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각성의 길
제국으로 망명을 계획한 마이구어 자작은 영민들을 잡아들여 강도 높은 노역을 시키거나, 노예로 팔아 치웠는데…….
내성 지하의 감옥.
영주에게 잡혀 온 영민들이 갇혀 있었다.
갖은 고초를 겪은 영민들을 본 야귀 부대였지만, 암살자로 키워진 그들은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마이구어 자작은 죽었다. 모두 밖으로 나가라.”
야귀들이 창살을 열어 자유를 줬음에도 영민들은 공허한 눈으로 야귀들을 바라볼 뿐.
“이제 자유다.”
대장장이로 보이는 듬직한 노인이 이마에 새겨진 노예 인장을 보여 주며 말했다.
“범죄 노예의 낙인이라네, 창살이 없어져도… 노예의 삶에선 벗어날 순 없지.”
팔뚝에 노예 낙인이 찍힌 여인이 말을 이었다.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거예요. 저흰 죽더라도 여기서 죽어야 해요…….”
“곤란하군. 우리의 임무는 너희들을 내보내는 것인데 말이야.”
도주한 병사를 추격하던 전귀 하나가 고민에 빠진 야귀를 보곤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시간 없다고!”
“끌어내기엔 수가 너무 많다.”
“하~ 칼을 쓰라고 칼을!”
전귀 하나가 지하 감옥에 불을 질렀고, 칼을 휘둘러 영민들을 압박했다.
“시간 없어! 다들 나가! 안 나가면 내 손에 죽는다!”
악귀 같은 전귀를 피해 수용소에서 빠져나온 영민들.
타오르는 저택과 허둥대는 병사들을 보게 됐다.
“살려… 크악!”
자신들의 생살여탈권을 지니고 있던 절대 권력자들이 사냥당하는 모습에 영민들은 몸을 떨었다.
“죽기 싫으면 저기로 가라!”
저택을 빠져나온 영민들은 살기 위해 흩어지며 죽은 병사들의 무장을 챙겼다.
영민들이 갇힌 곳은 제각각.
탈출한 영민 중 일부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웨인과 카시안의 격돌을 지켜보게 됐다.
쾅! 콰쾅!
붉은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며 섬뜩한 웃음을 자아내는 악귀와 푸른 오러 블레이드를 쓰는 진중한 기사.
대조되는 두 사람의 격돌은 어둠과 빛, 악과 정의의 승부로 보였으나, 관중들에겐 양쪽 다 두렵긴 매한가지였다.
“재밌었다. 카시안…….”
“난, 아니야.”
두 사내가 쓰러졌다.
기회를 보던 영민들이 출입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모두가 출입구를 향해 뛸 때, 여인 하나가 쓰러진 둘에게 다가갔다.
“뭘 하려는 것이냐?”
대장장이 노인이 여인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들은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마스터급 강자다. 다 죽어간다 해도 우리 같은 건 스치기만 해도 끝이야!”
“알아요. 하지만, 저자만큼은…….”
여인과 노인의 시선이 교차했고, 노인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노인과 여인에게 말했다.
“안타깝지만, 출혈이 너무 컸다. 그러니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시안은 여인과 노인에게 가문의 상징을 맡길 생각이었다.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내밀려던 카시안.
그런 그는 여인과 노인의 목적이 자신이 아닌 웨인이란 걸 알게 됐다.
“놈에게 원한이라도 있나?”
웨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노인과 여인을 보며 검을 힘껏 쥐었다.
접근을 거부하는 웨인의 눈을 마주한 노인과 여인의 혈색이 핼쑥해졌다.
카시안은 격의 차이를 느낀 노인과 여인이 물러갈 줄 알았으나, 이를 악문 여인은 다가가길 멈추지 않았다.
피식―
어째서인지 웨인은 손에 힘을 빼며 여인의 접근을 허락했고, 여인은 웨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제야 여인과 노인의 목적이 웨인을 구하는 것임을 깨달은 카시안은 피를 토하며 외쳤다.
“그자는 명예고 긍지도 없이 그저 타인의 피를 탐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살귀다. 그런 자를 왜 돕는 것이냐!”
끙끙거리며 웨인을 일으켜 세운 여인이 말했다.
“명예롭고 긍지 높은 기사인 당신은 영원히 모를 겁니다.”
노인과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하게 된 웨인.
응급처치는 받았으나,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웨인은 바닥에 새겨지는 혈흔을 보곤 비릿하게 웃었다.
“왕실 기사 놈들이 근처에 있다. 살고 싶으면 날 두고 가라…….”
노인과 여인은 말없이 나아갔고, 웨인은 둘을 훑어봤다.
며칠을 굶었는지 배가 등가죽에 붙은 노인과 전신 타박상을 입은 여인.
웨인은 진땀을 빼 가며 자신을 데려가려는 두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 같은 걸 구해 봐야…….”
내성 밖으로 빠져나와 웨인의 출혈이 줄었음을 확인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저희 목소리는 세상에 닿지 않지만, 당신들의 검은 달라요.”
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기분이 좋아진 웨인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네놈들이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알아요. 당신이 돈만 받으면 누구든 죽여준다는 전귀라는 거…….”
“알고 있으면 여기서 날 두고 가는 게 좋을 거다. 곧 추격자가 따라붙을 거야.”
“아뇨, 당신은 여기서 죽어선 안 돼요.”
여인은 노인에게 웨인을 맡기며 챙겨 온 단검으로 팔목을 그었다.
“부탁합니다.”
노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자, 여인은 피를 뿌려 가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골목으로 들어선 웨인이 노인에게 말했다.
“아마추어군. 자신의 피로 덧칠한다 해서 있던 흔적이 지워지진 않아.”
“그녀도 알고 있을 거네.”
“멍청한 년이군. 기사도 아닌 나 같은 걸 도와줘도 보답 같은 건 없을 텐데…….”
“그것도 알고 있을 거네.”
“대체 왜…….”
웨인의 의문에 노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노인은 좁은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휘둘러지는 검은 무수히 봤네만, 저 하늘을 향해 휘둘러지는 지상의 검은 본 적이 없었다네.”
“귀족에 대한 원한인가?”
웨인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검은 그녀에겐 불씨였겠지. 몸을 태워서라도 꺼트리고 싶지 않은 그런 불씨 말일세. 내게도 그리 보였네…….”
웨인은 노인의 말을 다 듣지 못한 체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웨인이 깨어났다.
그는 약물 속에 잠겨 있는 자신의 상황을 인지했다.
“여긴?”
웨인은 자신을 바라보며 신기해하는 메디에게 물었다.
“둥지 심층부에 있는 나와 히나의 공동 연구실.”
“분명 치명상이었을 텐데… 개미족은 죽은 자도 살려내나?”
메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죽은 인간은 아무리 개미족이라도 살릴 수 없어.”
“내가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가?”
메디는 의문에 잠긴 웨인의 손을 가리켰다.
“의식을 잃고도 놓지 않더군. 그 검이 널 살렸어.”
웨인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파멸의 검을 보곤 눈이 커졌다.
“파멸의 검이?”
하얀 가운을 입은 히나가 다가와 설명해 줬다.
“파멸의 검은 사용자의 감정에 반응하여 마력을 빨아들이는 마법검이에요.”
파멸의 검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용자를 죽음으로 내몬 검.
누가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흑탑의 3장로 히스는 산 제물을 이용한 의식으로 마력을 충전하여 사용했다.
“몇 가지 기능을 봉인해 당신이 쓸 수 있도록 조정한 게 저에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제가 조정했으니 알죠. 그 검에는 사용자에게 마력을 공급할 수 있는 기능이 없어요. 그런데도 그 검은 당신에게 마력을 공급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회복하는 동안 쭉…….”
웨인이 검을 바라보며 자신을 살리려 한 여인과 노인을 떠올렸다.
‘왜 날 살리려 했지? 내게 바라는 게 뭐지?’
히나는 긴 설명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어요. 이런 걸 우린…….”
웨인은 속으로 기적이란 단어를 떠올렸지만, 히나와 메디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오류라고 해요.”
“오류라고 하지.”
메디와 히나의 보살핌을 받아 빠르게 회복한 웨인.
며칠 지나지 않아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
‘오러의 길이 비틀렸다.’
몸은 회복했으나, 기혈이 뒤틀린 그는 검사로서의 미래를 잃었다.
피식.
웨인은 올 게 왔다는 듯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젠, 기사 하나 잡기 어렵겠어.”
모아 둔 돈에서 오는 여유인가?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슬로우 라이프도 나쁘지 않아.”
연구실을 나갈 때, 웨인은 망가진 파멸의 검을 보며 잠시간 고민했다.
“이제 그건 파멸의 검이 아니에요. 고칠 수도 없을 테니 제가 처분해 드릴게요.”
히나의 친절에 웨인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기념으로 가져가겠다.”
고철이 된 검과 망가진 몸.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웨인은 다크를 찾았다.
“은퇴?”
“보시다시피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주신 검도 망가졌고요.”
웨인과 검을 지긋이 바라보던 다크.
“이상하군. 어디가 망가졌다는 거지?”
“오러를 쓸 수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검 손잡이에 걸려 있던 마법들이 발동하지 않아요.”
“그래? 하긴, 인간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테지…….”
잠시간 고민하던 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여행이라도 다녀와.”
여비를 챙겨준 다크는 웨인의 생존 소식을 은폐해 주기로 했고, 하이 페어리 한 마리를 붙여 줬다.
“가자 인간! 여행이란 임무를 하루빨리 완수하는 것이다!”
“여행이란 느긋이 하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빨리 끝내고 다른 일을 받을 수 있지?”
“그것 또한 느긋이 생각해 봐야지…….”
말 많은 하이 페어리 한 마리와 여행을 시작한 웨인.
그는 자신을 구해 준 여인과 노인을 떠올리곤 목적지를 정했다.
“어디로 가는 거냐 인간?”
“말해 주면 아냐?”
“그야, 모르지…….”
받은 여비는 충분했지만, 수전노인 웨인은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
“어이 형씨, 칠악이라고 들어 봤겠지?”
“칠악?”
웨인은 어딜 가도 시비가 잘 걸리는 체질이었기에…….
“왕국에선 칠악이 토벌됐다고 공표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래서, 여긴 누가 관리하지?”
삼류 악당들이 날파리처럼 꼬여 들었다.
“이 몸이 관리하고 있지.”
“크흐흐.”
“지금 웃었냐?”
오러를 다룰 수 없게 된 웨인의 검은…….
서걱!
과거 이상으로 날카로우며 흉포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삼류 악인들이 바닥을 기며 빌었다.
“살려줘… 우릴 죽이면 칠악의 동료들이…….”
돈이 될 만한 걸 모두 강탈한 웨인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이, 삼류, 한 가지 좋은 걸 알려 주마. 칠악은 산 자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아.”
“그 사실을 어떻게? 설마… 넌?!”
퍽!
강탈한 돈으로 숙식을 해결하니, 돈 쓸 일이 없던 웨인.
가진 돈을 개미 은행에 맡긴 그는 파멸의 검이라 불렸던 고철 검 한 자루만을 지닌 채 세상을 떠돌았고, 그의 목적은 노인과 여인에게 해답을 얻는 것이었다.
떠도는 그의 눈에 변해 가는 세상이 담겼다.
영주가 제거된 영지는 친제논파의 귀족이 차지했고, 성직자들이 떠난 자리엔 개미교의 신전이 들어섰다.
농민들이 버린 땅엔 가축이 키워졌고, 길드 마스터가 떠난 길드는 누군가에게 인수되어 제국에도 없을 혁신적인 시스템을 갖췄다.
과거 웨인이 불태우고 파괴한 곳에선 새로운 형식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여기 아니야? 네가 목표했던 장소가…….”
“그래, 이곳이다.”
광장 중앙 거대한 비석.
그곳에는 전 영주의 행패와 그에 맞서 싸운 자들이 기록돼 있었다.
“왕실 기사가 악에 물든 영주와 칠악이란 조직을 물리치고 영민들을 구했다는 내용이네. 웨인, 네가 해 준 이야기와 다른 것 같은데?”
“얼추 비슷해.”
“뭐가 비슷하단 거야! 여기선 영주와 칠악이 한패로 묶였잖아!”
“가자.”
길에서 웨인은 검을 안고서 어딘가를 급히 달려가는 소년과 스쳤다.
‘남장인가?’
웨인은 소년이 남장한 여자라는 걸 알았고 대장장이의 일로 검을 납품하는 중이라는 것도 알아챘지만, 그녀가 자신이 찾고 있는 여인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며칠간 노인과 여인을 찾지 못한 웨인.
“죽었나 보군.”
답해 줄 당사자가 없으니, 답을 찾기 위한 여행을 계속했다.
* * *
분명 무승부였지만, 카시안에게 있어 참패나 다름없었다.
“저런 쓰레기도 인망이 있는데, 기사의 정점인 내가 유언도 남기지 못하다니.”
홀로 쓸쓸히 죽어가던 그의 몸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암흑가 놈들 아니랄까 봐 꼼꼼하기도 하군…….”
확인 사살을 당할 줄 알았던 카시안.
사내는 품에서 유리병을 꺼내며 말했다.
“칠악 소속, 야귀 부대의 대장 크루크다. 보스의 전언이 있으니 잘 들어라.”
크루크는 유리병의 내용을 카시안에게 부으며 말했다.
“너희가 비추지 못한 그림자는 우리가 가지겠다. 더는 어둠에 관여하지 마라. 너희가 어둠마저 밝히겠다면 잿빛 혼돈이 도래할 것이다.”
카시안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쿨럭… 지금 그걸 나보고 왕에게 전하라고?”
“편지로 써 왔다. 최상급 포션을 한 병 더 두고 갈 테니, 살아서 꼭 전하도록.”
몸을 회복한 카시안, 그는 필라이와 합류했다.
‘놈의 죽음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웨인의 잠재력에 두려움을 느낀 카시안은 웨인의 흔적을 쫓았다.
“속았습니다.”
흔적 끝에선 피칠한 여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카시안은 마시다 남은 포션을 여인에게 먹였다.
“카시안 님, 이대론 늦습니다.”
“됐다. 여자를 챙겨라. 신전으로 간다.”
카시안의 임무 보고서와 필라이의 보고서를 받게 된 제논.
“둘 다 실패했군.”
크루크가 전한 편지 내용을 떠올리며 체스 말을 건드리던 제논.
그는 칠악이 토벌됐음을 공표했다.
“그림자라면, 그림자답게 숨어 있어라. 내 눈에 띄지 않게 말이야.”
한참 시끄럽던 칠악의 존재가 지워지듯 사라졌지만, 귀족들의 의문사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이를 제논의 소행이라 여긴 친제국파 귀족들.
급하게 짐을 싸서 제국을 향해 움직였지만, 그들이 무사히 왕국을 빠져나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