이포를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려 하자 제논이 권좌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쾅!
“무엄한 건 그대들이니 닥치고 짐의 말이나 들어라!”
성난 귀족들을 쭈그리로 만든 제논이 회상하듯 턱을 괴며 불안해하는 귀족들을 달래듯 말했다.
“가르탈 공작이 검술로는 최고의 마스터는 아니나… 전장의 장수로선 쿠드라 공작이 인정한 사내다. 짐이 어찌 그를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귀족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제논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 믿든 안 믿든. 그대들의 운명은 가르탈 공작에게 달렸노라.”
“전하… 그게 무슨…….”
한 귀족이 의문을 보이자, 제논은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죽어야지. 그대들도 각오를 다지고 지금 해야 할 일에 매진하도록 하라!”
장내의 귀족들은 또 한 번 실감했다.
제논이 왕이 된 순간 클라우드 왕국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미래와 찬란히 빛날 미래 중 하나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전하, 일을 좀 보고 오겠나이다.”
“죄송합니다. 전하,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겼습니다.”
기도만으론 불안했던 귀족들은 지원군 징집에 적극 관여하여 비브라와 부쉬트니의 후속군 편성을 도왔다.
비브라와 부쉬트니가 각각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할 때, 가르탈 공작이 제르하바 백작을 꺾고 다슬리의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는 소식이 왕실 대전을 강타했다.
“와아아아아!”
권자에서 앉아 소식을 들은 제논은 짐짓 당연한 결과를 받아들이듯 여유 가득한 미소로 들뜬 귀족들을 바라봤다.
“짐이 말했지 않나. 전장에서의 그는 쿠드라에 버금가는 장수라고.”
* * *
“돌격!”
가르탈군 5만과 제르하바군 5만이 부딪힌 평야.
“이렇게 보니 두 덩어리가 서로를 먹어 치우려는 것 같군.”
가르탈이 전장을 바라보며 하는 말을 리카르텐이 묵묵히 들어줬다.
“리카르텐, 자네의 눈엔 저들이 어떻게 보이는가?”
“사기가 높군요. 쉽게 무너뜨리긴 힘들 겁니다.”
“그렇군. 난 조금 우습게 보인다네.”
“뭐가 말씀입니까?”
“저 덩어리들이 사실 하나가 아니지 않나.”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개(个)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을 하고 싶었네.”
“병사들의 무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력만 말하는 게 아니네. 보게, 우리의 병사들은 주변 상황을 의식하며 움직이는 반면, 저들은 앞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가르탈군은 내전으로 다져진 자가 오인장과 십인장을 맡고 있어 유기적으로 협력해 가며 수비 대형을 유지했고, 제르하바군은 전공에 눈먼 자들이 앞장서 상대의 대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가르탈군이 수비적으로 대응하니, 100인대 규모의 혼전만 있었을 뿐.
대체로 서로 대형을 잘 유지했기에 서로 간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가르탈군은 여전히 대형을 유지한 채 전투에 임했으나, 제르하바군의 일부는 이전과 같은 저돌성을 보이지 못했다.
적진의 균열을 포착한 리카르텐이 나서려 하자 가르탈은 그를 만류했다.
“상대를 물려면 이쪽에서도 빈틈이 생기고 말지. 지금은 기다릴 때야.”
충족한 보급 덕인지 가르탈은 급할 것 없다며 여유를 부렸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음을 감지한 제르하바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분쇄하라!”
제르하바가 가르탈군의 밀집 대형을 깨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쐐기형 돌진을 감행했다.
“장창 앞으로! 방패병은 뒤로 빠져라!”
장창병이 제르하바의 기병대를 막아섰지만, 세 명의 마스터와 기사들이 앞장서 장창을 걷어 내며 저지선을 뚫어 버렸다.
“분쇄하라!”
보병들의 전쟁에 기병이 난입하자 학살의 장이 됐다.
“적의 기병을 찾아라! 내 친히 분쇄해 주겠다.”
1차 방어선이 뚫리자 기병들은 물 만난 고기 마냥 호기롭게 적들을 베어 내며 전공을 쌓아갔다.
너무도 수월하게 적진을 휘저을 수 있었던 것에 의아함을 느낀 제르하바였지만, 이대로 적진에 혼란을 키워 타격을 줌으로써 전공을 키울 생각이었다.
“적의 기병을 찾아라!”
적의 주력을 꺾을 수 있다면 승냥이 같은 귀족들이 몰려오기 전에 가르탈군을 패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적의 주력을 찾아 헤맸고, 말의 체력이 다해서야 본대를 향해 기수를 틀었다.
“이 정도면 됐다. 돌아가자!”
기병으로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고 자축한 제르하바였으나, 그가 본대로 돌아가는 길은 적진을 휘저을 때처럼 순탄치 못했다.
리카르텐의 기병대가 돌아가는 기병의 뒤를 습격한 것이다.
후미부터 썰리기 시작한 제르하바의 기병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백작님, 후미를 잡혔습니다. 이대로 멈췄다간 적진에 고립되고 맙니다!”
“큭, 이걸 노리고 있었구나! 내가 막을 테니, 너는 퇴로를 확보해라!”
제르하바가 절반의 기병으로 후미를 맡기로 하며 부관에겐 퇴로를 뚫게 했다.
부하들이 열어 준 길을 따라 후미로 달려간 제르하바가 리카르텐과 충돌했다.
쾅!
동등한 조건에서 붙었다면 한 수에 끝났을 승부였지만, 제르하바의 말이 무너지며 그가 리카르텐을 벨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말에서 뛰어내린 제르하바는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창을 피했고, 짓이겨 오는 말발굽을 피하며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컥!”
기병 한 명을 제거해 말을 뺏어 탄 제르하바는 적병과 나란히 달리며 자신과 함께 온 부하들이 썰려 나가는 걸 보게 됐다.
‘상황이 좋지 않다!’
위기의 순간 제르하바의 눈엔 선두를 달리는 리카르텐이 눈에 들어왔고, 적장을 잡아 손실을 만회할 계획을 세웠다.
“이럇!”
적병을 베어 내며 리카르텐과의 거리를 좁힌 그가 장검을 휘둘렀고, 리카르텐은 창으로 맞섰다.
쾅!
몇 차례 합을 나눠 본 제르하바는 리카르텐의 실력이 범상치 안다고 느끼며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그 문신, 야만인인가?”
“흰곰 부족의 리카르텐. 네가 제르하바냐?”
“그렇다! 내가 바로 다슬리 왕국의……!”
“당첨이군.”
제르하바는 자신과 맞붙은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할 야만인이 비릿하게 웃는 모습에 격분했다.
“명예도 모르는 야만인 놈! 기사의 정점, 최강을 영접하라!”
캉! 카가강!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에 덮힌 검과 창이 어우러지며 충격파가 주변을 밀어 냈지만, 가르탈군의 기사들이 이를 뚫고 들어와 창을 내질렀다.
모든 공격을 막아 낼 수 없다고 느낀 제르하바는 일부 공격을 갑주로 막으려 했고, 이는 개미표의 명품 미스릴 창을 겪어 보지 못하여 내린 실책이었다.
푹!
리카르텐은 옆구리와 등에 상처를 허용한 제르하바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어이, 다슬리 최강. 죽을 준비는 됐나?”
제르하바는 강했다.
말을 잃고도 마상의 리카르텐을 상대함과 동시에 십여 명의 기사를 벴다.
하지만, 고립된 상황에서 쏟아지는 창격과 석궁을 모두 막아낼 수 없었던 그는 고슴도치가 되어 선 채로 생을 마감했다.
“휴, 가르탈 님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했어.”
제르하바의 수급을 창에 걸고서 추격에 나선 리카르텐은 제르하바군의 나머지 마스터 둘과 기병들의 수급을 가지고서 돌아오는 가르탈의 기병들을 맞이하게 됐다.
병이 모여 부대를 이루고, 부대가 모여 군대가 됐다면, 그 중심에 있어야 할 지휘관이 사라진 제르하바군은 소규모 부대로 쪼개졌고, 가르탈군에 의해 뜯기고 씹혀 삼켜졌다.
“아직이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진격이다!”
가르탈군에 휩쓸린 다슬리 남부의 성채들이 불타올랐고, 사방에서 모여들던 다슬리 귀족들의 군대가 각개격파 당했다.
남부의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다슬리 국왕은 다급히 수비 병력을 끌어모았으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오합지졸로는 가르탈의 군대를 막아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전하, 외성이 점령당하기 전에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전하, 후일을 도모하소서.”
왕이 떠난 수도.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버려졌음을 깨닫곤 무기를 버렸다.
* * *
가르탈 공작이 이끈 5만 병력이 다슬리 왕국을 향해 출발했을 무렵, 비브라 백작과 부쉬트니 백작이 각각 3만의 군을 모집했다.
11만이란 남성이 빠져나간 클라우드 왕국.
그들의 가족 또한 순차적으로 북쪽 점령지로 보내졌고, 그 빈자리를 쿠드라 공작이 보내 오는 노예들로 채워졌다.
노예의 관리에도 인력이 소비되며 생산 인력이 현저히 부족해진 상황.
공급 부족으로 물가가 폭등해야 정상이었지만, 나로 인해 물가는 안정을 넘어 과잉 공급에 의한 디플레이션을 겪게 됐다.
“아버지가 보리만 심어도 비싸게 팔 수 있을 거라 했잖아요!”
“전쟁이 터졌으니 보리값이 올라야…….”
“봐요! 이렇게 밀이 버젓이 거래되고 있는데, 누가 보리를 사요!”
전쟁을 예상하고 겨울에 보리를 심었던 농민들은 수확물을 처분하지 못해 곤란을 겪게 됐다.
그나마 보리야 먹을 수 있으니까 농민들이 수확물을 퍼먹으며 버틸 때, 귀족들이 하나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맞이한 귀족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뭐? 돈을 갚으라고? 감히 평민 따위가 귀족에게 돈을 갚으라고 하는 것이냐? 이건 귀족 모욕죄로 즉결 처분임을 알 테지! 용서를 바란다면 100골드를 내놔야 할 거다!”
암흑가를 상대로 돈을 빌리고도 갚기는커녕 무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