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다짜고짜 호텔 이라고?
-비싼 곳이요. 알겠어요.
예인은 그 특유의 성격대로, 망설임 없이 순순히 내 말을 받았다
그게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상관없어서 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승인이 떨어졌으니 얻어먹을 일만 남았다.
“진짜 비싼 식당 아니면 납득 못 하니까요. 좋은 데로 물색 해주세요.”
난 반 농담 식으로 말했다.
일전에 예인이, 내게 납득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걸 꼬집어 본 거다.
-그러죠. 일정은 언제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쁘지 않으면 오늘 당장. 어때요?”
-······네. 그럼 장소 정해서 연락 할게요.
예인의 빠른 대답이 이어졌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었지만, 역시 시원시원하다.
“오케이. 그럼 저녁에 봬요.”
-네.
통화는 끝났다.
난 휴대전화를 귀에서 뗐다.
과연 예인이 날 어떤 곳으로 데려갈까, 기대감이 들었다.
‘흐응, 곤란한 얼굴을 한 번 볼 수 있으려나.’
언제나 무표정, 담담한 얼굴로 자기 할 말만 하는 예인이다.
허나 오늘만큼은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
난 식사자리서 최대한 예인에게 모멸감을 줘볼 계획이다.
처음으로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배, 커피 나왔어요.”
어느새 음료가 모두 준비 됐는지, 영기가 종이로 된 컵 캐리어를 들고 내게 왔다.
난 그가 건네는 투명한 커피 용기를 받아들었다.
“어어. 올라가자.”
난 신입들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갔다.
점심 이후 일정은 기자 재량이다.
오늘 예정 된 일정은 없었으나 굳이 사무실에 앉아 있을 필욘 없다.
난 영기에게 짐을 챙기라고 한 뒤, 나도 가방을 멨다.
“저희 나가보겠습니다.”
난 사무실에 앉아있던 김정효 팀장에게 보고했다.
“그래, 어디로 가게?”
김 팀장은 이미 정보보고를 통해, 오늘 내가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네 일단 SBT 기자실로 갈까 합니다. 요즘 놓친 정보 확인하고 바로 일정 잡겠습니다.”
사실 난 다음 목표를 이미 정해둔 상태다.
다만 아직 어떻게 엮어 들어갈지 구상하지 못했을 뿐.
이제 다시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
“알겠어. 뭐, 좀 쉬엄쉬엄 해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 잘 갔다 와.”
단독 기사 연타석 홈런에 김정효 팀장도 날 전적으로 믿는 모양새다.
“네. 가자 영기씨.”
우린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목적지는 SBT본사가 있는 을지로.
“영기씨, 기자실에 도착하면 새로 온 보도자료 처리 하면서 최근 뉴스 정도만 체크해.”
전동차 안에서 난 영기에게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오늘은 쉬엄쉬엄 일을 할 생각이다.
중요한 보도자료 처리도 오전에 대부분 끝냈기에, 영기도 편히 쉴 수 있을 터.
“넵.”
그런 내 속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기가 담담하게 답했다.
직후, 내 휴대전화가 연신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의 횟수와 간격을 보니 단순히 전화나 문자 메시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난 바지 주머니서 전화길 꺼내 알람을 확인했다.
[김기문 님이 주진형 님을 ‘디지털투모로우 탈출’ 코코아톡 그룹채팅에 초대했습니다]
[김기문 : 어이~ 우리 주 후배~ 대박 기사 자알 봤네!]
[상성훈 : 어? 주진형 또 특종 냈어?]
[이주연 : 아 상 선배, 제발 뉴스 좀 봐요. 진형이가 단독으로 배달갑 인수기사 썼잖아요.]
[김기문 : 에이 상 선배~ 지금 주 후배가 기자들 사이서 얼마나 난린데 그걸 모릅니까!]
[상성훈 : 오? 그랬어? 이야 축하해 진형이~]
디지털투모로우 출신 선배 기자들의 코코아톡 그룹채팅방이었다.
기문 선배가 날 그 방에 초대한 뒤로, 선배들의 대화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난 빠르게 휴대전화 화면을 두드려 대화에 참여했다.
[주진형 : ㅎㅎ감사 합니다 선배.]
[이주연 : 진형아 축하해. 우리 나가고 나서 진짜 잘하고 있네?]
날 칭찬하는 주연 선배는 3년 차 기자로, 방송/통신 분야를 취재한다.
[주진형 : 선배들이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김기문 : 주 후배, 이대로 가면 좋은 데로 이직 하겠는데?]
[상성훈 : 야, 그래. 더 열심히 해서 우리 쪽으로 와라.]
[김기문 : 후후후 우리 국장이 진형이한테 먼저 전화 걸었을 겁니다.]
[상성훈 : 어? 이뉴스 국장이?]
[김기문 : 네. 저한테 주 후배 연락처 물어봤거든요.]
[이주연 : 와 그럼 진형이도 디지털투모로우 탈출하는 거야?]
아직 이직 생각이 없는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선배들은 내 이직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당황한 난 빠르게 선배들의 흐름을 끊었다.
[주진형 : 아 아뇨. 일단 당장은 이직할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김기문 : 에에? 왜 그랬나 주 후배! 내가 싫어서 그런 건가!]
[주진형 : 에이 그럴 리가요. 그냥 1년도 안됐는데 이직하기도 그렇고, 팀장께도 죄송해서 미뤘습니다.]
[이주연 : ㅇㅇ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시기 너무 늦추진 마. 나도 겪어봤지만 다른데서 늘 불러 주는 게 아니니까.]
주연 선배가 최대한 날 배려해 말하는 게 느껴졌다.
주연 선배도 그렇고 기문 선배 또한, 이직 시기를 한 번 놓쳐서 고생했던 까닭이다.
[상성훈 : 그래, 그래. 뭐 예쁘다고 거길 있으려고 해. 기회 있을 때 그냥 확 넘어오라구!]
[주진형 : 네, 알겠습니다.]
[김기문 : 상 선배야 이 대표한테 하도 당해서 그렇지 ㅋㅋ 지금 이 대표는 진형이한테 잘해줄걸. 좋아 죽으려고 할 테고.]
[상성훈 : 너도 인센티브 50% 떼여봐라. 학을 떼게 된다.]
[김기문 : ㅋㅋㅋㅋㅋㅋ]
[이주연 : ㅋㅋㅋㅋㅋ선배 그거 떼이고 바로 나갔잖아.]
[주진형 : 상 선배 혼신의 힘을 담은 마지막 컨퍼런스였죠.]
[김기문 : 그게 다 우리들 월급으로 돌아 온 거야. 감사 합니다 상 선배.]
상성훈 선배의 희생을 놓고 우린 한동안 채팅방을 웃음으로 채웠다.
당시 상 선배가 받기로 한 행사의 인센티브는 총 참여사 수익의 50%.
헌데 막상 이윤철 대표가 지급한 건 그의 절반이었다.
이에 그동안의 폭거를 참다 참다 폭발한 상 선배는 바로 이직을 해버린 거다.
[상성훈 : 난 아직도 후회한다. 왜 그때가 돼서야 디지털투모로우를 탈출했는지.]
상 선배의 감정을 지금 나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김정효 팀장이나 내 연차 등, 다른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면 난 당장 디지털투모로우를 떠났을 거다.
상 선배의 이 메시지를 끝으로 잠시 채팅방에 침묵이 찾아왔다.
나도 그냥 코코아톡앱을 종료하려다가, 문득 물어볼 것이 떠올랐다.
[주진형 : 아 참 선배. 혹시 KMR에 대해서 아십니까?]
[상성훈 : KMR? 처음 듣는데.]
[이주연 : 어, 거기 SBC서 만든 곳이야.]
[주진형 : 주연 선배 아십니까?]
[이주연 : 응. 나 한창 통신 방송 쪽 취재할 때 지상파가 OTT플랫폼 탈출하면서 핫 했거든.]
주연 선배의 설명을 보자마자, 잊혀져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진형 : 아 기억납니다. 지상파가 통신사 스트리밍 앱에서 콘텐츠 다 뺀 거 말씀하시는 거죠?]
지상파 방송 3사는 본래 통신사들이 운영하는 모바일 동영상 스트리밍 앱, 즉 OTT 서비스에 자사 콘텐츠를 공급해왔었다.
그런데 콘텐츠 공급가를 재조정하면서 통신사들과 마찰을 빚게 됐고, 결국 공급은 중단됐다.
이후 지상파는 자신들이 만든 폭(PoK)이라는 OTT서비스에만 자신들의 영상을 공급하고 있다.
[이주연 : 맞아. 그때 지상파 3사가 콘텐츠를 폭에 집중하면서 대행업체로 만든 게 KMR이야. 근데 거긴 갑자기 왜?]
[주진형 : 저도 주워들은 얘긴데, KMR쪽에서 플랫폼 강화를 한다 그래서요. 잘 모르는 곳이라 여쭤봤습니다.]
주연 선배의 물음에 내가 대충 둘러댔다.
그래도 쌩 헛소릴 한 건 아니다.
미래에서 온 자료를 보면, 폭은 곧 플랫폼의 대대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이주연 : 뭐 자기들 돈 벌려고 통신사랑도 등졌으니 당연히 폭을 강화 하겠지. 뭐어 그래, 진형인 방송 쪽은 처음일 테니 잘 찾아서 공부해봐.]
주연 선배는 내가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별로 의심치 않는 눈치다.
하긴, 방송 분야에선 난 초짜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주진형 : 네. 감사합니다.]
나도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대화를 끝냈다.
‘KMR이 지상파 쪽이란 말이지······’
주연 선배가 말해준 정보를 바탕으로, 난 연락해야할 인원들을 차분히 생각했다.
SBT 본사 기자실로 이동 후.
난 기자실 좌석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으로 폭 공식 사이트를 접속했다.
웹사이트의 맨 하단을 보니, 주소지가 마포구 상암에 위치한 SBC 본사 건물이었다.
‘주연 선배 말대로네. SBC가 대표로 운영하는 모양이군.’
반면 포털 웹엔 KMR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아니, 정확히 전무했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세간의 관심이 전혀 없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이거 난항을 겪을지도 모르겠는데.’
정답을 알고 있어도,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없으면 기사는 쓸 수 없다.
난 차례로 검색포털을 바꿔가며 KMR에 대해 검색했다.
그렇게 수 분후.
결국, 실마리를 찾아냈다.
[KMR 코리아미디어렙(주) 기업정보]
구인구직 사이트에 등록돼 있는 KMR의 기업정보.
설마, 하는 마음으로 클릭해 접속하자 내가 원하던 내용들이 펼쳐졌다.
[코리아미디어렙(KMR)은 SBC와 MBD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광고판매 대행사······]
차례대로 기업개요를 읽던 난, 회사정보란에서 기업 대표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대표 직통 전화는 아니지만, 접촉해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난 KMR의 회사 전화번호를 내 휴대전화에 등록해뒀다.
지금 당장은 전화를 걸 명분도 구실도 없다.
‘이제부터 차차 만들어가야지.’
난 이메일 작성을 위해 웹브라우저로 이메일 보관함을 열었다.
수신인은 고글 코리아의 상무, 정이영숙.
두 달 전, 고글 코리아 기자간담회서 명함만 나눴던 서먹한 사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연락은 이메일로 하라고 했으니, 따라줘야지.’
정이영숙 상무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잘 확인하지 못한다며, 이메일로 연락해달라고 한 바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부탁받았으니 따라줘야겠지.
난 한껏 예의를 갖춰 이메일의 제목과 내용을 채워나갔다.
내가 접근 구실로 삼은 건 ‘미튜브’였다.
미튜브와 관련해 묻고 싶은 게 있으니, 최대한 빨리 일정을 갖자는 것.
[정이영숙 상무님,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최근 미튜브 관련 기사를 준비 중입니다. 급작스럽긴 하지만 혹시 내일이나 모레쯤 한 번 뵐 수······]
‘이 정도면 됐겠지.’
내용 작성을 마치고, 난 이메일을 발송했다.
‘이제 기다리는 수밖엔 없나.’
정이영숙 상무가 언제쯤 답장을 줄진 알 수 없다.
만일 내일까지 답장이 없다면 직접 전화를 걸기로 했다.
“-하암.”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지난 밤, 배달갑 기사를 작성하느라 늦게까지 잠을 못 이뤘다.
이 때문에 연신 하품이 나올 정도로 피곤했다.
그래도 선배들 눈에 진상으로 찍히고 싶진 않았기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자동적으로 감기는 눈꺼풀에, 스르르 잠에 빠질 무렵.
갑자기 책상을 요란하게 흔들며, 내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웃!”
놀란 내가 황급히 눈을 뜨고 놓여있던 휴대전화를 들었다.
‘정이영숙 상무 답신이 설마 벌써 온 건가?’
기대 반, 짜증 반.
난 비몽사몽 정신 상태로 휴대전화 화면을 켜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랜드하이 호텔, 6시 반까지. -이디넷 김예인 기자]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예인과의 만남, 그 장소가 적혀있었다.
“어······!? 다짜고짜 호텔이라고?”
순간적으로 당혹감에 휩싸인 난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다.
기자실에 있던 다른 기자들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