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승부를 내려면 좀 더 확실해야 170828 수정
택시는 금방 이태원 사거리 부근에 도착했다.
난 택시요금을 낸 뒤 택시서 내렸다.
이미 하차해있던 예인과 영기가 도로변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예인에게 택시비를 청구하고 싶었지만, 저 돌아이가 순순히 낼 리 없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이제 좀 그만 따라와요.”
“왜요?”
왜, 라니.
골이 아파오는 걸 느끼며 내가 대답했다.
“우리 이제 식사하러 갈 건데, 좀 맘 편히 밥 좀 먹읍시다. 김 기자. 배려 좀 해줘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더 이상 예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예인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달려드는 탓에 이쪽은 피곤함만 한 가득이다.
“저도 저녁 아직 인데. 잘됐네요. 같이 먹으러가요.”
헌데 역시나 예인은 막무가내다.
“에휴.”
돌아이라는 걸 알기에 더 화도 나지 않았다.
난 졌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올렸다.
이를 본 예인은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전 고기가 좋아요.”
그런 연유로, 우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고기 집에 자리하게 된 거다.
원형 테이블에 나와 영기, 예인까지 셋이 둘러앉았다.
“여기 돼지갈비 2인분하고, 생삼겹 2인분 주세요.”
주문서를 들고 온 직원에게 내가 말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소주도 한 병 주세요.”
뜬금없이 예인이 끼어들었다.
“······우리 술 안 먹을 건데?”
난 영기에게 눈치를 주며 예인에게 거부의사를 밝혔다.
들어가서 정리해야할 것도 산더미고, 내일 또 취재하기 위해선 몸 상태도 관리해야 한다.
업계 미팅도 아닌데 건강을 축낼 순 없는 노릇이다.
“제가 마실 거예요.”
깔끔한 대답이다.
자기 혼자라도 마시겠다는 데 내가 막을 권리가 있나.
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갤 끄덕였다.
“아- 예. 그러시든가요.”
곧 기본상차림이 준비됐다.
“자자, 먹자. 오늘 고생했어, 영기씨.”
“네 선배도 드세요.”
나와 영기는 예인을 신경 쓰지 않고 먼저 나온 밥과 국을 먹기 시작했다.
군것질만 하다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니 속이 좀 차는 기분이 들었다.
“저, 처, 천천히 드세요.”
영기가 드물게 예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보니,
“우앗! 아니 벌써 소주 한 병을 다 마셨어?”
병이 완전히 비어있었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네~ 잠시 만요.”
예인의 주문을 들은 남자 직원이 냉장고서 소주 한 병을 꺼내왔다.
“저, 김 기자······ 마시는 거야 자유인데. 지나치게 빨리, 많이 먹는 거 아닌지? 밥도 좀 먹으면서 마셔요.”
슬슬 기가 막힌 걱정이 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술에 취한 예인이 난동을 부린다든지, 이곳저곳에 실례를 토한다든지.
‘지금 말리지 않으면 답이 없다.’
이런 내 걱정을 비웃듯이 예인은 막 도착한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곤 지나치게 가득 담긴 소주잔을 들고는 내게 건넨다.
“같이 마실래요?”
“······”
마시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대로 놔두면 또 저 병을 혼자 동내겠지.
그 뒷감당은 정말 할 자신이 없다.
“하- 알았어요.”
내가 잔을 받아들자, 다른 빈 잔에 예인이 소주를 다시 따랐다.
그렇게 총 세잔.
결국 영기도 잔을 들고 말았다.
“그럼 마셔요.”
예인의 간단한 말 한마디에 우린 천천히 소주를 마셨다.
때마침 고기도 나와 우린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 삼십 분 후.
“······전 처음에헤, 그냥 인터넷에헤, 글만 쓰며언, 되는 줄 알았다니까요······”
영기 혀가 슬슬 꼬여가고 있었다.
평소 도통 말이 짧은 영기도 술이 들어가니까 술술 내뱉고 있다.
“기자······ 이렇케에 사람 많이 만나는 건 주울, 몰랐어요오.”
아무래도 영기는 기자란 직업 자체를 잘 몰랐던 모양이다.
“뭐 지금이라도 알고 있으니 됐잖아. 잘 배우고 있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 보았지만, 영기가 듣는 모양샌 아니다.
“그래도오······ 요즘엔 쫌 좋은 거 가타요. 기자라는 거······멋있고······”
슬슬 영기의 고개가 테이블에 처박을 기세였다.
“······왜 이렇게 됐지.”
난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아니, 그게 끝이 아니다.
테이블 아래에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병이 모두 여섯 병이다.
“와, 정신이 확 깨네.”
난 고갤 흔든 뒤, 예인의 얼굴을 봤다.
“괜찮아요? 김 기자?”
“멀쩡해요.”
예인은 정말 아무런 취기 없는 얼굴이다.
그녀는 내게 대답하면서 또 소주잔을 채우고 있다.
“우리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쯤 해요. 김 기자도 내일 출근해야 될 거 아녜요.”
“알려주세요.”
“네?”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되물었다.
“아까 호텔에서, 이적우 대표랑 무슨 얘길 나눴는지.”
‘정말 지독하리만큼 끈질긴 사람이네.’
한편으론 대단함에 감탄사가 나왔다.
택시를 타고 올 때부터 예인은 일관되게 저 내용을 물어왔다.
아직까지도 난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고.
“후우. 우리 특종 경쟁하기로 약속했던 것 같은데?”
“그랬죠.”
“······그랬죠, 가 아니라. 지금 경쟁자한테 정보캐내는 겁니까?”
넌 자존심도 없냐.
난 그렇게 꾸짖는 말투로 예인의 물음을 피해봤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경쟁자든 뭐든. 지금 주 기자는 제 취재원이니까요.”
예인의 명쾌한 논리였다.
저 솔직함과 당당함.
선배 기자였다면 참 본받고 싶은 모습이다.
허나 피해자 입장에서 겪어보니 이거, 정말 짜증도 난다.
“좋아요. 독사처럼 물면 놔주질 않으니. 얘길 해줄 순 있어요.”
내 말에 예인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본다.
“다만 나도 손해보는 장사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정보료로 아까 택시비랑 여기 밥값. 전부 김 기자가 내요.”
속좁은 인간 취급을 받더라도, 상관없다.
공짜로 택시를 태워주고 밥을 사먹일 만큼 난 부자가 아니다.
갖고 있는 정보가 비록 내겐 큰 쓸모가 없지만, 이렇게 상대가 원한다면야.
값비싸게 치루고 팔아주면 된다.
“좋아요. 그정도라면.”
예인은 자신있게, 자신의 지갑서 카드 한장을 꺼냈다.
“택시비는 만원.”
내가 덧붙이자, 만원 짜리 지폐 한장도 빼서 내게 넘긴다.
예인의 카드와 지폐를 챙긴 난, 입꼬릴 올렸다.
“이적우 대표가 저한테 한 말은 이거뿐이에요. 혹시 우릴 취재하러 왔냐, 우린 금융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끝.”
“······그렇게 말했어요?”
의외라는 듯, 예인이 대답했다.
“네.”
사실은 이적우 대표가‘우릴 한 번 더 도와줄 일이 있을 것 같다’라고 영문 모를 소릴 하기도 했다.
허나 괜히 예인에게 말 꺼낼 필욘 없다.
일이 복잡해지지 않도록 간단하고 짧게, 끝내는 게 좋다.
“내일코코아가 금융 서비스를 내놓는다는 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에요. 오늘 만났던 사람들이-”
“금융위 쪽 관계자, 맞죠?”
내가 예인의 말을 가로챘다.
“네. 정확히는 금융위원회 산하에 있는 금융감독원 인사들이죠.”
‘상세히 알고 있었군.’
내가 말해준 이정도 정보로는, 예인에게 그다지 큰 소득이 안될 듯 싶다.
그래도 예인은 실망하지 않고 내게 질문했다.
“이적우 대표가 주 기자에겐 그렇게 솔직하게 말을 하던가요?”
“뭐, 저도 배달갑 취재 중인 걸 밝혔으니까. 서로 짧게나마 진실게임 한 거죠.”
내가 이적우 대표에게 말한 진실이, 훨씬 가치가 없긴 하다만.
“아직도 난 의문이에요. 이적우 대표가 주 기자를 그렇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이유.”
“거, 궁금한 것도 참 많으시네.”
난 자신도 모르게 소주잔을 들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캬아. 헙헙. 이제 그만 파합시다. 시간도 늦었고, 영기도 챙겨야 되고. 김 기자까지 커버할 자신은 없어요.”
내 말에 예인이 가소롭다는 듯 입 꼬릴 올렸다.
“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술에 잘 안취하는 유전을 물려받았거든요.”
그렇게 얘기하며 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말대로, 예인은 짐을 챙기더니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균형감각으로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난 그 말짱함에 놀라 한동안 쳐다봤다.
‘저 여자 자신감인지 아니면 믿음인지, 신용카드를 맡겨두고 그냥 나가다니.’
난 멍하니 식당 문 너머를 보다가, 일어섰다.
예인의 카드를 들고 계산대로 가 식사비를 쓱, 긁었다.
다행이랄까.
카드 주인의 술을 진탕 마셔준 덕분에 식사비는 10만원 가까이 나와있었다.
‘쌤통이다. 그래.’
계산을 마친 뒤.
난 몸을 못 가눈 채 식탁에 엎드려있는 영기를 일으켜 세웠다.
그를 부축해 식당을 빠져나오자, 예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김 기자. 카드 돌려줄게-”
“주 기자가 모든 걸 솔직하게 말했다고 생각진 않아요.”
신용카드를 받으려고 기다렸을 거라 생각했지만, 틀렸다.
예인에겐 카드보다 취재가 더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뭐어. 부정하진 않을게요.”
난 황당한 감정을 정리하곤 대답했다.
이런 거에 일일이 답해주는 내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오늘 들은 내용은 기사화 하지 않을 게요. 어차피 무승부일 테고, 승부를 내려거든 좀 더 확실한 게 좋지 않겠어요?”
도발적인 예인의 말에 내가 피식 웃었다.
“내가 알려준 정보가지고 지금 무승부라고 우기는 겁니까?”
“누가 알려줬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기자에게 중요한 건 그 내용이 팩트인지, 아닌지 일 뿐.
‘어쨌든 분위기 기사는 안 쓰겠다는 얘기군.’
내일코코아가 금감원과 물밑으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금융 서비스를 곧 출시할 거란 것까지.
사실 이정도 정황만 가지고도 충분히 기사는 쓸 수 있다.
단, 이런 기사엔 정작 그 금융서비스가 어떤 형태고, 언제 출시되느냐 등 중요 정보가 빠져있다.
즉 분위기 정도만 전달하고 마는, 위력이 약한 기사가 되는 거다.
“흐응. 더 큰 걸로 겨뤄보자는 건 좋아요. 근데 그 확실한 기준은 어떻게 정하죠?”
“서로 목표는 정해져있으니까요. 적어도 난 내일코코아의 신규 서비스명을 알아내는 걸로. 주 기자도 세부사항까지 확실하게 해서.”
난 예인의 말에 고갤 끄덕여 수긍했다.
내게 불리한 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신규 서비스명까지 알아내야 하는 예인이 더 어려워 보였다.
“그럼, 합의한 걸로 알게요. 또 봐요.”
예인이 떠나며 인사했다.
“우리 웬만하면 기사 낸 후에나 봅시다.”
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화답했다.
예인이 먼저 가고 떠난 후, 나도 택시를 잡았다.
영기의 집을 모르기에, 난 여의도 회사 사무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사무실로 들어온 난, 영기를 대표의 의자에 앉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영기를 사무실까지 데려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아. 김예인한테 말려들어서······ 개 고생했네.”
난 의자 여러 개를 이어 붙인 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승부를 내려거든 좀 더 확실한 게 좋지 않겠어요?
예인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확실한 승부라······ 하긴, 또 납득할 수 없는 패배란 소릴 하겠지.’
그런 건 자료출처에 대한 의심 때문이든, 자존심 때문이든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 처음부터 내 목표는 배달갑의 투자유치 성공과 김대훈 배달갑 대표의 경질여부였지.’
나도 이 결말로 이르는 과정 중에 취재를 접을 생각은 없다.
[딜리버리 빌런, 배달갑 인수 원한다] 등의 제목으로 간단한 기사를 터트리면, 그 순간은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들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좋아. 그때까지만 숨죽이고 취재하자.’
예인을 대형기사로 확실하게 짓밟는다.
이어서 소원까지 써 확인 사살을 하는 거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내 취재에 의문을 갖지 않겠지.’
마음을 정리한 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사무실.
난 숙취로 깨질 것 같은 관자 놀을 눌러가며, 오전업무를 마쳤다.
짙은 술 냄새 때문에 김정효 팀장은 눈치 챘으나, 난 내색하지 않았다.
“아 소 대리님. 저 어제 대표님 인터뷰했던 주진형 기자입니다.”
점심시간 전, 난 배달갑 소민영 대리에게 전활 걸었다.
소 대리는 그다지 반가운 기색 없이 대꾸했다.
-네, 주 기자님. 어쩐 일이세요?
‘바쁜데 왜 전화했냐는 어투군.’
바쁜게 사실일지라도 딱히 배려하고픈 생각은 없다.
어차피 홍보팀 직원의 일이란 게, 이렇게 기자들 상대하는 게 5할이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지금 배달갑 비상장주식 발행수와 김상운 의장 지분율을 좀 알고 싶습니다. 투자와 관련된 일이라서 그런데 빠른 답변을 좀 듣고 싶어요.”
난 시간이 좀 걸리는 일임을 알면서도, 간단한 부탁을 하는 듯 담담히 요구했다.
이렇게 자신의 할 일을 망각한 사람에게는, 약간의 괴롭힘도 필요한 법이다.
-······배달갑 주식 발행수요? 네 알아볼게요. 근데 급하신 건가요?
급하지 않다고 하면 느긋하게 확인하겠지.
“급해요. 배달갑 투자와도 연관 돼있는 거니까. 되도록 빨리 알려주세요.”
-아앗, 네 알겠습니다. 알아보고 제가 연락드릴게요.
“그럼 문자로 남겨주세요.”
난 통화를 끝내고, 바로 맞은편 자리에 있는 영기를 불렀다.
“어때 영기씨, 찾아냈어?”
푹 잔 덕에 숙취하나 없는 영기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갤 들었다.
“네 선배! 여기 있습니다!”
영기가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리자, 한 인터넷 기사가 보였다.
[김앤파트너스, 독 프랑크프루트 사무실 오픈]
[대표 김재승 변호사, 딜리버리 빌런 고문 변호사로 활동]
익숙한 얼굴이 화면 속 사진서 웃고 있다.
“찾았다. 김 변.”
나도 입 꼬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