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림책의 뒷이야기
숲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갑각왕 헤라클레스는 인간들의 변화를 감지했다.
‘이상하군…….’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숲을 태워 농지를 가꾸던 인간이 줄어들며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다.
‘숲을 침범하던 무장 인간도 줄었어.’
무장 인간이 준 것은 전쟁으로 용병들이 북쪽으로 간 것과 각지에 사냥하기 좋은 던전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역을 침범해 오던 인간들이 물러나고 있다.’
북방 개척을 위해 귀족들이 떠나간 곳을 다크가 관리하게 되면서 세금 압박을 가하지 않자, 숲에 숨어 살던 화전민들이 일자리가 있는 도시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목재와 식량을 개미족으로부터 얻기 때문인가?’
헤라클레스는 선대 갑각왕으로부터 인간을 배웠었다.
‘인간은 건드릴수록 더 많은 무장 인간이 찾아온다. 몬스터가 피 흘려 얻어 낸 한 줌의 숲도 금세 그들의 손에 넘어가 불태워지지. 헤라클레스, 넓히려 하지 마라. 숲이 커질수록 놈들의 탐욕을 자극할 테니…….’
선대의 유지를 받든 헤라클레스는 숲의 경계에서 인간들의 침범을 경계했고, 가끔 모습을 드러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역대 갑각왕들은 인간들이 숲을 탐낸다고 생각했다.’
빈 마을들을 보며 헤라클레스는 선대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저들은 숲에 관심이 없었어…….’
숲에서 얻을 수 있는 걸 개미족을 통해 얻을 수 있게 된 지금, 인간은 숲보다 도시에 관심을 가졌다.
‘공생이라.’
인간의 발길이 끊긴 숲.
숲의 경계는 점차 확장됐다.
‘인간은 숲을 탐한 게 아니야…….’
폭증하는 몬스터가 숲을 벗어나려 했고, 이대로 두면 경계선 인근의 인간들이 몬스터의 먹이로 전락할 게 분명한 상황.
‘인간들은 알고 있었던 거다.’
인간이 숲을 없애지 않으면 늘어난 몬스터들이 인간을 노린다.
나약한 인간은 숲을 없애 몬스터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
‘이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깨달음을 얻은 헤라클레스는 선대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선대여, 당신들은 인간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던 것 같군. 숲을 터전으로 삼은 우리와 숲을 없애려 하는 인간은 공존할 수 없다는 걸 말이야.’
헤라클레스는 몬스터와 인간의 영역 경계가 무너져 가는 걸 지켜보며 앞으로 발생할 대규모 충돌을 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미족이 지하 은신처를 만들었고, 고블린을 비롯한 각종 몬스터가 보이지 않게 됐다.
“…….”
자신의 깨달은 자연의 섭리가, 섭리가 아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헤라클레스.
“공존이… 가능한 거였어…….”
진심으로 놀란 그는 한동안 얼빠진 상태로 지냈다.
수십 년간 축소해 오던 숲의 경계선이 차츰 넓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심경은 복잡했다.
‘경계선의 변화는 몬스터와 인간이 흘린 피의 양으로 결정됐거늘… 숲도, 인간도 변하고 있어’
인간의 침범은 줄어들고 있지만, 숲을 찾지 않는 건 아니었다.
몬스터가 지하로 숨어드니 겁 없는 아이들이 숲에 발을 들이는 경우가 늘었다.
‘아이들인가? 따로 경고할 필요는 없겠지.’
숲의 경계에 자리한 헤라클레스는 예전과 같이 오가는 인간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저 아이는 유독 자주 보이는군.’
인간을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소녀 정도는 헤라클레스라도 기억할 수 있었다.
‘오늘은 혼자인가?’
‘또 왔군.’
‘왜 오는 거지?’
‘뭘 찾고 있어…….’
시간이 흘러 소녀가 숲을 돌아다녀도 신경 쓰지 않게 된 헤라클레스.
“하악… 하악…….”
거친 숨소리로 내달리는 소녀와 그녀를 쫓고 있는 늑대 무리를 보게 됐다.
‘곧 잡히겠군.’
소녀는 헤라클레스가 쉬고 있던 나무 아래에서 포위당했다.
헤라클레스는 늑대들의 식사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으나, 늑대 무리의 대장은 이곳이 헤라클레스의 영역임을 알고 있었다.
“크릉… 크릉.”
나무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헤라클레스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한 늑대 무리의 대장은 소녀가 나무에서 멀어지게끔 위협을 가했다.
“오지 마! 오지 마!”
공황 상태의 소녀는 늑대가 기껏 열어 준 탈출구를 발견하지 못하여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나무에는 발판이 될 만한 돌출 부위가 많았지만, 몸을 지탱할 만한 가지는 매우 높은 곳에 있었다.
사람 높이만큼 올라가 나무의 돌출 부위에 서는 데 성공한 소녀.
“히익.”
그녀는 늑대들을 내려다보며 핼쑥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늑대들이 자신에게 닿지 않아 주변을 맴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 늑대들은 언제든 소녀를 끌어내릴 수 있음에도 헤라클레스의 눈치를 살폈는데…….
“크릉. 크르릉.”
늑대들은 사냥감을 포기하고 물러나기로 했고, 이를 긴장하며 바라보던 소녀가 안도했다.
“휴.”
비틀.
마지막 늑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나무에서 미끄러진 소녀가 떨어졌다.
쿵.
땅에 떨어진 소녀는 나무 위에 걸터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헤라클레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
그동안 헤라클레스가 본 인간은 모두 자신을 보고 석화된 듯 멈췄었고, 잠시 후 핼쑥한 표정으로 주저앉거나 허둥대며 도망쳤었다.
그런데, 소녀의 반응은 그동안 헤라클레스가 봐 온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상기된 표정의 소녀가 헤라클레스를 빤히 바라봤고, 몸을 털고 일어나선 나무를 오르려 했다.
쿵.
나무에서 몇 차례 미끄러진 소녀.
나무 오르기를 포기하곤 바닥에 주저앉아 헤라클레스를 힐끔거렸다.
한참이 지나도 떠나지 않는 소녀.
헤라클레스는 소녀가 숲에서 길을 잃어 옴짝달싹 못 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힐끔힐끔.
품에서 종이를 꺼낸 소녀는 헤라클레스를 힐끔거리며 뭔가를 그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태양이 저물었다.
아우~
많은 야행성 몬스터들이 활동하는 시간.
헤라클레스는 소녀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 오는 숲의 존재들을 느끼며 여전히 해맑은 표정으로 자신을 힐끔거리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이상한 인간이군.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사각사각.
어둠 속에서 숲의 청소부들이 나타났다.
‘개미족의 청소 시간인가?’
헤라클레스는 소녀가 개미족에 의해 분해되어 옮겨질 미래를 떠올렸지만, 그런 미래는 찾아오지 않았다.
빅 워커들에게 둘러싸인 소녀는 자세를 낮추며 목걸이를 내밀었다.
더듬이로 목걸이를 확인한 빅 워커들은 소녀에게 따라오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곤 길 안내를 시작했다.
빅 워커들을 따라가려던 소녀가 뒤돌아보더니 나무 아래에 뭔가를 내려 뒀다.
빅 워커들의 재촉에 소녀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마을이 있는 곳으로 떠나갔다.
급변해 가는 인간과 개미족의 관계를 알지 못했던 헤라클레스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숲의 생태가 변해 가고 있다지만…….”
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있던 헤라클레스가 나무에서 내려와 소녀가 두고 간 물건을 확인했다.
자신을 본떠 만든 듯한 조잡한 나무 조각과 소녀가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그림책.
조각을 내려 둔 헤라클레스는 그림책을 펼쳤다.
한 장 한 장 그림책을 넘기던 헤라클레스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건…….’
오래전 한 무리의 용병단이 숲을 침범했다.
목적을 달성한 그들은 함께 온 여자 동료를 덮치려 했고, 반항하는 여인을 제압하려던 중 헤라클레스가 쉬고 있던 나무에 상처를 남겼다.
헤라클레스는 그들에게 나무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왔고, 그를 본 용병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용병들은 도주 중 나무와 충돌하여 갑각충들의 분노를 샀고, 몇몇은 도주하다 넘어지며 머리, 혹은 다리를 다쳐 죽게 됐다.
방향을 잘못 잡아 고블린들의 소굴로 뛰어든 용병도 있었다.
모두가 죽으면 자신의 경고가 인간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헤라클레스는 굳어 있던 여인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돌아가는 길을 알려 줬고, 습격해 오는 몬스터로부터 보호해 줬다.
그러한 내용이 각색되어 그림책에 그려져 있었고, 후반부에는 마을로 돌아간 여인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홀로 돌아온 여인은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그녀가 하는 말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여인은 가정을 이루고 딸을 낳았다.
그림책의 새 주인공이 된 소녀.
소녀는 마을 사람들이 엄마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아 슬펐다.
소녀가 갑각왕을 찾아 나서는 장면의 그림을 넘기니 개미족과 친구가 된 그림과 늑대들에게 쫓기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그려진 마지막 장을 넘기곤 아쉬워했다.
“뒷이야기가 궁금하군…….”
그림책과 조각을 챙긴 헤라클레스.
소녀가 다시 찾아오면 뒷이야기를 물어보려 했으나, 그날 이후 소녀는 숲을 찾지 않았다.
“혹시 날 기다린 거야?”
기다리던 소녀 대신 나르본느의 방문에 헤라클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다.”
“에이, 기다리고 있었구먼.”
“여긴 내 영역이다. 시끄러우니 용건만 말하고 꺼져라.”
헤라클레스의 까칠한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르본느가 용건을 꺼냈다.
“오거 숲의 던전에 가 보기로 했어.”
“그래서?”
“같이 가자고.”
헤라클레스가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하자 나르본느가 다급히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너 여기 있어도 할 일 없잖아.”
정곡을 찔린 헤라클레스가 움찔했다.
“그 던전, 오래 방치돼서 청소 한 번 해 줘야 한단 말이야.”
“던전 청소에 나까지 필요한가?”
“그럼! 목표는 심층부의 오거들이야. 너라도 있어야 우리들의 부담이 줄지. 같이 갈 거지?”
“…….”
나르본느는 헤라클레스가 손에 쥔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딴생각을 하는 듯하여 심통이 났다.
거미줄을 쏘아 빠르게 접근한 나르본느가 조각과 그림책을 뺏었다.
“뭐야? 이건?”
헤라클레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인간이 남기고 간 물건이다.”
“인간 거야?”
조각은 돌려주고 그림책을 넘겨 본 나르본느.
“흠… 재밌네.”
“너는 그 뒷이야기가 어떨 것 같나?”
“당연하잖아.”
헤라클레스가 눈을 크게 뜨고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다음 장엔 너한테 찢긴 인간이 나무의 거름이 되는 그림이 그려져야지. 뭐, 이미 찢겨 버린 인간이라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테지만…….”
헤라클레스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야? 내가 틀린 거야? 그럼 다크에게 물어봐. 인간에 대해선 잘 아는 녀석이잖아.”
순간, 눈을 빛낸 헤라클레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렇군. 다크라면 알지도 모르겠어.”
* * *
“거길 우리끼리 간다고!”
나르본느는 던전의 위험성을 말해 주며 헤라클레스도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데려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나르본느가 헤라클레스를, 나우피어가 크라스를 데려오는 동안 나는 던전 심층 공략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각종 무기와 식량, 그리고 탐색에 쓸 개미과 거미를 항아리 가득 담았다.
무욕의 팔찌엔 생명체가 들어가지 못한다.
개미와 거미 또한 생명체였기에 항아리 채로 짊어져야 했다.
“피어레스, 나우피어. 너희는 뒤따라오며 잡몹을 정리해 줘.”
“맡겨 주십시오.”
“해 볼게요!”
후속 부대로 가디언 스무 마리와 소드 앤트 스무 마리를 배치했을 무렵, 크라스와 헤라클레스가 도착했다.
이번 던전 탐사에는 포스도 함께 가기로 했다.
“오거 레이드라…….”
예전 오그르트를 상대했던 기억이 잠시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전력을 갖췄다.
포스, 디아, 헤라클레스를 전위로 세워 튼튼한 탱커진을 형성했고, 재빠른 타르와 나르본느가 시선을 끌면 나와 크라스가 프리 딜을 먹일 수 있으니.
나는 오늘도 내 계획에서 벽을 느꼈다.
완벽이란 벽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