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최소한의 신의, 도리. 그건 지켜야
오영훈 KGT홍보실장.
KGT 근속년수 15년, 홍보 경력 24년.
홍보외길로 고속 승진해 온 고위간부였다.
내가 통신 분야를 담당하게 된 이후, 오영훈 실장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공식행사가 아니고선 쉽게 몸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게 당연한 위치의 사람이었다.
그런 오 실장이 날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사람이 왜 갑자기 날?’
인정받은 기분보다도 의아함이 더 컸다.
한 가지. 그의 눈에 들어왔을 이유로 짐작 가는 건 요금제 개편 기사 정도였다.
“어제 코코아 합병 기사 보시곤, 바로 지시하셨어요.”
내 앞에 앉아있던 박정태 과장이 말을 덧붙였다.
“코코아 기사요?”
의외의 얘기에 내가 반문했다.
물론 내일코코아 합병 기사는 특종이다.
업계의 촉각을 곤두세울 만한 일이니까.
하지만 통신업계 기사는 아니다.
“네에. 지난번에 요금제 개편 기사 쓰신 걸 기억하고 계시더라구요. 주 기자님한텐 특별히 잘해드리라고 당부하셨어요.”
‘싹이 보였던 걸까.’
연달아 터트린 특종이 역시 눈에 띄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지나친 특별대우다.
특종을 터트렸던 다른 선배 기자들이, 홍보실 단체인사를 받았단 소린 들어본 적 없다.
‘······뭐, 그래도 잘해줄 때 즐겨볼까.’
굳이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홍보실 쪽에서 우호적으로 나와 준다면, 취재하기 편해진다.
나로썬 하등 나쁠 게 없다.
의심스럽긴 하지만 초칠 필욘 없단 거다.
“주 기자님, 이렇게 된 거 오늘 점심 식사나 같이 하실까요?”
박정태 과장은 평상시에도 능글맞았고, 가벼운 분위기다.
하지만 식사를 하잔 얘긴 이렇게 쉽게 꺼내는 편은 아니었다.
‘정말 단단히 주의를 줬나 보지.’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박 과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30분 뒤. 난 영기를 불러 박 과장과 함께 광화문 근처의 국수가게에 들어갔다.
“아 그러시구나~ 그럼 박 기자님이 그 사진 찍으신 거예요?”
주문한 비빔국수를 먹다말고, 박정태 과장이 조사하듯 영기를 공략했다.
“예, 예에.”
과도한 관심에 몸 둘 바 모르고 눈을 내리깐 영기가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박 과장의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저거다.
누구에게든 친근하게 다가가 혼자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햇병아리 기자였던 내게도 박 과장은 이런 식으로 다가왔었다.
처음엔 편하다.
내가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괜히 소속매체의 자격지심에 빠져있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내가 이야길 하려하면 골치가 아파지지.’
박 과장은 대답을 잘하는 성향이 아니다.
자기 할 말은 많은데 내가 묻는 말엔 얼버무리거나 실없는 웃음소리로 넘겨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가끔은 혹시 업무에 대해 잘 모르는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니까.’
난 영기와 친해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박 과장을 보며 생각했다.
KGT같은 대기업 홍보실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가끔 홍보팀 직원 중 대인능력은 뛰어난데 업무파악이 모자란 사람들이 있곤 했다.
“과장님. 박 기자가 아직 사람 대하는 게 익숙지 않아요.”
“아, 그러시구나. 제가 뭐 어려울 게 있나요? 편하게 대해주시면 됩니다! 핫하.”
내가 슬쩍 말려봤지만, 박 과장은 개의치 않았다.
의미 없는 창과 방패의 싸움은 한동안 계속됐다.
난 사실 창이 뚫어주길 바라는 쪽이었기 때문에 꽤 흥미진진했다.
“참, 박 기자님은 어느 쪽에 사세요? 주 기자님은 신길 부근에 사신다 하셨나?”
박 과장이 도움을 요청하듯, 날 보며 말했다.
“아뇨, 전 영등포시장 쪽이요. ······?”
대답하던 와중에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010-45XX-53XX]
또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다.
잠시 고민하던 난, 받아보기로 하곤 자리서 일어났다.
“전화가 와서, 잠시 실례할게요.”
박 과장과 단둘이 남게 된 영기가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별 수 없다. 난 일단 시끄러운 가게 안을 빠져나와 전활 받았다.
“여보세요?”
-주진형 기자되시죠?
나이든 여성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아, 저는 말이에요······
수화기 너머, 잠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왜 뜸을 들이는 건지, 알지 못한 채. 난 기다렸다.
-전자뉴스 소속 온라인 뉴스 매체 이뉴스 국장을 맡고 있는 채지영이에요.
이뉴스는 기문 선배가 소속돼 있는 매체다.
어딘진 알겠는데, 거기서 왜 뜬금없이 내게 연락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국장이?
“아, 안녕하십니까.”
-네, 반가워요. 주 기자한테 할 말이 있어서 김기문 기자한테 연락철 물어보고 연락했어요.
“아 그러셨어요.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네. 주진형 기자, 우리 매체로 왔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네, 에!?”
말을 듣다 놀란 내가 소릴 높였다.
-지금 이뉴스에 기자가 좀 부족하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기문 선배도 이뉴스에 기자가 부족하단 말은 꺼낸 적 없었다.
-그런데 주 기자 기사를 보니 참 마음에 들어서요. 생각 있으면 우리 매체로 올래요? 일단 메일 주소 보내 줄 테니 이력서만 보내주세요. 바로 확인······
“아니, 아뇨. 잠깐만요.”
훅 들어온 핵 직구에 내가 정신 못 차린 사이, 쉴 새 없이 진도가 나가고 있었다.
난 채지영 국장의 말을 딱 끊었다.
분명 이뉴스에 가면 좋겠단 생각, 했었다.
기문 선배한텐 내 힘으로 이직해 가겠다고 말도 해놨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무 일렀다.
“국장님. 말씀 정말 감사하지만 디지털투모로우도 기자가 부족해서요.”
-네, 알고 있어요.
꽤 냉정한 목소리였다.
지금 우리 매체의 상황을 알면서 그런 소릴 하는 건가.
“알고 계시다면, 제가 당장 옮길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시겠네요.”
물론 이건 내 모양새를 생각한 변명이었다.
지금 내 이직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짧은 내 경력기간.
이제 8개월 된 기자. 이직할 자격요건이 되질 않는다.
‘뭐 그런 걸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지. 워낙 안 될 이유가 많으니.’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입기자를 빼 가는 매체도 없었거니와, 빼갔을 때 주위 시선은 어떻겠는가.
나와 이뉴스, 서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느니 거절하는 게 맞았다.
-네. 알고 있어요. 주 기자가 아직 1년 안된 신입기자인 것도 잘 알구요. 그래도 본인이 원한다면 최대한 트러블 없이 이직하게 도울게요. 당연히 대우는 그쪽보다 괜찮을 거고요.
‘내가 신입인 걸 알면서도 이직을 시켜주겠다고?’
난 짧은 순간이지만, 이윤철 대표와 김정효 팀장을 떠올렸다.
구두쇠인 이 대표만 놓고 보면 떠나는 게 맞다.
광고 인센티브는 빼먹고 주지 않으려 하고, 대형특종 써낸 선물로는 쓰다 남은 문화상품권을 준다.
기본적으로 기자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그의 옆엔 오래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김정효 팀장의 곁을 바로 떠난다는 건, 어쩐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기자로써 날 가르쳐주고, 하나하나 챙겨준 사람이다.
지금 내가 천운을 얻었다고 배신하기엔, 아직 갚아야 할 게 많다.
“아뇨. 당장은 못갈 것 같습니다. 일단 제안해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난 마음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이뉴스로 간다면 분명 업무부담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금전적인 대우나 노동 강도도 훨씬 좋아지겠지.
하지만 이 업계는 작다.
최소한의 신의, 도리. 그건 지켜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군요. 혹시 언제라도 마음 바뀌면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알겠습니다.”
난 채지영 국장과의 통화를 끝낸 후에도, 한동안 거리에 서있었다.
과연 지금 내가 한 선택이 정말 옳은 거였을까.
약간의 아쉬움과 잘했다는 감정이 교차했다.
‘그래. 계속 잘해나가면 더 좋은 곳에서도 스카웃 제의, 또 오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난,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유, 어디 갔다 오셨어요. 국수 다 불었겠네.”
내가 돌아오자 박정태 과장이 나를 맞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영기는 꽤나 시달렸는지 날 보고 반색했다.
“아. 전화가 좀 길어져서요. 다 드셨어요?”
“네. 전 다 먹었네요.”
“네, 넵.”
“그럼 일어나시죠. 저도 더 먹을 생각이 없네요.”
마음이 싱숭생숭한 탓이었을까. 입맛이 사라져있었다.
우린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
이후, 난 이전처럼 평범하게 취재하고 기사를 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 후, 시청역 6번 출구.
난 영기와 함께 출구계단을 힘차게 걸어 오르고 있었다.
“영기씨, 빨리 가자. 이거 생각보다 좀 늦겠는데?”
내 말에 한참 아래서 올라오고 있던 영기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하, 오전 행사 있는 날엔 그냥 현장출근 좀 시켜주지.”
지금 시각은 오전 10시 20분.
내가 이렇게 일찍 사무실 밖으로 나온 건, 내일-코코아 때문이었다.
그렇다. 오늘이 바로, ‘내일코코아’의 합병 일이자 첫 출범일.
우린 이스턴선 호텔서 열리는 합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다.
‘행사 시작까지 10분 남았네.’
다행히 역에서 호텔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래도 제 시간 안에는 꼭 들어가고 싶었다.
그게 주최 측에 대한 매너였으니까.
“아, 주 기자님! 오셨군요!”
우린 헐레벌떡 이스턴선 호텔의 대연회장, 그랜드볼룸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엔 참석자들을 안내하던 정열성 매니저가 날 맞았다.
“딜라스! 안 늦었죠?”
“네에. 뛰어 오셨나 봐요. 걱정하지마세요. 아직 시작 안 했어요.”
“아휴. 꼭 이렇게 오전행사 있는 날에도 사무실 출근해서 기사 다 쓰고 나와야 한다니까요. 참, 이쪽은 인터넷 2진 담당하는 박영기 기자에요.”
“아, 안녕하십니까!”
“아, 박 기자님. 반갑습니다.”
두 사람이 명함 나누는 사이, 다른 코코아 홍보실 직원이 내게 종이가방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주진형 기자님.”
20대 후반의 여성, 이혜진 매니저였다.
“아, 이 매니저님이시구나.”
“네, 행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가방에 행사 보도자료와 소정의 상품 들어있으니까 확인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정열성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행사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늦게 와서 빈 곳이 별로 없네요. 아, 저쪽 자리가 남아있네요. 기자님, 그럼 기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딜라스.”
호텔의 대연회장.
수 십여 개 놓인 원형식탁 마다 삼삼오오 모인 기자들이 노트북을 펴고 앉아있었다.
나와 영기는 그다지 위치가 좋지 않은 뒤쪽 자리에 짐을 풀었다.
우리와 무대 사이, 방송국 카메라들이 세워져있어 시야가 영 별로였다.
“영기씨, 영기씬 있다가 행사 시작하면 일단 앞으로가서 카메라로 사진부터 찍고 있어.”
“네, 넵.”
나는 영기를 무대 쪽으로 보내 사진을 찍게 하고, 직접 기사를 쓸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뒤.
내가 식탁 위에 놓인 물을 마실 때였다.
“오늘 내일코코아 합병 및 출범식 행사에 와주신 기자 분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행사 시작을 알리듯, 스피커를 통해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신히 고갤 들어 무대를 보니, 사회를 맡은 건 딜라스. 정열성 매니저였다.
“지금부터 내일코코아 합병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내일코코아의 새 비전을 담은, 영상을 시청하시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실내조명이 어두워졌다.
곧이어 무대 벽 쪽에 설치된 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영기씨, 지금 당장 나가서 영상부터 사진찍어.”
“넵!”
난 영기를 무대쪽으로 바로 보내고, 화면을 주시했다.
영상에는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를 활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코코아톡으로 저런 걸 구상 중이란 말이지.’
기업이 새로 비전을 제시할 때, 그 내용은 대부분 향후 사업계획이라 볼 수 있다.
영상은 코코아의 핵심 서비스, 코코아톡이 앞으로 어떤 기능을 갖게 될지 짐작케 해줬다.
게다가 O2O(Online to Offline) 서비스들의 모습도 보였다.
O2O서비스는 온라인-오프라인 연결 서비스다.
고객과 음식매장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배달앱들도 O2O의 일종이다.
‘콜택시 서비스인가.’
내일코코아는 한 여성이 앱으로 택시를 타고 결제하는 내용을 보여줬다.
그 다음은 IoT(Internet of Thing). 즉 사물인터넷이었다.
‘거창하군. 생활 전반을 코코아로 묶겠다는 얘기니까.’
IT기업이라면, 특히 대기업이라면 모두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길이다.
어느 정도 납득은 갔다.
영상이 끝나자마자 기자들 사이서 박수가 나왔다.
그리고 이 박수를 받으며 성큼성큼, 드디어 그 사람이 등장했다.
전 코코아의 대표이자, 내일코코아의 공동대표 이적우.
“오늘, 내일코코아 합병식에 와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