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아르모네는 잊지 않았다
마스터급 시체 열두 구는 상위 서열의 하이 팩토리들에게 맡겨졌다.
최상위 등급인 초급(超給)영양이 만들어지는 동안, 4장로 네트리와 함께 꿀벌족 대표인 아르모네를 찾았다.
아르모네의 모습이 예전과는 살포시 달라져 있었다.
‘어려졌어…….’
금빛 아우라를 두른 듯한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영양 등급도 세 단계 상승했다.
‘이 정도면 마스터급 인간과 같은 수준이야.’
어려진 외모와 달리, 풍기는 마력은 왕급 수준.
‘강해진 건가?’
찬찬히 관찰해 본 결과 아쉽게도 그녀의 전투력은 형편없어 보였다.
‘치유와 생산 쪽 능력들만 개화됐나 보네.’
탐색을 마친 나는 용건을 꺼냈다.
“특급 로열젤리가 필요해.”
잠재력 높은 허니 퀸을 육성하거나, 만병통치약으로도 쓰이는 특급 로열젤리.
장성한 허니 퀸들도 연간 극소량밖에 만들 수 없는 진귀한 자원이었지만, 아르모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준비해 둘게요.”
“다행이군. 부족하진 않은 듯해.”
네트리가 안도하며 뱉은 말에 아르모네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특급 로얄젤리는 저희에게도 매우 진귀한 자원이에요. 충분히 갖추고 있진 않답니다.”
“충분하지 않다니?”
네트리의 추궁에 아르모네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진정하세요, 네트리 님. 지금 육성 중이던 엘리트 허니 퀸들을 포기하고, 저희가 조금만 무리하면 충분한 양을 제공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였어요.”
허니 퀸의 상위종, 엘리트 허니 퀸의 육성에 상당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해 온 꿀벌족.
아르모네는 개미족을 위해 진행 중인 숙원 사업 중 하나를 미루기로 했다.
“괜찮겠어?”
나의 물음에 아르모네는 환히 웃으며 더듬이를 내밀었다.
“다크 님이 직접 찾아 주지 않았다면 잠깐 망설였을 거예요.”
아르모네의 페로몬이 사방으로 번져 갔다.
“꿀벌족 모두에게 다크 님의 요청을 전했어요. 잠시 기다리시면 그들이 성의를 표해 올 거예요.”
말을 마친 아르모네가 지팡이 끝에 매달린 구슬에 금빛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기억하시나요?”
과거, 아카시아 숲의 말벌족과 전쟁 때 동족들을 설득하여 병력을 지원해 준 아르모네.
당시 페로몬을 과하게 썼던 아르모네는 군체에서 폐위당하여 숲에 버려졌었다.
“죽어 가던 제게 더듬이를 내밀어 주신 건… 다크 님이셨죠.”
아르모네와 나의 만남.
오랜 세월 부당한 착취 속에서 생존해 온 꿀벌족은 개미족과의 공생으로 종족 역사상 다시없을 규모의 연합체를 이루었다.
다단계 마냥, 각 군체가 산하 군체 여럿을 거느린 형태.
“지금의 전… 그때의 허니 퀸이 아니랍니다.”
풍족한 환경에서 마력을 축적해 온 아르모네는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여 엘리트 허니 퀸으로 진화했고, 특별한 조건들을 갖추면서 허니 로드가 된 상태.
꿀의 지배자이자 꿀벌족의 정점.
아르모네는 마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구슬에 금빛 마력을 주입했다.
“이게 꿀벌족 나름의 성의란 겁니다.”
자이언트 허니비들도 날아와 구슬에 자신의 마력을 주입한 후 휘청거리며 구석으로 날아갔다.
구슬 속에는 찰랑거리는 액체가 있었다.
그 액체는 아르모네와 허니비들의 마력을 듬뿍 빨아들여 영양 등급을 높였고, 우리가 흔히 아는 특급 로열젤리가 됐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였나?’
마력을 소진하면서 허니비들의 수명이 단축됐고, 아르모네의 탐스럽던 금빛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변해 버렸다.
“다크 님이 믿고 키워 줬기에…….”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아르모네.
하지만, 그녀는 일말의 내색조차 하지 않고서 미소 지었다.
“오늘의 제가…….”
호의를 쉽사리 망각하는 타 종족과 달리 꿀벌족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거랍니다.”
때마침 인근 군체의 엘리트 허니 퀸들이 날아와 지팡이 위에 달린 구슬을 떼어 내 건넸다.
구슬을 건넨 허니 퀸들은 모두 마력 고갈 증상을 겪는지 퀭한 모습이었다.
허니 퀸들이 건넨 구슬이 내 앞에 쌓일 무렵, 사방에서 일벌 계급의 꿀벌족이 몰려왔다.
“다크 님… 저희는 행복했습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갚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구슬과 감사를 표하며 수명을 다했다.
“다크, 이건 특급 이상의 로열젤리다!”
쌓여가는 구슬을 보며 네트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나, 나는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 쓴 허니 퀸들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꿀벌족은 특이한 종족이야.’
전생에 읽은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났다.
나무는 친구인 소년에게 그네가 되어 줬고, 사과를 선물했다.
세월이 흘러 성장한 소년은 사과를 팔아 돈을 벌었고, 집을 짓기 위해 나뭇가지를 베어 갔다.
그러고 몸통으론 배를 만들어 항해를 떠났다.
소년은 노인이 되어 다시금 나무를 찾았다.
밑동만 남은 나무는 소년이 쉬어갈 의자가 되어줬다.
친구에게 모든 걸 내준 나무가 행복해하는 그림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이기적인 인간과 친구가 된 나무의 잔혹한 결말…….
난 그런 결말을 썩 좋아하진 않았다.
개미족은 자기 집단 한정으로 매우 이기적인 존재였고, 전생의 기억이 더해진 나는 생존을 넘어 최강 군체를 목표한 탐욕의 화신이 됐다.
하나를 내준 상대에게 하나만 뺏어 와선 성에 차지 않는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발견하면, 키워서 대대손손 뜯어내야지! 몸통은 왜 벤 거야?’
이쪽은 영약까지 재배하는 개미족이다.
꿀벌족 성장에 필요한 게 있다면 채워 주면 그만.
‘일단 부족해 보이는 마력부터 수혈해 주자. 허니 퀸들이 회복하면 연구팀을 배치해 이들의 성장을 돕게 해야겠어. 마력수와 약물, 그 외의 자원들도 활용하면 꿀도 개량할 수 있겠지…….’
“마력 보충액을 충분히 보내 주마. 한동안 푹 쉬어 둬.”
걱정하며 건넨 한마디에 허니 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크 님…….”
부당한 착취에 적응해 온 꿀벌족.
내주는 게 당연한 그들에겐 이조차 감동이었는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로열젤리를 확보한 후 돌아가는 길.
그동안 관심을 두지 못한 꿀벌족들의 생태를 둘러봤다.
개미족은 지하 곳곳에 꿀벌족이 살아갈 곳을 제공했고, 꿀벌족은 그곳을 숲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꿀만 생산하는 게 아니다.
인근 개미족의 농장 일을 도왔고, 하이 페어리들을 도와 특수 작물 재배까지 함께했다.
‘만능 일꾼이 따로 없군.’
군체 규모에 따라 허니 퀸들 사이에선 계급이 세분됐고, 일벌 계급의 생태도 변했다.
마력을 축적한 일벌들이 진화하여 엘리트 허니비라 불렸다.
‘개미족처럼 다양한 형태는 아니야.’
전투 계급인 일벌도 있었지만, 덩치만 큰 수준.
전투 종족과 채밀 종족의 차이일까?
군체원의 수가 많아질수록 강해지는 개미족과 달리 꿀벌족은 많아질수록 풍요로워진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단 말이지…….’
몇 번을 뜯어 봐도 꿀벌족의 전투 계급은 쓸모가 없어 보였다.
특급 진화석 재료인 로열젤리를 충분히 확보했고, 마력수를 비롯한 나머지 재료들도 모여들었다.
포병대를 통해 용해용 강산(强酸)도 준비됐으나, 한 가지 재료만은 쉽사리 구할 수가 없었다.
그건 특급 마석이었다.
‘왕급 몬스터가 흔하진 않단 말이지.’
서쪽의 미노타우로스와 키클롭스를 사냥하면 얻을 수 있지만, 왕급임에도 사회적인 놈들이다.
잘못 건드렸다간 이쪽이 쓸려 나갈 수 있어 조심스럽다.
‘오그르트가 관리하던 던전이라면…….’
오거 숲 중앙.
과거 오그르트가 지키던 고블린 던전이 있다.
통로가 작아 대형종 몬스터는 진입이 어렵고, 정기적으로 고블린을 쏟아 내 오그르트와 오크들의 식량원이 되어 주던 곳이었다.
“거기 지하엔 오거가 있다.”
네론이 말하길 던전에서 탄생한 생물은 모습이 같을지언정 숲의 생명체와는 결을 달리한다고 했다.
“그들은 생각이 없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들도 점차 의식이라는 게 생겨났고, 간혹 던전 밖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때때로 던전이 강제로 내보내기도 한다.”
수년간 고블린 던전 밖으로 전송된 오거는 없었다.
“지금 던전 심층부엔 오거들이 바글거릴 거다.”
웬만한 왕급 몬스터도 위험할 수 있어, 심층부를 탐색하기란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지.’
특급 마석 채굴과 던전 탐사를 위해 직접 나서기로 한 나는 소수 정예의 파티원을 모집했다.
‘상대가 오거니, 왕급은 되어야 해.’
조건만 맞으면 왕급 이상이지만, 평소에는 준왕급 수준인 네론은 제외했다.
‘딜러인 크라스는 꼭 불러야 해.’
크라스가 진화한 후 그의 영역을 노리던 몬스터가 줄었기에, 잘 꼬드기면 탐색대에 넣을 수 있다.
‘헤라클레스는 내 일에 관심이 없을 거고, 일단 사도 파티를 불러와야겠어…….’
* * *
디아, 나르본느, 타르.
셋은 다크의 부탁으로 왕국을 떠돌며 흑마법사들을 찾아다녔다.
숨어 버린 흑마법사를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지만…….
그림자의 안내로 흑마법사가 있을 만한 곳에 도착하면 나르본느가 거미 지배를 활용하여 탐색에 들어갔다.
“저놈 뭔가 친숙한걸.”
마신에게 선택받은 사도들은 흑마력을 친숙하게 느꼈기에 흑마법사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건 둥지로 모셔 가기 위한 설득이었다.
“내가 하지.”
아직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두 몬스터에게 맡기기엔 난도가 높다고 생각한 디아가 설득을 맡았다.
육중한 갑주를 입은 디아는 흑기사 그 자체.
강렬한 압박을 받은 흑마법사는 공격 혹은 도주를 선택했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디아에게 제압당했다.
마법사의 몸은 허약하다.
발버둥 치다 다칠 수 있어 기절시켜야 했다.
“놔라!”
퍽!
“살려 줘!”
퍽! 퍽!
마법사가 죽지 않게 기절시키는 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디아, 혹시 이게 인간식 설득이냐?”
타르의 질문에 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득은 좀 더 평화적인 거다.”
“디아, 저쪽에도 한 명 더 있어. 내가 갈까?”
“설득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 인간인 내가 가겠다.”
그렇게 흑마법사들을 만나며 왕국을 떠돌아다닌 셋.
애초에 사도인 디아는 돌연변이에 가까운 존재여서 협상 능력이 없었고, 이를 깨닫지 못한 디아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설득력을 높여 보려 했으나, 제압 스킬만이 나날이 발전했다.
하이 페어리가 다크의 편지를 가져왔을 때의 디아는 상대가 공격 혹은 도주를 선택한 순간 가벼운 일격을 턱에 꽂아 눕힐 수 있게 됐다.
“대단하다냥. 이 녀석… 상처도, 기억도 날아갔을 거다냥. 이게 바로 평화적인 일격. 아니, 설득이구나!”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 타르는 씁쓸해하며 말을 이었다.
“내 발로는 힘들겠다냥…….”
타르의 극찬에 의기소침한 디아는 다크의 편지를 펼쳤다.
“무슨 내용이야?”
디아가 직접 읽으라고 건넸지만, 나르본느는 귀찮다며 내용만 말해 달라고 했다.
“고블린 던전의 탐사대를 꾸린다는군.”
“오거 숲의?”
디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르본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드디어 갈 생각이 들었나 보네…….”
나르본느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꺼림칙함을 느낀 타르가 물었다.
“나르본느, 거기에 대해 아는 거냐?”
“음… 가 본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
나르본느는 노골적으로 시치미를 떼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디아를 쫓았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