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183화 (182/189)

183화. 창조적 파괴

귀족은 영토와 병력을 가진 군벌이며 영민의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어, 영내에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들이 가진 의무라곤 유사시 국방에 힘을 보태는 것뿐.

각종 명목으로 거둔 세금은 병력 유지와 사치에 쓰였고, 행정적으로 복잡한 복지 같은 곳엔 1푼도 쓰이지 않았다.

“들어오는 세금이 많이 줄었군. 화전민을 찾아봐야겠어.”

성실한 귀족들은 가끔 세금을 내지 못해 산속에 숨어든 화전민을 찾아내 학살을 벌이거나, 잡아들여 노예로 팔았다.

무리한 투자로 자금난에 빠진 귀족들은 하인들의 임금을 줄였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은 바뀌지 않았다.

임금을 받지 못한 하인들이 불만을 내뱉으면 그 즉시 참수형에 처해지니, 하인들 입장에선 주는 대로 감사히 받아야 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다르다.

그들은 대체가 어려운 고급 인력이었고, 임금이 밀리면 휘하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기사들이 대거 유출되면 가문이 쇠퇴하여 하이에나 같은 인근 영지의 귀족들에게 노려질 수도 있으니…….

귀족들은 기사와 병사의 유지비를 채우기 위해 평민들을 좀 더 쥐어짜야 했다.

말라 죽지 않을 만큼 쥐어짜서 부족하면 죽여서라도 돈을 뽑아내는 게 귀족의 방식.

그런 귀족들의 행패를 잠시나마 멈춰 세운 건 암흑가의 사채업자들이었다.

“이자를 조금 높게 잡았지만, 영주님에겐 푼돈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흠… 뒷골목이나 전전하는 놈치곤 잘 아는군. 한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겠어.”

많은 귀족이 암흑가의 사채를 쓰며 한 생각은…….

개이득!

갚을 생각이 없었던 귀족들은 이자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서 빌릴 수 있는 만큼 빌렸다.

상환 기한이 다가와 암흑가의 일원이 귀족들을 찾았다.

“원금은 천천히 갚으시더라도 이자는 내주셔야…….”

채권자는 비굴했고, 채무자는 당당했다.

“무엄한 놈이구나! 여봐라. 저놈을 잡아 처형하라! 죄목은 귀족 모욕죄니라!”

“살려 주십시오. 남작님, 소인은 그저 빚을 탕감하기 위해 일을 받았을 뿐인 농민이옵니다. 그들과 깊은 관계는…….”

“농민이든 용병이든 내 알 바 아니고, 넌 날 모욕했으니 살려 보낼 수 없다.”

억울해하는 사내를 사형대로 보낸 남작은 양피지를 들어 보곤 중얼거렸다.

“흠, 기사들에게 줄 돈이 모자라겠어. 어쩔 수 없지.”

남작은 명령서 한 장을 만든 후, 휘하 기사를 소집했다.

“암흑가 놈들을 소탕하라!”

“충!”

기사들은 영내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작전에 들어갔다.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인 명분은 암흑가 소탕이었지만 숨어 버린 암흑가를 소탕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애초에 귀족들이 원하는 건 암흑가 소탕도 아니었다.

“영주님께서 암흑가 놈들을 숨겨 준 자는 살려 두지 말라 하셨다!”

병사들은 무고한 영민에게 죄를 씌워 부를 갈취했고, 남자들이 대거 전쟁에 끌려 나가며 남아도는 과부와 여인들을 잡아들여 노예로 팔아 치웠다.

“하층민이 늘면 치안이 나빠진다. 모두 잡아들여라!”

하층민에 대한 청소도 함께 진행됐다.

“캬~ 노예상 놈들, 눈치는 있어서 값을 잘 쳐주는군. 병사들에게 일러라. 죽이지 말고 팔아 치우라고.”

암흑가에선 패악을 일삼는 귀족들에게 경고장을 보냈지만, 귀족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감히, 날 상대로 협박을 해! 기분이 상했다. 오늘은 실컷 놀 테니, 술과 여자를 가져와라!”

병사의 행패가 날로 심해지며 두려움에 떨던 평민들이 가까운 신전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남편은 전쟁터로 끌려가고, 병사들에게 가진 걸 다 뺏겼습니다. 먹여만 주시면 뭐든 할 테니…….”

귀족들의 비호를 잃은 헬리오스 신전.

농민들의 몰락으로 함께 추락 중인 가이아 신전.

개미교가 무료로 개방한 육성 학교에 밀려 무기술 전수로 벌던 수익이 끊겨 버린 아레스 신전.

개미교에서 미용과 관련된 물건을 팔며 자금난에 빠진 세레나 신전.

각 신전에서는 상당량의 곡물을 비축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길어질 것을 예상한 그들은 창고를 열 생각이 없었다.

“모든 건 신의 뜻입니다. 신의 구원을 원한다면 그만한 성의를 보이세요.”

그들은 신도들에게 상당량의 재물을 요구했다.

“충분치 않군요.”

재물만 받곤, 보호를 거절하는 일도 잦았다.

신에게 버려진 다수의 사람이 신전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 여인의 상태가 위태로워 보였으나, 같은 처지인 사람들도 오물을 덮어쓴 듯한 그녀를 멀리했다.

절망만이 가득한 신전 앞.

로브를 덮어쓴 누군가가 신전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고, 여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세요.”

여인은 공허한 시선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준 자를 봤다.

로브에 가려져 있었지만, 귀족과 다르지 않은 깨끗한 피부의 아름다운 여성.

그녀의 하얀 볼에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기 있어 봐야 누구도 당신을 지켜 주지 않아요.”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어딜 가도 병사들이…….”

“개미교로 가세요. 클라우드 왕의 비호를 받는 그곳이라면 병사들도 함부로 건들진 못해요.”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전… 개미교의 신도가 아니에요. 그들이 받아 줄 이유가…….”

기어들어 가듯 힘없는 여인의 말을 끊은 로브의 여인이 화난 음성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받아 줄 거예요.”

멍한 눈으로 로브의 여인을 바라보던 여인.

자신의 몸에 묻은 오물이 옮겨 묻었다는 걸 알곤 몸이 굳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로브의 여성이 돌아섰고, 여인의 손엔 은화가 가득한 담긴 주머니가 쥐어져 있었다.

“이건…….”

은화 주머니를 열어 본 여인의 눈엔 잠시간 희망이 스쳤지만, 영주의 병사들을 떠올리곤 다시금 절망했다.

‘이런 거금, 분명 뺏길 거야.’

여인은 돈을 돌려주기 위해 손을 뻗어 로브의 여인을 잡으려다 오물이 묻은 자신의 손을 보곤 움츠렸다.

“이름… 이름이라도…….”

로브의 여인이 멈칫했다.

“…프릴.”

이름을 작게 속삭인 프릴의 주위로 로브를 덮어쓴 사내 세 명이 다가왔다.

덮어쓴 후드 사이로 보이는 얼굴의 흉터들.

여인은 그들이 평범한 주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고, 프릴이 위험한 자들에게 포위당했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용기를 내보려 했지만, 그녀가 나서기도 전에 프릴이 그들에게 말했다.

“아직도 귀족들은 우릴 과거의 쥐새끼로 알고 있나 봐. 심심하면 짓밟고, 가지고 놀 수 있는 그런 쥐새끼로 말이야.”

전귀 웨인, 도살자 마르코, 그리고 암살자 길드의 리더 야살(夜殺)의 크루크.

셋은 프릴의 명령을 기다렸다.

“귀족들은 왜 모를까? 우리도 밟으면 아픈 사람이란 걸.”

“보스, 전귀들은 준비됐다.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추가 비용이 발생할 거다.”

“투귀들도 눈 돌아간 지 오래야. 빨리 움직이자고.”

“야귀 부대는 일찍이 대기 중이다.”

여인은 자신을 일으켜 주고 돈까지 쥐여 준 상대가 누군지 깨달았다.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암흑가의 지배자이자, 칠악의 보스.

“원죄의… 프릴.”

어색한 미소를 지은 프릴이 여인에게 말했다.

“그 돈, 당신의 허락 없이 가져간 사람이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거예요. 그런 마법이 걸린 은화랍니다.”

프릴을 바라보던 여인이 눈물을 쏟았고, 급기야 끄억끄억 울기 시작했다.

프릴은 그런 그녀를 안아 주며 말했다.

“신이 그대를 버렸어도, 당신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분명 그대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이 찾아올 테니…….”

나아가는 프릴의 뒤로 로브의 사내들이 따라붙었다.

프릴이 영주의 저택에 도착했을 무렵, 세 명이던 로브의 사내는 스무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수금을 위해 빠져나간 때를 노린 습격.

저택에는 다섯이 채 되지 않는 경비병만이 남아 있었다.

“멈춰라!”

“어이, 형씨. 지금 나보고 멈추라고?”

마르코를 위시한 투귀들의 위압감에 경비들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길을 열어 줬다.

“현명한 판단이다.”

하지만, 투귀들은 한 명의 신입 경비를 제외한 넷을 도끼로 찍어 버렸다.

살아남은 신입 경비는 뒷걸음치다 넘어졌다.

그는 자신을 지나치는 사내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막았고, 축축이 젖어 드는 다리 사이로 작은 발을 보게 됐다.

경비병의 앞을 지나치며 프릴이 말했다.

“여긴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에요. 돌아가 당신의 가족을 지키세요.”

순간 경비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게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흑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 수금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던 신입 경비.

그를 보내 준 프릴은 투귀들로 하여금 정문과 후문을 장악하게 했고, 전귀와 야귀들을 이끌고서 저택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넓은 파티 홀이 나왔다.

파티 홀 중앙엔 전신 갑주를 입고서 그들을 기다리는 영주와 두 명의 호위 기사가 있었다.

프릴 일행을 훑어본 영주는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날 치려 해!”

홀을 둘러싼 2층 복도에선 영주의 부인과 아이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흥미로워하며 지켜봤다.

웃음을 그친 영주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품위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용병인가?”

도살자 마르코가 피 묻은 도끼를 털어내며 말했다.

“칠악, 투귀 부대의 대장 마르코. 빌린 돈 대신 목숨을 받으러 왔다.”

“칠악? 설마 뒷골목의 쥐새끼냐?”

영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놈들은 귀족이 우스운가?”

클라우드 왕국의 귀족들은 다섯 살부터 목검을 잡아야 했고, 몸이 다 자라기도 전에 실전에 근접한 대련 수업을 소화해야 했다.

성인이 돼서는 몬스터를 상대로 그동안 익혀 온 검을 시험했고, 화전민을 토벌하며 살육에 대한 거부함을 지웠다.

체계적인 훈련법을 통해 살인 기계로 키워진 영식 중 20세 중반이 돼서도 익스퍼트가 되지 못하면 후계에서 밀려나는 건 물론, 가문에서 쫓겨나거나 명예로운 죽음을 강요당했다.

그런 지극히 평범한 가문에서 자란 영주는 이 상황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거를 사냥하기 위해 고블린 떼가 몰려온 건가… 아니지, 고블린 떼를 보낸 오거가 있을 테지.”

영주는 마르코가 성큼성큼 다가와도 개의치 않는지 홀로 중얼거렸다.

“구두쇠인 트로 남작이 보냈다기엔 수가 많고, 그렇다고 케망 남작이 시궁쥐를 고용할 정도로 쇠퇴하진 않았을 테지. 누구냐? 설마 힐도 준남작이냐? 내전에서 돈을 좀 만졌어도 준남작 따위가 유서 깊은 남작가인 내게 암살자를 보내? 그것도 더러운 뒷골목의 쥐새끼들을?”

거구의 마르코는 영주의 앞에 도착해 도끼를 들어 올렸다.

“남작, 유언이 너무 길어 기억을 못 하겠다. 어쨌든 잘 가라.”

영주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놈, 중급 익스퍼트인 이 몸에서 뒷골목에서나 통하는 도끼질이 통할 것 같으냐?”

두 호위는 영주의 뒤에서 마르코를 비웃었고, 2층 복도에서 영주의 부인이 지루한지 하품을 할 때, 마르코가 도끼를 내리쳤다.

쾅!

영주의 검은 언제 휘둘러졌는지 손에 쥐어져 있었고, 마르코의 가슴이 찢어지며 피를 뿜었다.

“큭.”

주저앉은 마르코를 내려다보며 영주가 말했다.

“클라우드의 유서 깊은 남작가에서 태어난 이 몸은 무의 축복을 받아, 평생을 단련해 왔다. 그런 내가…….”

영주는 마르코의 뒤에서 저택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 사내들을 보곤 인상을 구겼다.

“쥐새끼의 도끼질 따위에…….”

한 방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게 아쉬웠던 걸까.

분해하는 영주에게 마르코가 거구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무리 도끼가 검보다 강한 무기라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등 따시고 배부른 환경에서 고기나 뜯으며 검만 휘둘러 온 댁들을 이기기란 불가능했지.”

치직.

영주의 손에 들린 검이 갈라졌다.

“그런데 참… 세상은 모르는 일이야. 나도 당신들처럼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몇 년째 밥 대신 약을 씹으며 도끼만 휘두르고 있거든…….”

영주는 말을 다 듣지 못한 채 반으로 갈라졌다.

호위 기사와 영주의 가족들이 말을 잃은 가운데, 마르코는 도끼에 푸른 연기를 피워냈다.

“칠악, 투귀 부대의 대장 마르코, 상급 익스퍼트다.”

두 호위는 검을 뽑다 마르코의 도끼에 목이 날아갔다.

영주의 가족들과 그들의 측근들은 저택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마르코가 시간을 끌어 준 사이 저택의 출입구는 모두 장악된 상황이었다.

프릴은 남작가 하나가 지워지는 과정을 눈에 담았다.

“확실히 처리해 줘.”

프릴이 직접 지운 가문은 모두 클라우드 왕국에 악영향을 끼치던 가문들이었고, 제거 중요도가 낮은 가문에 한해선 독극물로 서서히 공략하거나 저택 인원을 포섭하여 서서히 말려 죽였다.

몇몇 귀족들은 칠악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곤 도주를 결심했지만, 무사히 왕국을 빠져나갈 순 없었다.

“들었나? 케망 자작마저 당했다더군.”

“뭐? 상급 익스퍼트인 케망 자작이? 휘하에 중급 익스퍼트도 둘이나 있었을 텐데.”

“더는 방관할 수 없겠네.”

제논의 귀에도 칠악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갔다.

“칠악의 수장, 원죄의 프릴이라…….”

제논은 과거 벨레삭 백작성을 인계받을 때 만난 암흑가의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로군.”

살생부에 올려 둔 왕국의 쓰레기를 대신 처리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왕으로선 귀족들의 죽음을 좌시할 순 없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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