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184화 (183/189)

184화. 파멸의 검

본래 암흑가란 영주의 관용 아래 슬럼을 근거지로 살아가는 존재였다.

칠악이란 조직의 출현은 귀족들을 당황케 했으나, 잠시간의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하필, 전쟁 중에 이런 일이라니.”

“귀족이란 자가… 수치야, 수치.”

지인들의 의문사가 늘며 귀족들은 칠악의 존재를 가십거리로만 볼 수 없게 됐다.

“설마, 그도 칠악에게 당한 건가?”

“아닐세, 그는 집사의 배신으로…….”

“집사 따위가 배신했다고 귀족이 당했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분명 배후가 있을 거네.”

기사와 병사들을 전쟁터로 내보낸 귀족들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의연한 척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방비가 출중했던 자작급 귀족 하나가 목숨을 잃으며 귀족 사회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들은 단순한 쥐새끼들이 아닌 듯하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귀족들.

그들은 칠악이란 존재가 귀족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기존 생태계를 교란하는 돌연변이임을 인정했다.

“제거해야 하오!”

칠악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귀족이 연합하여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은 칠악의 실체를 잡아 내지 못했다.

“꼬리조차 보이지 않다니.”

술집, 노예상, 사채업, 마약상, 암살자, 도둑, 정보.

업계 1위에 해당하는 일곱 개의 조직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칠악의 존재는 내전을 거치며 더욱 거대해졌고, 이어진 전쟁과 영민을 못살게 구는 귀족들의 패악질로 그 덩치를 더욱 키운 상태.

귀족들은 자신들을 덮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를 볼 생각은 않고, 발밑에 떨고 있을 쥐새끼를 찾아다녔기에 칠악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귀족들의 손에서 해결되지 않으니, 제논의 귀에 칠악의 행적이 전해졌다.

몰랐으면 모를까, 왕의 위신을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필라이 경, 여기로 가 주게.”

칠악이 습격한 귀족 목록을 확인한 제논은 지도에서 한 지점을 찍으며 말했고, 이를 본 필라이가 이유를 물었다.

“여긴 왜…….”

“그들이 제거한 귀족의 태반은 내가 감시하던 자들이다.”

“그럼 이곳은……?”

“그래, 병력 지원을 거부한 마이구어 자작이 있는 곳이지.”

“마이구어 자작이라면 다른 귀족들과 격이 다릅니다. 아무리 암흑가가 대단해도 하층민들이 모여 형성된 조직인 이상…….”

제논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 보면 알 거야.”

현재 왕실 기사는 세 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단은 40명의 기사가 있다.

단원에겐 왕실령의 땅을 받아 그 수확물로 녹봉을 대신했고, 남작에 해당하는 작위가 내려졌다.

왕실령이 전쟁터가 되지 않는 이상, 그들 전체가 움직이진 않는다.

필라이는 경험이 부족한 기사 아홉을 선발했고, 수일간 말을 달려 마이구어 자작령에 들어섰다.

농가를 지나며 필라이가 느낀 것은…….

‘땅이 죽었다.’

전선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영지임에도 농민이 부족한지 땅이 죽어 있었고, 보이는 아낙들도 비쩍 마른 것이…….

“단장님, 옆 영지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저희를 심하게 두려워하고 있군요. 영주를 만나기 전에 상황을 알아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필라이는 지친 말에게 휴식을 줄 겸 인상 좋은 부하들에게 조사를 명했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부하들이 말했다.

“남자들의 수가 적어요. 영주가 동원령을 발동한 것 같습니다.”

“젊은 여자와 아이들도 몇 없네요.”

“몸 성한 자들이 없어요. 다들 횡설수설하는 게 영주 쪽에서 입단속을 단단히 해 둔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해 농가를 좀 더 둘러보기로 한 필라이.

평소 행실이 그리 바르지 않은 부하 하나가 일어나며 먹고 있던 육포를 버렸고, 기사들은 무심코 버려진 육포를 밟고 지나갔다.

나아가던 필라이와 기사들은 기척을 느끼곤 돌아섰다.

그곳엔 비쩍 마른 여인이 짓밟힌 육포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기사들의 시선에 놀란 여인이 급히 엎드려 절했고,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육포를 집었다.

육포를 품에 넣은 여인은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엎드린 채 뒤로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멀어지는 여인을 필라이와 기사들이 멍하게 바라봤다.

“…….”

기사들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까드득.

이를 악문 기사 하나가 필라이에게 말했다.

“더 조사할 것도 없습니다. 여긴 버려진 땅입니다.”

그때, 필라이의 귀에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잠깐!”

귀에 감각을 집중하던 그는 급히 말들을 묶어 둔 곳으로 뛰어갔다.

“따라와라!”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혈향이 짙게 풍기는 농가의 창고.

쾅!

기사들이 문을 부수고 본 광경은…….

“기사님들이 여긴 어쩐 일로……?”

“영주님이 보내셨습니까?”

술 취한 병사 다섯 명이 농가의 젊은 여인들을 상대로 갖은 욕망을 쏟아 내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상등품은 다 보내서 이런 것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마이구어 자작은 네놈들이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필라이의 물음에 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작님이 보내서 오신 게 아니군요? 그럼 엘리 남작령에서 오셨나 본데, 원하시는 게 있으면 값을 치르고 가져가시면 됩니다. 추천을 원하시면 어디 보자… 저게 괜찮겠군요.”

필라이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여인들의 상태를 보다 못한 기사 두 명이 검을 뽑았다.

“쓰레기 자식들이!”

“우릴 뭐로 보는 것이냐!”

클라우드 왕국 최강의 기사들이 모인 왕실 기사단.

그들의 검은 쾌속했다.

다섯 병사 중 셋은 반응조차 못 한 채 동강 났고, 두 명은 당황하다 조각났다.

칠악 토벌을 위해 마이구어 자작과 협력해야 했던 필라이는 난감해진 상황에 머리를 짚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허락도 없이…….”

“괜찮다. 너희가 검을 뽑지 않았어도 내가 뽑았을 거다.”

필라이는 피해자 여인들을 농가 사람들에게 맡긴 후, 마이구어 자작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말을 달리던 중 농가를 상대로 한 병사들의 패악질을 목격했지만…….

“한둘이 아니군.”

일일이 상대해 줬다간 해가 질듯하여 무시하고 달렸다.

“귀족들은 벌할 순 없지만, 관련된 병사는 모두 벌하게 할 것이다.”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달린 필라이.

도착한 자작성에서 충격적인 상황을 마주했다.

“이게 대체…….”

성문을 지켜야 할 병사들은 모두 토막 나 있었고, 내성에선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문을 통과해 내성으로 향하는 중, 도끼 전사와 병사들의 시가전을 목격했다.

“단장님! 칠악의 습격입니다!”

대체로 다수의 병사가 소수의 도끼 전사들에게 쫓겼는데, 도끼 전사들의 눈빛이 광기로 가득한 것이 웬만한 병사들은 눈빛만으로 죽일 수 있을 듯했다.

썰려 나가는 병사들을 본 기사들이 나서려 했으나, 주변을 둘러본 필라이가 부하들을 말렸다.

“칠악의 주력은 내성 쪽에 있을 거다! 무시하고 달려라!”

내성에 도착해 영주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왕실 기사들을 도끼 전사들이 막아섰다.

“이거, 기사들 아니신가?”

“칠악의 수괴들이냐?”

“이런, 소개가 필요한가?”

마르코가 도끼를 걸치며 한 말에 필라이가 답했다.

“아니, 필요 없다.”

필라이와 마르코가 격돌하며 왕실 기사 아홉 명을 상대로 투귀 부대 조장급 인원 20명이 맞섰다.

기사와 투귀들은 서로에게 놀랐다.

“암흑가 주제에 익스퍼트라니!”

“조심해라, 약에 중독되지 않은 기사들이다!”

왕실 기사는 강하다.

투귀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둘씩 짝지어 동귀어진을 불사한 맹공으로 기사들을 당황케 했다.

푸른 증기를 피워 내는 기사와 투귀들이 치열한 접전을 이어 가던 중, 필라이는 마르코의 도끼를 흘려 내며 혈흔을 남겼다.

“뒷골목 도끼술치곤 대단하군.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마르코의 혼신의 일격.

하지만, 마스터의 문턱에 들어선 필라이에겐 통하지 않았다.

쾅!

도끼가 튕겨 올라가며 훤히 열린 가슴 사이로 파고든 필라이가 검을 내찌르려던 순간, 섬뜩한 살기를 느낀 그는 땅을 박차 급히 물러났다.

‘내가 물러나다니…….’

마스터급 기사를 제외하곤 상대가 없을 줄 알았던 필라이는 자신을 뒤로 물린 살기의 주인을 확인했다.

마르코의 옆에서 섬뜩한 기운을 풍기며 검을 늘어뜨리고 있는 웨인.

“마르코, 상대는 왕실 기사다.”

“뭐? 왕실 기사? 어쩐지, 수준이 다르다 했어. 이거 째야 하는 거 아냐?”

웨인은 섬뜩한 미소를 지은 채 마르코에게 말했다.

“영주 놈은 야살 부대가 처리했으니, 넌 보스나 챙겨라.”

“같이 조지고 빨리 뜨자.”

전귀 웨인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간만에 보는 맛난 사냥감이다. 방해하면 네놈부터 썰어 줄 테니, 빨리 꺼져라.”

“퉷! 도와주려 해도 지랄이군.”

지친 투귀 부대가 물러났고, 그 자리를 전귀 부대가 채웠다.

“아홉밖에 없으니 사이좋게 나눠 가지자고.”

“그럼 둘이서 하나를 맡아야겠네.”

투귀들 같은 덩치가 없어 압박감이 부족한 전귀들이 검을 까딱이며 기사들을 조롱했다.

“어리석은…….”

전귀들의 도발을 하찮게 여긴 기사들이 자비 없는 살검을 펼쳤다.

수 분 후.

“왕실 기사 맞아?”

“뭐가 이리 약해?”

“이 정도면 나 혼자 맡아도 될 뻔했어.”

2대 1이었다지만 기사들은 전귀들에게 농락당했고, 필라이 또한 웨인에게 밀리며 큰 충격을 받았다.

“검이 흔들린다. 그러고도 왕실 기사냐?”

“넌… 대체…….”

필라이의 손목에 상처를 입히며 검을 날려 버린 웨인이 자신을 밝혔다.

“칠악, 전귀 부대의 대장 웨인이다.”

“왕실 제1 기사단 단장, 트니프 필라이…….”

“트니프인가? 아쉽지만, 이만 끝내지. 잘 가라.”

필라이는 자신을 향한 군더더기 없는 검의 궤적을 바라보며 오만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인 필라이 앞에 한 청년이 끼어들었다.

캉! 카강 카가강!

청년은 웨인의 검격을 가볍게 받아 내며 역공까지 가했고, 웨인을 몰아붙여 물러나게 했다.

“큭.”

물러난 웨인의 옷이 찢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청년을 알아본 필라이가 외쳤다.

“카시안 경!”

카시안은 기사치곤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상큼한 미소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부득이하게 결투에 난입하여 필라이 경의 명예를 훼손시켰군요.”

“아닐세, 그보다 그대가 왜 여기에…….”

“전하의 명으로 마이구어 자작과 선이 닿은 귀족들을 알아보던 중 자작이 독살당하여 작전에 실패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자부터 처리한 후 말씀드리죠.”

여유 가득한 카시안이 웨인을 향해 검을 까딱이며 말했다.

“왕실 제3 기사단 단장 비세프 카시안이다. 우리 선배가 진 빚은 내가 대신 갚지.”

“카밀 휘하에 있던 꼬맹이가 많이도 컸군.”

카시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놈의 검술, 그리고 날 아는 듯한 말투… 역시 당신이었군.”

“카시안 경, 저자를 아는가?”

필라이의 물음에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유명했던 자입니다. 제가 수습 기사일 무렵, 가일론 백작님의 두 번째 제자로 왕국 최연소 마스터 후보에 올랐던 인물이니까요.”

웨인의 신상 명세를 안 필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자가 어째서…….”

“돈에 눈이 멀어 백작님 몰래 청부 살인을 받았다죠. 이젠 기사도 아닌 왕국을 좀먹는 기생충일 뿐입니다.”

마스터인 카시안을 마주한 웨인은 상황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날 알아봐 주니 영광이군 그래.”

“전귀 웨인! 예전의 내가 아니다. 살고 싶으면 검을 버려라!”

“그래, 마스터인 자네가 상대라면… 확실히 이 검으론 부족하겠지.”

웨인이 검을 버렸다.

“현명한 판단이다. 웨인,”

카시안이 검을 내리곤 그를 포박하기 위해 다가갔다.

“비세프 카시안… 한 가지 충고하지.”

“…….”

웨인이 팔을 내려 허리춤의 검을 잡으며 말했다.

“기사라면 어떤 순간에도 방심하지 마라.”

웨인이 검을 뽑으며 올려 쳤다.

카시안은 급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촤악!

검이 잘려 나가며 몸이 그였다.

허벅지에서 어깨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를 입은 카시안.

피를 쏟으며 주저앉았다.

“힘을… 숨기고 있었나?”

웨인은 붉게 빛나는 검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 템빨이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